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끝이 날까?
영화 <트루먼 쇼>의 한 장면.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로렌(나타샤 맥켈혼)’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트루먼(짐 캐리)’은 그녀에게 말을 걸지만, 로렌은 어쩐지 트루먼이 맘에 들면서도 대화를 피하려는 눈치다. 그런 로렌의 빨간 스웨터에 달린 배지에 새겨진 문구. 'How's it going to end(어떻게 끝이 날까)?' 이를 본 트루먼은 말한다. “멋진 배지네. 나도 그게 궁금했는데.”
‘결말’은 어떤 영화나 이야기에 대한 감상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라고 생각한다. 흥미진진한 전개로 러닝 타임 내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다가도, 결말에 이르러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영화가 수두룩하다. (이런 영화들은 ‘용두사미’라는 장르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도 좋을 듯하다.) 반면에 그럭저럭 볼만한 수준이던 영화가 결말 한 방에 인상을 뒤집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결과중심주의’란 비단 축구 경기나 회사 업무에만 적용되는 개념은 아닌 셈이다.
나도 언제나 멋진 결말을 가진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영화의 진한 여운에 젖은 관객들이 극장의 어둠을 영영 벗어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그런 결말.
얼마 전, 자주 찾는 극장인 에무시네마에서 <이터널 선샤인>을 상영한다기에 보러 갔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알고 있기에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딱히 <이터널 선샤인>을 꼽은 적은 없지만, 실은 나 또한 이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영화 자체가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과거에 스쳐 지나간 어떤 얼굴들을 떠올리거나, 나와 닮은 모습과 정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전에도 여러 차례 감상한 영화였지만, 마치 영화를 처음 본 것 같은 여운을 안고 극장을 빠져나왔다. 바닷가를 달려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고장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반복되는 마지막 장면이 어쩐지 희망 섞인 체념이랄까, 굉장히 복잡하고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서 극장을 나왔을 때, 종종 세상이 그 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경험을 한다.
나는 시나리오를 처음 구상할 때 먼저 이야기의 첫 장면을 떠올리고, 다음으로 결말이 어떻게 될지 정한다. 그래야만 잠시 건너뛰었던 중간의 남은 이야기를 하나씩 채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운전으로 치면 무작정 액셀을 밟기 전에 내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찍고 출발하는 것과 같다. 이야기의 끝을 먼저 알아야, 그 사이에 무슨 일들이 ‘생겨야 할지’ 알 수 있다.
이는 결말이 어떻게 날지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과는 달라서 언뜻 부자연스럽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나리오에 있어 무엇보다 구조적인 면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다. 건축가가 설계도도 없이, 어떤 모양의 집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벽돌부터 쌓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물론 이러한 작업 방식은 내가 선호하는 방향일 뿐 정답이 아니다. 전통적인 시나리오 ‘3장 구조’의 노예인 나와는 달리, 자기만의 작업 방식으로 뛰어난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은 얼마든지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와 같이 뛰어난 작가로도 알려진 감독들은 자칫 시나리오를 기능적이고 예상 가능한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는 3장 구조를 거부한다. 그보다는 자신의 시나리오 속 캐릭터를 충실히 따라가며, ‘스스로 드러나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의 결말에 이른다는 것이다.
애써 이야기의 뼈대를 미리 세워 두지 않아도 시나리오를 끝까지 쓰는 게 가능하다니. 이미 고전적인 방식을 고집하며 머리가 굳어버린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내는 경지지만, 글을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이야기를 발견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최근에 장편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하면서, 트리트먼트(시놉시스와 시나리오의 중간 단계)에서 미리 정해 두었던 전개와 결말이 보다 풍성하게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분명 이야기를 처음 구성할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 속에 잠재되어 있던 주제와 그로 인한 통찰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이미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게, 나도 몰랐던 캐릭터의 변화와 이 시나리오가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재발견하는 경험은 순수한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스스로 드러나는 이야기를 발견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내게 맞는 작업 방식이 이미 정해져버렸다고 생각한 게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작업 방식에 익숙해질 순 있겠지만, 그것은 그대로 고정된 게 아니라 얼마든지 진화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내게 딱 맞는 불변의 작업 방식이란 없다는 게 마치 결말을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쓰는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 과정에서, 결말을 미리 알고 있을 때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사건을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시나리오를 마무리하며 이야기 속 캐릭터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때면, 문득 내 삶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지곤 한다. 마치 폴 토마스 앤더슨이 그러듯, 결말을 모른 채 ‘나’라를 캐릭터를 졸졸 따라가며 이야기를 집필하는 기분이다. 앞서 말했듯 이런 작업 방식은 내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건 물론이고 무사히 완고를 낼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완고가 100페이지라면 고작 30페이지를 넘어선 셈이다. 글이 좀 부실하다 싶으면 엎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쓰고 싶은 생각도 든다.
다만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그 마지막 장면이 지금껏 잔잔했던 내 인생에 꽤 결정적인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결말이라면 좋겠다. 말하자면 ‘사두용미’. 결코 ‘용두’였던 적은 없으니 용두사미 꼴이 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괜한 미련보다는 시원섭섭한 여운을 선물하는 결말이기를. 암전. 타이틀이 뜬다. 음악이 흐른다.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이 글도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