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답노트, 너란 녀석!
수학 문제보다 더 어려운 마음의 장벽
수학 1단원 평가를 보고 온 아들
잔뜩 풀이 죽어 있는 것을 보니 점수가 맘에 안드나 보다.
"시험이 어려웠어?"
"너무 헷갈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난 역시 수학은 안되나봐."
엄습해오는 우울의 기운을 떨쳐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 있지. 5학년 수학은 더 어려운 가 보다."
그리고 받아본 시험지. 점수는 13/25
점수는 나름 충격적이었지만 시험지에 열심히 풀어낸 흔적이 가득했다.
"문제 푸느라 힘들었겠네. 우리 아들 열심히 했어!"
그런데 반응이 영 시원치않다.
뭐지? 뭔가 더 있는 것인가?
"엄마, 이제부터 틀린 문제는 오답노트를 써야 한대."
오답노트라니, 너무 오래전에 들어봐서 기억도 가물가물한, 고등학교때 모의고사 보고 틀린문제 정리한 그런 노트말인가?
그런데, 우리 아들은 틀린문제가 반인데 큰일이다.
"엄마, 13문제를 언제 다하지? 몰라서 틀렸는데 어떻게 푸는 건지도 모르는데. 선생님이 틀린문제 쓰고 오답, 약점, 정답 이렇게 3개를 적으래. 나 어떻게 해?"
아, 그냥 틀린것을 고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이번 숙제 난이도는 최상급.
이런 어려운 숙제를 만나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무너져내리는 아들의 멘탈을 받쳐줘야 한다.
처음에는 '하기 싫어서 그런거겠지, 엄살피우네, 왜저렇게 공부를 못하지?'
아들을 비난하고 탓하며 화를 내고 몰아세웠다.
그런데 그럴수록 아들의 상태는 더 심해지고, 뒤죽박죽 혼란덩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녁을 든든히 먹고 기분좋게 시작한 오답노트.
1단계 - 시험지를 보고 노트에 문제를 보고 쓴다.
이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기계적인 단계.
그런데 아들이 틀린 문제를 보더니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 머리를 쥐어짜고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외친다.
"아~ 하나도 모르겠어. 뭐라는거야. 이걸 어떻게 풀라고."
시험지에 틀린 문제를 눈으로 본것 뿐인데 이게 그리 힘든건가?
"일단 문제만 적어보자. 푸는 방법은 엄마가 알려줄께."
"문제 적기도 힘들어. 난 뭐가 틀렸는지도 모르겠단 말이야. 이걸 왜 해야해?오답노트 때문에 오늘도 망했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잖아!"
"그럼 오늘은 그만 하자."
"안돼 오늘 해야 한다고, 엄마 도와줘."
또 시작되었다.
카오스
새로운 일을 시작할때, 낯선 환경에 마주할때, 어려운 과제를 받았을 때, 아들은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 같다고 한다. 무엇을 먼저 해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단다. 이 상황이 너무 두렵고 낯설고 도망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미칠 것 같다고 한다.
누구나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비슷할 것이다. 새로운 일이 걱정되고 떨리고 당황스러운 감정.
우리 아들은 그 감정을 좀 더 크게 느끼는 것일 뿐.
이럴땐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것을 하려면 어떤 것 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어떤 도움을 받으면 되는지.
1차 정리가 끝나면 그제서야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법.
이 단계가 보통은 머릿속에서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우리 아들은 혼자서 정리가 어려울 뿐.
오답노트를 하기 싫지만, 숙제니까 해야 할 것 같고
틀린문제를 고쳐야 하지만, 방법을 모르니 답답하고
풀어야할 문제가 많아서 시간이 많이 걸리니 빨리 시작해야 하지만, 양이 너무 많아서 부담스럽고
이 모든 생각과 감정이 뒤엉켜 울고 소리지르고 뒹구는 아이를 보고 있자면 너무나 안타깝고 속상하다.
갈림길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고민만 하는 사람을 멀리서만 봐야 하는 기분이다.
울고 있는 아들을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오답노트가 어려워?"
"응. 하나도 모르겠어."
"학교에 숙제를 해가고 싶어?"
"응, 숙제는 꼭 해야 하는 거잖아."
"틀린 문제가 많고, 어려워서 한꺼번에 하려면 너무 힘들것 같은데. 우리 오늘 저녁에는 한 문제만 일단 해볼까?"
"그럼 다른 건 어떻게 해?"
"한 문제만 오답노트 써보고 너무 어렵고 힘들면 선생님께 말씀드려보자. 한 문제 해봤는데 정말 어렵다고. 그러면 도와주시지 않을까?"
"정말 그럴까? 혼날 것 같은데"
"아에 안해본 것보단 덜 혼나겠지. 그리고 네가 수학이 어려운 건 사실이니"
그렇게 달래고 안심시켜 겨우 오답노트 1번을 채웠다.
생각보다는 시간이 많이 안걸리고 간단했다.
"이렇게 하는 거야? 뭐 해볼만 하네."
갑자기 순한 양이 된 아들.
해보기 전에 몰려왔던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지고 안도감과 자신감이 찾아오려고 한다.
이때 조심해야 한다.
'우리 이참에 다 해버리자'라는 말이 턱끝까지 차오르는걸 누르면서 물어봤다.
"한 문제 성공! 오늘 약속한 오답노트 쓰기 하나 성공했다. 두번째 문제는 언제 할까?"
조급함과 답답함을 내려놓고 아들이 작은 성공을 축하하면서 자발적 의사를 키워 주기 위해 선택의 기회를 제공했다.
"오늘은 그만할래. 시간이 너무 늦었어. 대신 내일 아침에 일찍 깨워줘. 일어나서 한 번 해볼께."
이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8시에 깨워도 눈도 못뜨는 사람이 오답노트 숙제 하겠다고 일찍 일어난다니.
믿기 힘든 아들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또 한고비 넘어가는구나.
숙제를 다 못해갈까봐 걱정되는 나의 조급함 대신에 아이의 심리적 부담을 낮춰주고 한걸을 내딛을 수 있게 도와줬더니 스스로 숙제를 하겠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수학이, 오답노트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스리는 것이 어려웠던 것 같다.
아들 덕분에 오늘도 나의 내공이 조금은 레벨업 된 기분!
아들에게 화내고 다그치지 않은 내 자신이 대견하다.
P.S. 다음 날 아침 아들은 일찍 못일어났다. 대신 아침밥 먹고 기분좋게 오답노트를 시작했다. 두번째 문제를 풀고 나서, 세번째 문제를 언제 풀까 물어보니 "지금 당장!"이라고 말하며 나머지 10문제 오답노트를 후루룩 해냈다.
"나 생각보다 수학에 재능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라는 귀여운 말을 남기고 아들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