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만 해 주세요. 제발.
언제부턴가 독립영화계에도 배우 출신 감독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배우가 자신의 영역을 연출까지 넓혀 겸업을 해 온 게 전부터 드문 일만은 아니었지만, <트랜짓>의 문혜인 감독, <내 방 안의 Another World>의 강소연 감독, <우리의 낮과 밤>의 김소형 감독, <문 앞에 두고 벨 X>의 이주영 감독 등 배우로서도 충분히 빛나는 사람들이 뛰어난 작품으로 감독으로서 두각을 드러내는 현상을 지켜보며 마음 한구석이 저려 왔다.
‘아니, 연기만 잘하면 됐지 연출까지 잘해서 뭐 어쩌자고?’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거나 여느 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이렇게 심술이 났다. 이거, 이러다 독립영화 감독들 밥그릇 다 빼앗기게 생긴 거 아닌가.
“저 사실 요즘 연기 배우고 있어요.”
“안 돼요, 감독님! 감독님이 연기까지 하시면 어떡해요...”
“요즘 배우 분들 진짜 너무하잖아요. 연기만 잘할 것이지 감독까지 잘하고. 저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어요. 연기해야 되겠어요.”
친한 배우님과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다 불쑥, 내가 연기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추석 연휴, 친척이 운영하는 떡집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친 뒤 집에서 쉬고 있던 내게 번뜩 이런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재능 많고 욕심도 많은 배우들이 연출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으니, 나는 반대로 연출에서 연기로 내 영역을 넓혀 가야겠다는 계산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배우라는 직업을 동경해 왔다. 촬영을 끝내고 나면 후반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한 작품에 내내 매달려 오랜 시간을 소모해야 하는 감독과 달리, 배우는 때에 따라 금세 모습을 바꿔 이 작품 저 작품을 오가며 각기 다른 세계로 뛰어들 수 있다는 게 너무나 부러웠다. 나 또한 지금처럼 겨우 2년에 한 편씩 작품 속에 머물기보다는, 그들처럼 더 많은 작품 속에서 살아 숨쉴 수 있기를 바랐다.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소개시켜 준다는 플랫폼 ‘숨고’를 통해 연기 선생님을 수소문했다. 신뢰할 수 있는 경력과 합리적인 수업료, 무엇보다 실제로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들의 평가가 내게 맞는 선생님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수빈 님은 연기를 왜 배우고 싶으세요?”
“예전부터 막연히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는데, ‘내 성격에 연기를 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시작할 용기가 안 났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연락드린 겁니다.”
연기 선생님과의 전화 상담 때 연기를 배우기로 결심한 이유를 말씀 드리며 나 스스로도 의아했다. 왜 진작 이걸 해볼 생각을 안 했을까? 나는 뭔가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잠깐만 고민하고서 곧잘 실행에 옮기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유독 연기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 탓에, 연기라는 작업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 온 것 같다.
커다란 거울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연습실에서 내 모습을 똑바로 마주보고, ‘나 같은 사람은 연기를 못 한다’는 심리적 장벽을 허물어 가는 훈련은 때로 매우 즐겁다가, 또 때로는 절망적일 만큼 답답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주로 1:1로 이뤄졌던 수업은 연기의 기술적인 요소를 배우는 데 앞서 ‘자연스러워지기 위해’ 필요한 마음 훈련에 집중되었다. 무작정 대사를 읊기보다는 인물의 의도를 먼저 이해하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내 대사에 스스로 감응하고, 외워 둔 다음 대사를 미리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 순간 내뱉은 대사와 행동에 모든 신경을 쏟는 것. 결국 이 모든 게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 살아 있는 방법을 배운 것이었다.
연기를 배우며 류승범처럼 개성 강한 배우들이 연기했던 장면을 따라해 보거나, 분노로 끓어오르는 감정에 연습실이 떠나가라 소리쳐 보고, 슬픈 상황에 자연스레 동화되어 눈물을 찔끔 흘리는 등, 막연히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을 해냈을 때 느낀 쾌감과 자신감은 엄청나게 값진 감정이었다. 수업의 여운을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이 경험이 연기할 때뿐만 아니라 삶을 헤쳐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약 다섯 달 간의 연기 수업을 마쳤다. 연기라는 게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것인지 고작 맛보기를 한 데 불과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을 조금이나마 넓혔다는 사실이 못내 뿌듯했다. 무언가를 ‘이제 좀 알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거라는데, 연기를 조금 배워 보고서 ‘아, 연기란 이런 거군!’ 하고 착각에 빠져 있는 나는 어쩌면 전보다 더 연기가 뭔지 모르는 무지렁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도 언젠가 무지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으로 직접 연출하고 출연하는 영화를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처럼 ‘연출까지 잘하는 배우들’에 대한 반발심으로 연기에 눈독들이는 감독들이 늘어난다면, 이번엔 배우들이 이렇게 한숨지을지도. ‘요즘 독립영화 감독들 정말 너무하네... 나도 확 그냥 연출해 버려?’ 아차, 그렇다면 내가 연기를 하겠답시고 까부는 게 결국 감독들이 연기하고, 그 때문에 또 배우들이 연출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생성하는 짓일까. 어쨌거나 나는 연기를 해야겠으니, 다른 감독님들은 부디 지금처럼 연출에만 정진하시길 바라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