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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재 Jun 24. 2024

가여운 것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가여운 것들」리뷰

  영화가 주는 시각적 충격은 종종 큰 인상을 남긴다. 훌륭하게 연출하고 적절하게 삽입했다는 전제 하에, 그것은 메시지를 함축해서 전달하는 강력하고 상징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은 충격적이고 당황스럽긴 했으나, 불쾌하진 않았다. 

 영화 전체가 일종의 사회 실험처럼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라 벡스터’는 태아의 뇌를 그 어미의 신체에 넣어 탄생한 존재이다. 그녀를 탄생시킨 외과의사의자 의학의 권위자인 ‘갓윈 벡스터’가 부모로서 언어와 예절 등을 가르치고는 있으나, 원하는 것은 뭐든 주어지는 부유한 환경에 갓윈부터가 어딘가 뒤틀린 인물이기에 벨라의 성장과정은 그리 정상적이진 않다. 벨라는 재미 삼아 접시를 던지고 시체를 칼로 찌르며 노는 행동을 보인다. 물론 그녀는 그저 하고 싶으니 그리 하는 것뿐, 어떠한 악의도 가지지 않는다. 벨라의 탄생을 보여주고 그녀의 활동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실험을 시작한다. 사회의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은 순수한 존재가 성인의 몸을 가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 자유의지


  벨라처럼 가족의 자녀나 또래 집단의 일원으로서 하는 사회적 경험이 결여된 존재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아마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일 것이다. 나의 선택과 행동이 타인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이고 앞으로 어떤 결과를 부를 것이며, 그것이 자신에게 득일지 실일지 고려하는 것은 매우 사회적인 행동이다. 그러한 경험이 극도로 부족한 벨라가 맥스나 덩컨에게 ‘가랑이를 문지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건 놀라울 일도 아니다. 벨라는 맥락과 분위기를 모르며 하고 싶은 걸 왜 참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덩컨과의 여행도 같은 맥락이다. 신변에 하등 도움을 주지 못하는, 미숙한 벨라를 가지고 놀 가능성이 높은 바람둥이 덩컨. 벨라에겐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녀를 갓윈의 저택이라는 새장에서 꺼내 줄 것인데다가 벨라가 바라는 기분 좋은 일들을 함께 해주지 않는가(벨라의 말마따나 ‘뜨거운 뜀박질’ 같은). 덩컨의 인물 됨됨이나 그와 어울림으로써 주변으로부터 받을 시선 들은 벨라에게 고려할 바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덩컨과 함께하며 벨라에게 세상은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영화 초반부터 보여지는 흑백 화면은 벨라가 자유의지를 빼앗긴 순간들이 아닐까. 벨라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하더라도, 벨라는 그런 금기들이 왜 자신을 위한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억압받는다고 느낄 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자유의지가 꼭 인간에게 이롭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저택을 나가기 전에 유일하게 컬러풀하게 묘사되는 장면이 태아를 임신한 어머니 (벨라의 육체)가 투신을 행하는 장면 뿐인 것처럼 말이다.

  (벨라라는 존재를 태아(뇌)와 어머니(육체)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생각과 사고는 물론 태아의 것이지만 그를 실행하는 등 바깥 세상과 접촉하는 것은 어머니의 육체이다. 성적인 쾌락 추동과 미적인 쾌락 추동은 그녀의 성기와 미뢰가 성인의 것으로 이미 성숙해있기에 가능하다. 또한 육체의 여러 본능(훈제 청어에 대한 불호 등)이 벨라에게 남아있다. 따라서, 자살 장면에 색채를 부여 넣은 자유 의지는 어머니의 것일수도(죽고 싶다), 태아의 것일수도(살고 싶다) 있다.)


  벨라가 앞으로 하는 일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불어넣는 것이 바로 ‘자유의지’이다.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자유의지가 깃들어있기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다른 인간들이 겪는 일반적인 성장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회화되지 않은 벨라의 자유의지야말로  묻거나 영향받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것이다. 그렇기에 벨라가 겪는 기묘한 일들을 바라보는 것이 인간 존재에 대한 고찰이 되는 것이다.


