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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재 Mar 07. 2024

「파묘」리뷰 2부 - 보이는 것들은 무섭지 않아

다분히 긍정적인 1부와 비판적인 2부, 중 2부


  어쩔 수 없이 장르영화로서 관객들이 기대하게 되는 요소들이 있다. 그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무관하게, 그런 장르영화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비판받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가지는 일종의 형식을 깨뜨린다면 비판의 사유가 된다. 그런 틀과 형식을 고수하지 않은 것이 '파격적이고 신선한 시도' 읽히기 위해선, 반드시 그만큼 치밀해야 한다. 시스템을 가지고 놀만큼 머리 꼭대기에 있어야 한다. 파묘는 장르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형식을 깨고 분위기를 급격하게 뒤틀었지만, 치밀거나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리뷰의 2부에서는 파묘의 그런 섭섭한 부분들을 짚어볼 것이다.



관이 두려운 것은 내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열면 해골빠가지가 있을 뿐.


빛이 없으라. 그래야 무서우니깐

  공포나 오컬트 영화에서는 무엇보다도 완급조절이 생명이다. 상영하는 2시간 내내 귀신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면 전혀 무섭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철저히 감추다가 필요할 때 폭발력 있게 보여주어야만 장르의 의미가 살아난다. 도리어 아무것도 등장하지 않음에도 어둠 속에서 무언가 등장할 것처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많다.

  송경원 영화평론가가 「파묘」에 대해 ‘중반까지는 별 넷’이라는 평을 남겼는데, 매우 동의한다. 「파묘」도 1부까지는 장르의 법칙을 잘 지켰다. 악령 박근현이 관이 열리기 전인 2장까지는 관 안에 든 상태에서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풀려난 이후에도 주로 천장 혹은 유리에 비친 상이나 손자 박지용에게 씐 상태로, 간접적으로 표현될 뿐이다. 그렇기 관객들은 그것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불안해하게 된다. 물론 장르의 작법상의 법칙을 항상 준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법칙이 법칙인 것은 그것이 그만큼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2부에서 법칙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면 그만큼 합리적인 다른 이유가 있거나, 그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나 효과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2부의 적인 장군 오니는 물리적인 육체를 가지고 직접 행동하며 영향을 행사한다. 공포에 명확한 형체가 생긴 순간, 정보가 생긴 순간 더 이상 공포가 끼어들 틈이 생기지 않는다. 관객들이 1부에서 박근현이 무슨 짓을 벌일지 두려워하는 것은, 범위를 넓혀서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무서워하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그런 존재들을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생기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인류에게 유전자단위로 새겨져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어둠 속을, 창 밖을, 혹은 등 뒤에서, 무언가 자신을 지켜본다거나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가정을 하며 무서워한다. 물론 현실에서 「파묘」의 1부와 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겠으나, 인간의 정신은 손쉽게 몰입한다. 영화에서 공포를 크게 느끼는 이들이 관람을 마치고 한동안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상황으로 영화를 끌고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가 2.5미터에 달하는 오니가 쿵쿵 걸어 다니며 내 간을 노린다는 상상은 현실로 옮기기가 많이 버겁지 않은가?

  대부분의 공포 영화, 오컬트 영화가 조도를 낮추고 공간을 극도로 활용하는 것은 뚜렷한 형체가 생기는 순간 더 이상 무섭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잘 만든 공포 영화의 대명사격인 「인시디어스」에서조차 영화의 끝에 흑막인 붉은 악마가 직접 등장하는 순간 몰입하던 관객들도 맥이 탁 빠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거구의 오니가 등장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그것이 활동하는 모습을 기꺼이 선명하게 보여준 것이 오히려 부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을 맴도는 도깨비불도 너무 직접적으로, 그것도 긴 시간 동안 보이자 작위적이고 우습게 여겨진다. 어둠 속의 형체, 은어를 움켜지는 투박한 손, 일본의 정령에 대한 언급 정도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경로를 찾을 수 없어 재검색합니다.'라는 네비게이션 음성이 장르 변경을 의미한다는 해석은 흥미롭지만, 그 정도 장치로는 장르 급커브를 납득하기 어렵다.


'장르'라는 황색선을 넘어버린 불법 유턴

  물론 2부부터 장르 자체가 달라진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가능하다. 1부는 확실히 오컬트였지만, 2부부터는 일종의 판타지 장르이기에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장르와 관점 자체를 뒤바꿀 때 영화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영화를 포함한 모든 매체들은 '관객의 몰입'을 획득하기 위해 애를 쓴다. 개연성이나 재미 등 컨텐츠에 대한 만족감과 직결되는 항목들이 몰입 여부에 따라 크게 좌지우지 된다. 중간에 장르가 바뀜으로써 영화의 문법 자체가 달라지면 관객들은 혼란과 함께 어색함을 느끼고 몰입에 방해를 받는다. 「파묘」1부와 2부의 장르 변화는 단순히 악당이 악령에서 괴물로 바뀌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대하고 이야기적으로 다루는 방법 자체가 바뀐 것이다. 예로 1부에선 주연들이 제어할 수 없는 변수들에 의해 휩쓸려다니며 (악지의 무덤, 의뢰인이 관 째로 소각하길 원함, 열린 관, 저항하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박씨 가문), 최후의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사건을 해결한다. 2부에선 먼저 적대자(오니)로부터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개개인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힘을 합쳐 계획을 세운다. 책략은 잘 통하는 듯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위기를 맞지만,

마침내 승리한다.

