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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마중 Sep 14. 2024

‘이런 오픈런’이라면 방학숙제로 강추

놀이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 방학이야기

여름방학이다. 숙제가 많다. 생활 계획표 짜기, 방학 생활 그림 그리기, 만들기, 책 읽기, 매일 일기 쓰기, EBS 보고 탐구생활 완성하기. ‘마음먹으면 일주일 정도 다 할 수 있겠지’ EBS 탐구생활을 펼쳐 놓고 하루, 이틀은 정해진 시간에 방송 보고 문제 풀이를 했다. 첫날 일기도 10줄 넘게 썼다. 방학 숙제 시작이 좋았고 뿌듯한 마음에 놀았다. 쭈욱.     


아침부터 무척 덥다. 사촌들과 우르르 냇가에 갔다. 영수는 대나무 그물을 물줄기가 좁은 곳을 찾아 양팔을 벌려 단단히 잡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바지를 접어 올린 나와 사촌 동생은 풀숲 깊숙이 발을 집어넣고 처벅처벅 고기를 쫓는다. 우리는 호들갑스럽지 않게 모두들 기대 찬 표정과 몸짓으로 맡은 역할을 신중히 했다. 영수가 그물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물망 사이로 물이 떨어지고 초록색 풀 사이로 조그만 송사리가 파닥이며 빛에 반짝거렸다. 모래를 파서 만든 물웅덩이에 고기를 가둬두고 동생은 물고기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보초를 섰다. 놀이에는 쉬는 시간이 없다. 그물을 다시 뒤집어 찌꺼기를 빼내고 물고기 잡기를 하며 모래와 자갈 쌓기를 했다. 눈에 보이는 사물과 장소는 언제나 우리의 놀이터. 행동 대장 사촌 동생을 따라 개울과 논 사이에 연결해 놓은 콘크리트관을 따라 들어가 뜨거웠던 등과 정수리도 식히고 허리 굽혀 왕복 달리기를 하고 동글 탐험대처럼 소리도 질렀다.     


엄마가 타 논 미숫가루에 얼음을 넣고 한 대접 마시면 배가 차는 느낌 현우 할머니네 밤나무 아래 약속이라도 한 듯 모였다. 바닥에 커다란 동그라미 그려놓고 땅따먹기를 하고 있을 때 사촌 동생이 밤나무에서 뛰어내릴 수 있냐고 거들먹거렸다. “그것도 못하냐”하며 나는 제일 먼저 올라갔다. 나무 타기는 나무껍질과 두께 등 특징을 알고 손과 발 스텝이 중요하다. 그리고 무게중심. 아빠 무등 탔을 때의 높이니 식은 죽 먹기다. 두 발로만 착지까지 완벽했다. 작은언니 차례다. 올라가는 자세가 자연스럽지 않다. 발을 헛디뎌 그대로 떨어졌다. 두 팔과 동시에 엉덩이,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닿았다. 밭에서 일하는 엄마는 헐레벌떡 뛰어와 읍내 병원에 데리고 갔다. 단둘이.      


뼈에 금이 가서 깁스를 한 작은 언니 표정이 밝다. 딱딱한 ‘ㄴ자’ 한쪽 팔을 목에 걸고 다니는 모습이 로봇 같았다. 엄마는 그날로 세수며 밥 먹는 것을 도와주었다. 엄마와 한 몸이 된 작은 언니가 부러웠다.     

참외 밭에서 입으로 껍질을 벗기며 한입 베어 물고 있는 아빠에게 나도 달라고 했다. 아빠는 샛노랗고 예쁜 참외를 정성스럽게 찾아 “참외 배꼽이 이렇게 볼록 나온 게 맛있어” 나도 아빠처럼 이로 껍질을 벗기고 먹었다. 여름을 담고 있는 참외는 솜사탕보다 더 달고 맛있다. 양동이 가득 참외와 토마토를 수돗물을 틀어놓은 빨간 대야에 던져 넣고 동생과 영수네로 뛰어갔다.       


