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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수빈 May 26. 2024

대세는 레트로

'그때가 좋았지'라고 생각할 때가 아닐지도

  때는 2018년, 무심코 인스타그램 피드를 훑다가 학교 후배가 올린 게시물에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베이퍼웨이브’ 장르의 한 앨범 커버 이미지를 올려놓고 이렇게 썼다. ‘난 이 레트로 감성이 너무 좋다.’ 평소 같았으면 ‘그렇군’ 하고 시큰둥하게 스크롤을 내렸겠지만, 이맘때 한창 열풍이 불었던 ‘레트로’에 대해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도대체 레트로가 뭐라고 그렇게 난리들이야?’


  무언가가 유행을 타기 시작하고 한동안 그 시기가 지속되면, 대세의 반대편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물결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 또한 유행에 섣불리 편승하기보다는 이것이 잠깐의 바람인지, 아니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변화인지를 판가름하려 한다. 실은 아니꼬운 유행에 괜한 반감을 갖고 시비를 거는 쪽에 가깝지만.

  다른 무엇보다 레트로의 유행에 대한 반감이 유독 심했는데, 그것이 단순히 추억팔이일 뿐만 아니라 과거로의 퇴행 조짐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만족을 찾지 못하니까 자꾸만 익숙한 과거를 소환하는 건 아닌지. 몇 해 전 여름에 미스터리한 유행 현상을 일으켰던 형광색 의류처럼 반짝 인기에 그쳤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레트로를 마케팅 콘셉트로 팔아먹고 있으니 아니꼬울 수밖에.


  내게 레트로의 유행은 마치 헤어진 연인과의 좋았던 한때를 잊지 못해 자꾸만 과거에 함께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살면서 문득 과거를 회상하며 잠시 아름다운 추억에 잠길 순 있지만, 그 빈도와 시간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궁상맞은 집착이 된다. 과거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심해질수록 현재를 바로 보지 못하게 되고, 그럴수록 바로 지금 내 곁을 스쳐가는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만다.

  이러한 단상을 담아 <상이의 비디오>라는 제목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헤어진 연인과의 추억이 담긴 비디오를 끝없이 반복해서 보는 주인공 ‘상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비디오 속에 박제된 과거의 연인 ‘모경’은 오직 ‘힙하다’는 이유로 레트로를 추종하는 사람이다. 영화의 후반부, 모경은 모호한 이유로 상이에게 이별을 고하고, 영문을 모르던 상이는 고민 끝에 더 이상 그 이유에 집착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비디오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상이는 모경과의 모습을 기록한 비디오 파일을 지운다. 그리고 명상하듯 두 눈을 감으며 깊은 숨을 내쉰다. 이제 과거와는 작별하고 현재를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듯이.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한국에서 신드롬을 일으키고, ‘서울 사투리’와 당시 패션을 재현한 스케치 코미디가 인기를 얻고, 20년 전 어그 부츠의 유행이 돌아오고, 복고 콘셉트 뮤직 비디오가 쏟아져 나오는 등 레트로의 망령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 그놈의 레트로 열풍에 염증을 느껴 만들었던 <상이의 비디오>가 2018년도 작품인데, 그로부터 6년이 흘러서도 레트로는 죽지 않은 것이다. 단지 그 단어를 사용하는 빈도만 줄었을 뿐.

  과거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야 백번 이해한다. 나 역시 극장에서 되살아난 불꽃 남자 정대만을 보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좋아하고 익숙한 것을 반복해서 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다. 때문에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가 시퀄, 프리퀄, 리부트, 스핀오프, 리메이크 등의 명목으로 반복된다. 다만 이렇게 진탕 우려먹을 추억팔이 자원마저도 바닥나버린다면 그땐 어떡할 것인가?

  80년대를 겪어 본 사람들이 80년대를, 90년대를 통과한 사람들이 90년대를 정의하듯, 누구나 자신의 시절이 문화적 황금기였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다. 감수성 예민한 10대로서 2020년대를 살아갈 이들은 무엇보다 지금을 그 어느 때보다 문화적으로 풍성한 시대로 기억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그 시대의 문화라는 게 많은 부분 과거의 것을 재탕하거나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면 조금 슬플 것 같다.


  여전히 레트로의 단물을 빨아먹고 있는 지금, 그 이후를 한번 상상해 본다. 2020년대의 우리가 90년대를 추억하듯, 먼 미래에 추억하게 될 2020년대. 현재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질감과 정서, 분위기는 과연 무엇일까. 아니, 그런 게 있기는 한 걸까. 훗날 이 시대가 그저 ‘레트로가 유행했던 때’ 정도로 기억되진 않을까.

  언젠가 우리가 2020년대를 돌아보며 ‘그때가 좋았지’ 하고 감상에 젖을 수 있으려면 현시대만의 고유성을 반드시 획득해야 한다. ‘유행 끝물인 레트로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슬금슬금 레트로의 부활 조짐이 보일 때마다 나는 조금 불안해진다. 추억을 좇아 뒤돌아 달려가는 거대한 유행이 또 다시 찾아올까 봐. 마치 현실을 내팽개치고 어른 제국으로 달려갔던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 속의 어른들처럼.


  그러니 부디 레트로 타령은 이만하고, 미래에 ‘레트로’라고 불릴 만한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현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과거의 것을 가져와 재조합하는 시도를 벗어나, 바로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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