  굳이 그렇다면 애초에 다른 영화로 분리하여 만들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챕터가 나뉘어 있다고 해서 뚝 끊어 변화를 도입하면, 급작스러운 변화에 관객들이 어색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2부가 다른 장르처럼 보이긴 하지만, 오니가 풀려나 직접 행동을 시작하는 5장 중반부터 그렇다. 그전까진 여전히 오컬트물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이러한 '장르 급커브'가 더욱 당황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몰입이 깨진 관객들은 최면이 풀린 것처럼 당황스러워하고 의심할 뿐이다.

  혹은 이런 장르 전환이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이루어진다면 또 모를까. 그러기에는 6개의 챕터로 나뉘어있어 분절된 느낌이 강하게 들며 1부와 2부는 거의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즉 하나의 큰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덕분에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순간의 충격 ('첩장이다.' 라는 상덕의 대사)는 인상적이지만 그 이후가 죽어버렸다. 감독의 말대로 '허리가 끊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성공했지만, 아무래도… 허리가 끊기면 몸이 아프다.



시각적 이미지의 연속으로 공간과 시간을 형성하는 영화라는 예술의 묘미란, 바로 그 간접성이 아닐까. 영화는 보여줄 뿐이다.


영화의 주제 전달에 대해

  신파 영화가 욕을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대다수 영화의 주제는 신파 영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악에 맞선 선의 승리, 사랑의 쟁취, 복수 등등…. 다만 신파 영화가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과 과정은 직접적이고 과하게 감정적이며, 작위적일뿐더러 때로는 성의가 없게 보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파묘」에도 일부 그런 부분들이 있다. 상덕이 ‘우리는 별 탈 없이 살아왔지만, 앞으로 살아갈 자손들을 위해’ 오니를 막아야 한다고 부르짖는 부분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멋있게 맞는 말 하는 등장인물을 1차원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좋은 영화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주인공 4인방은 조금씩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모습을 가진 것이 매력이었기에 대사의 거부감이 더 심해진다. 단적으로 상덕과 영근, 화림이 죽음까지 각오하고 오니와 맞서 싸우는 것에 그들 행동의 당위성과 이해관계를 생각해낼 수 있는가? 상덕이 해당 대사를 하기 위해선 그의 자아성찰과 내적성장, 그가 오니에 맞서야만 하는 이유와 그 각오를 더 효과적으로 다뤄야만 한다. 그나마 화림에게는 ‘위험한 상태에 빠진 봉길을 위해’라는 입장이 가능하겠으나 작품에서 크게 대두되지 않는다.

  주인공들의 이름이 독립 운동가들의 이름이며, 차번호들도 일제 강점기와 그에 맞서는 항쟁에 주요한 날짜들이라는 분석을 보았다. 또한 친일 행적으로 큰 이득을 챙긴 가문이 부정적으로 등장하며 쇠말뚝에 대한 오해를 소재로 사용하였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에서 오니가 된 존재가 일제의 쇠말뚝 그 자체로 기능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 영화가 그런 비판점과 주제의식을 가지는 것 자체를 비난코자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파묘」에 가해진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좌파 영화라는 얼토당토 않는 비난에는 오히려 극렬하게 비판하고 싶다. 다만 더 세련되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이를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관객들도 많이 변했기에 단순한 이야기 전달과 신파적인 요소를 전처럼 쉽게 수용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고 동요시키는 주제의식일수록 전달에 있어 세심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예로 오니와 직접 대결하는 클라이막스와 에필로그에서 내레이션이 지나치게 활용되는 것이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이동진 평론가는 ‘허리가 끊겨 양분된 후 힘 못 쓰는 이야기, 편의적 보이스 오버로 시각적 상상력을 대체한 맥없는 클라이맥스.’ 라고 평하기도 했다.) 영화는 행동의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행동이라면 더 능숙하고 효과적인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좋은 영화의 조건이라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파묘」는 시간을 들여 볼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재현 감독은 오컬트 장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감독이라고 확신한다. 1부와 2부를 독립된 영화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아쉽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분기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관객에게는 「파묘」가 더 좋은 영화일 것이다. 풍수지리와 오컬트를 연결시킨 것은 꽤 신선했으며, 파묘라는 소재 자체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지 자료: 쇼박스 제공 이미지와 영화 예고편. https://www.youtube.com/watch?v=rjW9E1BR_30

세 번째 자료의 팬아트 출처는 (@poncho_an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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