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보다 더 큰 의미라는 게 있다면
“할매 보러 가기 전에 마트 들러서 뭐 좀 사 가야 되는 거 아니가?”
“뭐 사게? 어차피 이가 없어서 드시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빈손으로 가면 어떡하노?”
“전에 내 혼자 어머니 뵐 때 내가 다 알아서 사 갔다.”
매년 명절, 아직은 서툰 운전 실력으로 요양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뵈러 가는 길의 차 안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이 같은 대화가 오간다. 코로나 이후로는 가족이 다 함께 면회를 가더라도 할머니와 직접적인 접촉은 못 하고, 임시로 마련된 조악한 천막 면회실 너머로 할머니를 뵙거나, 병원 유리문 너머로 안부를 묻는 게 전부다.
나이 아흔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치매에 걸린 이후로, 면회 시간은 극히 짧아졌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어도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할머니, 제 얼굴 기억하시겠어요?”
“손주가 자기 얼굴 기억하냐고 묻네.”
할머니와 나 사이에 한 겹의 두꺼운 유리문을 두고 있는 상황, 간병인이 내 말을 할머니에게 전달해 준다. 한동안 가만히 내 얼굴을 살피던 할머니는 이내 모른다고 손짓하며 고개를 돌린다. 할머니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건 내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할머니를 알지만, 할머니는 우리를 모른다. 그러니 면회라고 해 봐야 할머니에겐 모르는 사람이 자꾸만 자신을 찾아와 성가시게 구는 시간에 불과할 터. 때문에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만나 뵌 지 채 5분이 안 되었는데도 “할머니,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하고는 돌아선다. 그렇게 할머니를 들여보내고 나면 우리 가족 중 누구도 먼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다시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헛헛할 수가 없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음을 알게 된 건 군대에 있을 때였다. 주말 오후 짬을 내어 막사 바깥에 있는 공중전화로 어머니와 통화를 하던 중, 할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당장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는 소식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펑펑 우는 모습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기억력이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툭하면 불평할 만큼 말씀하시길 좋아하는 수다쟁이여서, 할머니 댁에 놀러 갈 때면 항상 나를 옆에 앉혀 두고 본인이 기억하는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어린 나로서는 대부분 이해할 수 없고, 때문에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 이야기들이지만, TV도 켜 놓지 않은 조용한 방 안에서 이야기를 들려 주셨던 그 행위 자체의 따스함은 지금도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의 할머니는 내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예전의 그 할머니가 맞을까. 이처럼 내가 기억하는 예전의 할머니와 지금의 할머니를 단 하나의 존재로 겹치는 데 실패할 때면, ‘기억’이야말로 인간을 고정된 실체로 만드는 정체성의 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정신과 육체가 통과해 온 시간을 한 묶음으로 연결해주는 기억이 없다면 과연 나는 무엇인가?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를 두고 이야기하기엔 무척 송구스러운 생각이지만, 할머니를 보는 내 마음에는 불의의 사고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방황하는 여느 SF 영화의 주인공을 보며 드는 감상이 자연히 포개진다.
예를 들면 폴 버호벤 감독의 <로보캅>. 범죄 조직의 폭력으로 인해 육체의 대부분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진 주인공 ‘머피’는 사이보그 경찰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에게는 임수 완수를 위해 내장된 명령어 사이를 불쑥불쑥 비집고 나오는 자신의 가족에 관한 이미지가 남아 있지만, 이를 개인적인 의미로 해석할 기억이나 ‘삶’이라고 부를 만한 서사가 부재하다. 나는 누구인가. 그저 명령대로 움직이는 사이보그인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 온 인간인가. 관객은 매끈한 쇳덩어리 육신을 가진 그가 여전히 인간성을 간직한 주체임을 알고 있지만, 머피 자신은 그 사실을 확신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한다. 관객은 가지고 있는 그에 대한 기억이 그 자신에게는 없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가지고 있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정작 할머니에게는 없는 듯 보인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머피는 결국 기억의 일부를 되찾고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지만, 의학의 비약적으로 발전하거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할머니의 기억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할머니를 볼 때면 그 사실 자체로 안타깝고 서글퍼지는 반면, 어떤 죄스러움마저 느낀다. 언젠가 내게도 찾아올 늙음과 죽음에 대한 망연하고 두려운 감상이 찾아오는 걸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득 만화 <원피스>의 명대사 하나가 떠오른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닥터 히루루크’는 스스로 답한다. “사람들에서 잊혀졌을 때다!” 멋진 대사지만, 생각해 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결국 죽음의 주체는 나인데, 남이 나를 잊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보다는 내가 사람들을 잊었을 때, 혹은 내가 ‘나’를 잊었을 때야말로 죽음에 가까운 게 아닐까.
나의 할머니가 그런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비록 할머니가 우리 가족을 잊었고, 자신의 삶을 새겨 온 기록을 잃어버리셨다 해도, 감히 그 상태가 죽음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유리문 너머의 할머니는 분명히 살아 있고, 몇 마디 관념적인 문장이 그 사실을 부정할 순 없으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 기억보다 더 큰 의미를 불어넣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가족은 왜 매년 우리를 기억도 못 하시는 할머니를 찾아뵈러 가는 걸까. 매년 두 번씩 할머니를 뵈러 가는 날이 돌아올 때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러 나서는 기분이다. 할머니와의 만남이 그저 헛헛한 기분을 안겨주는 일로만 남지 않도록. ‘그게 가족의 도리니까’ 같은 간편한 답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이를 테면 사랑이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