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에 의연해질 수 있을까
영상 제작사에 근무하던 때, 어느 커피콩 제조사의 광고 영상을 연출한 적이 있다. 어떡하면 커피콩을 멋지게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영상 레퍼런스와 촬영 기법을 공부하고, 이를 그럴듯하게 흉내내어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이 정도면 칭찬 좀 받겠는데?’라는 생각으로 대표에게 영상을 검토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대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나를 옆자리에 앉혀 놓고서 영상을 하나씩 뜯어보기 시작한 대표는 다소 실망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이 컷에서 다음으로 디졸브 되는 부분도 세련되지 못한 것 같고...” 대표의 코멘트를 들으며 난 그저 “네...” 하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완성도가 나쁘지 않다고 자부했던 결과물이었기에, 막상 부정적인 피드백을 들었을 때 마음이 더 크게 휘청거렸다.
마침 그날 저녁 수영의 한 지하 공간에서 내가 연출한 단편영화 두 편을 트는 상영회가 있었다. 열 평쯤 되는 공간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와 주었다. 스크린으로 내 영화를 관객들과 함께 보는 자리가 무척 오랜만이었기에 나 또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객석을 지켰다.
서랍장 한구석에 처박아놓고 한동안 꺼내지 않았던, ‘흑역사’나 다름없는 작품을 관객들과 함께 보는 건 일기장이나 졸업 사진을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만큼이나 수치스러운 경험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짐작하기 어렵게끔, 조용하고 진지하게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이 아득한 시간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상영이 끝나고 어둠에서 깨어난 관객들의 뒤통수를 보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대뜸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항마력 테스트 하는 줄...” 아마도 영화 속 다소 어색한 연기와 대사가 이어지는 부분을 두고 한 말일 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러움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나는 애써 그 말의 주인공이 누군지 확인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왠지 이를 확인하는 순간 마음이 덜컥 무너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깐의 휴식 후 이뤄진 GV 시간. 두 편의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감상과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데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상영 직후 누군가가 던졌던 그 한마디가 계속 맴돌았다.
영화가 제작된 지 오래될수록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볼 기회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런 만큼 좋은 기회로 만들어진 감사한 자리였지만, 그와 동시에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영화를 좋게 봐주신 관객 분들의 기분 좋은 칭찬도 많았지만, 웃으면서도 ‘그만 듣고 싶다’고, 얼른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든 나쁘든 영화에 대한 피드백을 듣는 것 자체가 버거워졌다.
상영회를 마친 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 그 한마디가 나를 따라다녔다. “항마력 테스트 하는 줄...” 눈물이 나지 않는데도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영상 업무를 계속해야 되고, 꿈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화도 계속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오늘처럼 내 작품에 대한 쓴소리도 수천 번씩 듣게 될 것이다.
‘이걸 평생 하면서 살아야 한다니.’ 그렇게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차라리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존감이 건강할 땐 부정적인 피드백에 부딪혀도 아무런 타격이 없거나, 다쳐도 금방 회복하곤 한다. ‘네가 뭘 몰라서 하는 소리지 뭐...’ 하고 그대로 내 갈 길을 가거나, ‘그래, 다음엔 더 잘해야지!’ 하고 오기가 생기거나. 그런데 마음이 썩은 감처럼 물렁물렁할 땐 조금만 건드려도 툭, 하고 주저앉고 싶은 유혹을 크게 느낀다. 때로는 자기 연민의 힘을 빌려 더 깊은 땅굴을 파고 들어가기도 한다.
내 삶으로 쌓아 올린 감각과 경험, 노력, 믿음의 결과물이 부정당하는 건 너무 아프고 쓰려서 몇 번을 반복해도 의연해질 수 없는 일이다. 온 마음으로 낳은 자식과 같은 작품이 몇 마디 말로 재단되거나, 심하게는 모욕까지 당하는 걸 보고 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누가 뭐라던 상처입지 않는 강철 같은 마음을 갖고 싶다. 그런데 그게 노력이나 훈련으로 가능한 것일까?
부끄럽지만 그날의 우울한 감상을 블로그에 쓴 적이 있다. 감사하게도 블로그를 즐겨 찾아 주는 이웃과 지인들이 따뜻한 응원과 위로의 글을 남겨 주었다. 누군가 댓글로 남겨 준 글처럼, 이 부끄러움이 오히려 내게 약이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닫자 마음이 한결 괜찮아졌다.
부끄럽다는 건 나의 부족함을 스스로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건 그게 내 눈에도 보인다는 거다. 작품을 만든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는 건, 그만큼 내 감각과 기량이 향상했다는 증거다. 만약 전작의 미숙함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했다면, 같은 실수를 다음 작품에서도 반복할 것이다. 부끄러움을 인식할수록 다음 작품에 그런 요소가 줄어들 것이고, 자연히 부끄러울 일도 줄어들겠지. 그렇게 부끄러움의 총량을 줄여 가다 보면 결국 좋은 작품을, 적어도 내가 떳떳하게 사랑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을 때면, 이대로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 수 없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분에 빠지곤 한다. 이것이 내 최선의 결과물이 아닐까. 이미 내 안의 모든 정수를 소진해버린 게 아닐까. 그런 지긋지긋한 생각을 반복하며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간다. 때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때로는 누군가의 응원과 위로 덕분에. 정체된 것 같은 기분을 지나 또 성큼, 올라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