영수와 사촌 동생은 오토바이를 자연스럽게 배워 작은 집 일손을 도왔다. 새참을 가져다주거나 필요한 농기구를 빌리러 다닐 때는 그보다 빠른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영수가 운전하는 오토바이에 사촌 동생, 내 동생까지 태웠다. 정원 초과였다. 영수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출발했고 나는 사촌 언니 빨간 자전거를 빌려 타고 오토바이를 쫓아갔다. 돌아오는 길, 번뜩하는 호기심에 자전거를 오토바이에 묶자고 했다. 영수는 자전거 보조 의자에 묶여 있는 끈을 풀어 오토바이 뒷자리 손잡이에 단단히 묶었다. 오토바이 속도를 천천히 내면서 거리를 체크했다. 수신호를 보내며 영수는 속도를 냈다. 페달을 밟지 않고 끌려가듯 자전거 타기는 스릴과 시원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한 번씩 오토바이 백미러로 뒤를 살피는 영수는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길 급격한 커브길을 그대로 통과했다. 빨간 자전거도 그대로 통과하는 순간, 나는 조심스럽게 브레이크를 미세하게 잡았다. 지구와 달이 충돌하지 않으려는 중력에 법칙처럼 자전거 그대로 뻗어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슬라이딩을 했다. 나도 함께.     

오토바이는 멈췄고 셋은 동시에 뒤를 쳐다보았다. 시멘트 바닥에서 일어나는 나는 자전거 바퀴만 신나게 돌아가는 것이 야속했다. 어떻게 집에 갔는지 모르겠다. 절뚝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빨갛게 까진 무릎과 정강이에 빨간약을 발라주었다. 다행히 깁스는 하지 않았다.     


저녁 먹은 지 한참이 지났다. 할머니를 따라 우리 자매는 마당에 나왔다. 덤불쑥을 잔뜩 모아 모기향과 함께 불을 피우면 쑥 향이 마당과 집 안 가득 퍼졌다. 연기를 따라 하늘로 올라 달토끼도 만날 것 같았고 깊은 여름 밤하늘을 덮어 주었다. 엄마가 방금 쪄 내온 옥수수를 평상에 내려놓으면 서로 먹기 좋은 빛깔과 모양의 옥수수를 골라 먹는다. 간혹 잘못 찾아온 모기는 부채에 찌그러지기도 했다.      


찌그러지는 것은 모기만이 아니었다. 개학이 코앞이다. 숙제를 해야겠다는 다짐은 내일로, 내일로 미루게 되어 결국 개학 전날이다. 다급해진 나는 울며불며 숙제를 했다. 일기와 그림 그리기, 탐구생활.     

겨울 방학이다. 어김없이 EBS 탐구생활을 펼쳐놓고 제일 먼저 방학 시간표를 아주 근사하게 만들었다. 책 보기도 무려 한 시간이나 있고 공부 시간도 넣었다. 이번엔 생활계획표가 있고 하루에 하나씩은 꼭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오빠와 사촌 동생들은 야구방망이와 테니스공을 들고 작은 집 논으로 모였다. ‘업어라 젖혀라’ 편을 가르고 오빠와 한 팀이 되었다. 든든했다. 오빠는 투수를 했다. 나와 사촌 언니, 동생은 1루, 2루, 3루를 맡았다. 

상대팀 영수가 쳤다. 오빠가 잡았다. “원아웃”

작은 언니가 쳤다. 파울이다. 또 파울이다. 그리고 쳤다. 오빠가 또 잡았다. “투아웃”

막내 사촌 동생이 쳤다. 1루까지 뛰었다. 상대팀의 에이스 사촌 동생이다. 역시 안타다. 울퉁불퉁한 논두렁 바닥을 휘청휘청 뛰어 노란 테니스 콩을 간신히 잡고 오빠에게 던져 주었다.  우리 팀 에이스 오빠는 상대팀을 쓰리아웃 시켰다.    

  