  벨라가 먹고, 떼쓰고, 자위하고 섹스하는 장면을 보는 우리에게는 ‘야만적이고 교양없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 것이다. 벨라의 자유의지는 격정적으로 쾌를 추구한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쾌를 추구하며, 쾌만 누리며 살고 싶어하지만 사회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타인의 따가운 눈초리와 쾌 추구에 드는 비용은 우리를 예의 차리고 적절히 쾌를 조절하며 살게끔 만든다. 사실 우리에겐 벨라를 짐승 보듯 할 자격이 없지 않을까. 어쩌면 벨라의 사치와 식탐과 베드신 퍼레이드는 누구나 바라는 삶의 모습이다.

  반대로, 벨라의 모습을 보며 드는 혐오감이나 불안감 등은 사회가 가하는 거대한 억압의 힘을 실감하게 만든다. 우리와 벨라는 같은 종족이며, 벨라가 좋아하는 것들 것 우리도 대부분 좋아한다. 그런데 그 쾌를 필터 없이 탐한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벨라와 우리 사이에 거대한 간격(문명과 비문명, 인간과 짐승 등)이 있는 것처럼 느낀다. 벨라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보듯 쾌 추구와 본능에 존재하는 넓고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사회화 과정을 통해 우리처럼 정돈되고 통제된 형태로 다듬어지는 것이다.


  재밌는 건, 벨라의 쾌 추구가 가장 미쳐 날뛰는 곳은 정중하고 우아한 귀족 문화가 중점적으로 보이는 ‘리스본’이라는 점이다. 상위 계층들은 겉으로는 예식과 예법을 중시하지만 누구보다도 쾌를 탐한다. 언제든 쾌락에 접근할 수 있도록 그것들을 사방에 놓아둔다. 그냥 배를 채우기 보다는 굴을 먹은 후 샴페인을 마시기를 원한다. 그들은 미천한 아랫것들을 경멸하지만 실상 원시적인 감정들을 가까이 끼고 살며 갖가지 치장으로 그것들을 덮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환경에서 벨라는 그녀의 자유의지를 자극하는 것들이 널린 곳에서, 자유의지를 억제하여 정중하고 우아하게 향유하는 이들로부터 경멸을 받는다.


  반면 벨라는 놀라운 감수성을 보이기도 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빈민들을 본 벨라는 세상이 멸망이라도 한 것처럼 슬퍼하며 덩킨의 돈을 가지고 가 기부하려 한다. 벨라는 그날 처음으로 가난과 고통의 존재를 알았을 것이며 한탄과 눈물이 그에 대한 벨라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인간 속세에 무지하기에 자신이 그들과 같지 않음에 안도하거나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그들을 비웃지 않는다. 벨라에게 다른 많은 것들이 결여된 것처럼 어떤 우월감이나 자만심, 이기심 역시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약자에 대한 연민과 돕고자 하는 마음은 교육받지 않아도 타고나는 것이다. 또는, 오히려 사회에 대한 교육이 그러한 마음이 형성되는 것을 막는다.

  벨라에게는 있으면서 우리에게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순수한 자유의지이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이미 교육을 받고 사회를 겪으며 변형되어버렸다. 그것은 너무도 억압되고 꺾이고 뒤틀린 나머지, 본래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게임을 좋아하는 것은 나의 진정한 취향이 아니라 답답하고 지루한 세상에 대한 반발심인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그 덕에 선하고 예의 바르며 성실하게 살아가겠지만, 그게 진정 ‘나의 자유로운 의지’인지는 영영 답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2. 신


  눈여겨볼 것은 벨라가 꾸준히 에 비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의 모티브는 영화 시작부터 꾸준히 등장한다. 벨라의 아버지인 갓윈은 이름부터 ‘갓’ 이며 벨라에게는 대놓고 ‘신’이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갓윈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갖가지 인체 실험을 당한 탓에 흉측한 외모에 신체들도 재기능을 하지 못한다. 아버지로부터 주입 받은 극도로 차갑고 냉정한 사고관까지 가져 사람들로부터 괴물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뇌를 바꾸거나 다른 생물의 신체를 뒤바꿔 생명을 탄생시키는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갓윈의 손으로 태어나 마찬가지로 괴물이라고 불리는 벨라가 신으로 거듭나는 것은 처음부터 예견된 셈이다.


  벨라에게서 특히 두 신의 모티브를 찾아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난한 이들을 처음 목도하고 충격에 빠지는 것은 마치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는 과정을 보는 듯하다. 또한 벨라는 예수와 같은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갓윈의 실험체로서 인간보다 떨어지는 존재로 태어났으며, 도중에 창녀까지 된 그녀는 가장 미천한 출신으로 시작하여 여정 끝에 신이 된다. 게다가 그녀는 여러 단계의 부활을 경험하며 성장한다. 벨라라는 존재의 탄생은 죽은 두 생명의 육체적인 부활이며 갓윈의 저택을 나가는 것은 죽음 이후 단절되었던 사회로의 부활이다. 그 후 그녀는 리스본, 유람선, 알렉산드리아, 파리를 거치며 성장을 거듭한다. 그녀를 되찾기 위해 찾아온 (벨라라는 존재의 육체의 주인이었던 어머니의) 남편과 마주하며, 벨라는 어머니의 삶과 죽음에 대해 알게되고 자아의 부활까지 이룸으로써 마침내 완전해진다.


  벨라가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던 것은 물론 그녀의 기괴하고 미천한 출생 때문이다. 갓윈은 인간의 신체를 관장하는 신이다. 그는 인간을 죽이고 살리며, 생명을 분리하고 결합시킨다. 그에 걸맞게 그는 학구열과 함께 냉정하고 때로는 잔인한 성품을 지녔다. 반면 벨라는 성인의 몸에 든 아이로써 세상을 향한 호기심 탓에 여행을 떠났고, 그녀의 여정에 거쳐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아왔다. 평생 폐쇄적으로 살아왔던 갓윈과 달리 그녀는 세상을 둘러보며 인간 군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녀의 떨어지는 사회적인 소양들은 오히려 그녀가 투명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도움을 줄 뿐이었다. 그녀는 동정과 연민을 알며, 사회 밑바닥의 존재인 매춘부로 일하면서 세상의 추악한 구조를 몸소 경험하고 파악했다. 저택에 돌아온 그녀가 의학을 공부하기로 한 것도 큰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갓윈이 신으로서 관장하던 분야까지도 취하고자 한다. 그의 저택 바깥에서 갓윈은 그의 외형이나 성격으로 인해 신보다는 괴물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아름다운 모습과 함께 인간의 감정을 아는 벨라가 갓윈의 모든 것을 물려받고 부족한 곳을 보충했을 때, 그녀야말로 갓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존재가 될 것이다. 벨라는 갓윈처럼 생과 사를 관장할 뿐 아니라 그 생(生)이 살아갈 세상까지도 이롭고자 하는 신이다.


  물론 ‘신’을 강조한다고 해서 어떤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여기서 말하는 갓윈이나 벨라가 ‘신’이라는 것은 사실 ‘선구자’적인 존재라는 비유에 가깝다. 갓윈이 현대 의학기술에 훨씬 뒤떨어져 보이는 영화의 시대배경에도 뇌를 비롯한 장기 이식과 신체 합성을 하는 것을 보면 마치 신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벨라는 정치, 인문학, 철학 분야의 선구자이다. 그녀는 여성의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공산주의를 공부하기도 한다. 그녀의 일대기를 보라. 어머니의 육체에 태아의 뇌를 가지고 태어나, 전세계를 돌며 다양한 경험과 깨달음을 얻고, 창부까지 되었다가 다시 돌아와 재산과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것이 신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가여운 것들」에서 지켜본 것은 ‘벨라 벡스터’라는 혁명가의 배경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녀는 이제부터 세상을 바꿔나갈 것이다.



3.가여운 것들


  얼핏 영화의 제목인 ‘가여운 것’은 벨라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리기 쉽다. 그녀가 철없는 행동을 하거나 집을 나가는 것을 통제 받을 때, 무례한 행동들로 주위의 시선을 받을 때 그렇다. 그러나 벨라가 정말 가여운가? 최소한 그녀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며, 타인들의 시선과 생각에 그녀 스스로가 어떠한 의미부여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게다가 영화의 제목은 복수형인 ‘가여운 것들’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가여운 것들’은 누구일까?


  영화에는 다양한 유형의 ‘가여운 것들’이 등장한다. 첫번째는 갓윈 벡스터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았고, 냉담한 사이코패스처럼 보이지만 ‘평생 사람들의 시선에서 끔찍함과 연민을 느꼈다’는 말처럼 자신이 받는 경멸과 동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괴물처럼 보이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벨라를 아끼고 사랑한다. 오히려 그의 잔인하고 냉정한 모습들과 지나친 학구열은 자신의 신체를 해부하고 실험한 그의 아버지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갓윈 벡스터는 세상으로부터 학대당한, 사랑받지 못했기에 사랑할 줄 모를 뿐인 가여운 것들을 상징한다.


  갓윈의 조수이자 벨라의 약혼자인 맥스는 어찌 보면 벨라와 가장 반대되는 인물이다. 그는 거의 자기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싫다고 말하는 법이 없으며 갓윈과 벨라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승낙한다. 심지어 약혼자인 벨라가 호색한인 덩컨과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것에도 말이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예스맨들,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가여운 것들을 상징한다.


  덩컨은 벨라가 마주하는 첫 번째 세상인 동시에, 세상의 추한 면이다. 그는 타인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하며 쾌락과 향락에 빠져 산다.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금방 폭력을 휘두르고 고함을 지른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결국 상처받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 버림받고 싶지 않아 자신이 먼저 대상을 함부로 대하고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가 역으로 벨라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은 벨라야말로 그에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를 상처주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겉으로는 폭군이자 쾌락주의자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가장 외롭고 불쌍한, 그래서 가여운 것들을 상징한다.


  매춘부로 일할 때 벨라의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투아넷은 지적이고 악착같지만 현실이라는 벽과 부딪힌 사람이다. 부와 소득에 의해 신분이 나뉘는 사회적 계층 사회에서 재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핍박 받고 평생 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그녀는 똑똑한 만큼 더 나은 처지를 바라지만 밑바닥 계층인 그녀에게 주어진 일이라고는 매춘 뿐이며, 나아가 더 나은 사회를 바라지만 세상을 바꿀 힘을 가진 자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벨라가 유람선에서 만난 흑인 남성인 해리도 비슷하다. 그는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서,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투아넷보다는 처지가 훨씬 낫다. 또한 개혁을 위한 시도를 할 여유조차 없는 투아넷에 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유효한 시도들을 해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엔 그 역시 실패했을 것이다. 그가 얻게 된 것은 좌절 끝에 얻은 냉소적인 태도 뿐이다. 그는 다소 이상적인 벨라의 말을 꺾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빈민들의 참상을 보여준다. 투아넷과 해리는 불합리하며 철저히 이익계산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으로부터 무력감을 학습한 사회부적응자와 냉소주의자, 그런 종류의 가여운 것들을 상징한다.


  사망 전 벨라 육체의 남편이던 블레싱턴은 부와 권력을 쥐고 태어나 불합리한 세상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모두 지니고 있기에 스스로를 낮추거나 타인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 하인들이 말을 듣지 않자 그는 권총을 겨누고 명령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직위나 그의 재력만이 그라는 인물의 전부일 분이며, 세상의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어떤 온정도 느껴보지 못한, 공허하고 텅 빈 가여운 것들을 상징한다. 끝에 그는 염소의 뇌를 가지게 되지만, 그 전과 별 차이는 없을 듯하다.


  가여운 것들이 벨라를 억압하고 이용하고 착취하더라도 벨라는 함께 가여워지지 않는다. 벨라는 미숙하며 무지하지만 그것을 부정하거나 감추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떳떳하다. 벨라의 이런 태도는 무언가 요구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사회인들에 비해 많이 덜어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가? 스스로를 너무 죽이고 살아가지 않는가? 지나치게 후회하고 낙담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심리적으로 너무도 많은 짐을 지고 사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여운 자들은 바로 우리다.


  가여운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우릴 가볍게 만드는 것이 주로 사회정치구조인 만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다. 다만 스스로 가엽지 않고자 살아갈 수는 있다. 스스로 가엽기를 그만두면 된다. 자유의지를 가질 것. 그러나, 나의 자유의지가 타인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그것이 수많은 가여운 것들을 겪고 관찰해온, 그리고 그것들 사이를 당당하게 걸어온 벨라를 지켜보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아닐까?

 



  뒤늦게 OTT를 통해 「가여운 것들」을 관람한 것은, 그로테스트하거나 기괴한 것들도 가리지 않고 잘 보는 날 위해 지인이 이 영화를 추천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끔찍한 것들을 보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꼭 필요한 맥락에 맞게 사용되었을 때 주는 울림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여운 것들」은 그런 니즈를 충족시키는 아주 훌륭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독특한 플롯에 주제도 좋았으며, 엠마 스톤과 윌럼 더포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압도적이었고 미장센(화면 구성)도 대단히 아름다웠다.

  다만… 거의 1/3이 베드신인 이 영화를 극장에서 부모님과 함께 보았다는 내 지인… 가여운 것 0호를 위해 잠시 묵념을 했으면 한다. 좋은 영화 알려줘서 고맙고 힘내라 친구야.

영화는 좋았잖아. 한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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