오빠는 모든 놀이를 잘한다. 야구, 구슬치기, 자치기, 산에서 나무 타기, 땅 파서 합정 파기. 나는 오빠를 따라다니며 매일을 반복하고 몸으로 익혔다. 사촌 동생들과 내가 허둥대면 자상하게 알려주기도 했다. 야구 규칙, 구슬의 각도, 어느 위치에서 구슬을 서로 부딪혀 홈에 들어가는지, 자치기의 비법 모두 오빠에게 배운 놀이 기술이다. 놀이 자격증 따기가 숙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밤 할머니가 은밀히 입 안에 넣어주던 엿이 생각났다. 작은 언니와 나는 광안으로 들어가 비좁은 문틈 사이에서 들어오는 빛만으로 엿을 찾는다. 깊숙이 두지 않았을 거라는 직감으로 문 앞을 뒤적이다 달력종이로 덮어 놓은 소쿠리가 하나 느껴진다. 종이를 들춰보니 엿이 얼마 없다. 입에 쏙 들어갈 만한 작은 엿을 입에 넣고 가려는데 미련이 남아 다시 종이를 들춘다. 엿 덩어리에 묻어있는 콩가루를 살살 털어내고 칼 등으로 한쪽을 툭 친다. 다양한 조각이 만들어져서 그중에서 제일 큰 엿을 하나씩 잡아 입에 넣는다. 입가에 묻은 콩가루를 흔적도 없이 털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 볕 좋은 담벼락에 앉아 오래도록 녹여 먹는다. 처마 밑에 고드름이 마녀 손톱처럼 기다랗고 밤새 수북이 쌓은 눈을 보며 새로운 놀이의 장이 열릴 것 같다.      


때마침 사촌들이 비료 포대를 가져왔다. 나는 사촌 언니에게 물려받은 미끄럼방지 부츠를 꺼내 신고 지푸라기를 비료 포대에 알맞게 넣는다. 집 뒤 도연이네 목장길 따라 커다란 양옥집 담벼락을 지나간다. 도연이는 우리 반에서 가장 부유한 친구였다. 피부는 하얗고 분홍포스터물감을 들고 다니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밖에서 같이 놀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인기척 없는 도연이 집을 힐끔 쳐다보고 나는 사촌들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장 끝자락은 우리 동네에서 최고 높은 언덕이어서 여러 마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해를 등지고 우리는 비료 포대를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각자 자리를 잡는다. 썰매를 잘 타려면 푸대살짝 뒤쪽으로 무게중심을 두고 손과 발은 빠른 노를 젓듯 움직여 속력을 낸다. 속도가 나기 시작하면 발을 재빨리 썰매 안쪽으로 접어 포개 앉는다. 순간 몸을 뒤로 젖히고 “야호”.     


어떤 길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두가 출발하는 길이 눈길이 되고 우리들만의 눈썰매장을 만들어 간다. 이것이 오픈런의 묘미. 눈길이 만들어지면 또 그 위에서 타는 것도 스릴 있다. 울툴불퉁 길을 마주하게 되면 엉덩방아도 찧지만 지푸라기 덕분에 쿠션감도 좋다. 서로 깔깔깔 웃고 그만 타고 싶으면 그대로 몸을 뉘어 옆으로 넘어진다. 눈에 뒹구르며 눈도 먹고 눈을 감고 눈밭에 벌러덩 누워 파란 하늘과 내 심장소리에 집중한다. 한숨 고를 때 코 끝에 앉아있는 찬바람이 등꼴까지 시리게 한다. 서둘러 일어나 내려온 만큼 다시 오른다. 이마, 등에 따끔할 정도의 땀이 날 때쯤 정상에 도착한다. 혼자 타기도 하고 둘이 타기도 하며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명태에서 동태가 되어가는 것처럼 내 몸이 얼었다 녹았다’, 한다.       


젖은 옷과 부츠는 부뚜막과 솥뚜껑 위에 얹어놓고 엄마가 쪄 놓은 고구마와 시원한 동치미를 들고 안방 아랫목 이불 속에 들어간다. 토끼 발자국이 산으로 있다는 오빠 말에 대충 마른 옷을 다시 입고 우리는 토끼사냥을 간다. 사냥터에 가려면 활을 만들어야 한다. 마른 대나무를 반으로 갈라 연두색 연줄을 탱탱하게 묶고 대나무를 휘게 만들어 활을 완성한다. 화살은 제법 크게 자랐던 마른 개망초 줄기로 사용했다. 몇 번 화살을 날려보고 곧장 산으로 출격이다. 토끼 발자국도 맞고 여기저기 토끼 똥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토끼가 이곳을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숲 사정도 훤히 알고 있었다. 약간에 긴장감과 재미를 느끼며 낮은 자세를 취하며 걷는다. 뽀드득뽀드득. 

     

토끼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산에 들어왔으니 산에서의 놀이를 시작한다. 동생들은 죽은 나무를 낑낑거리며 끌고 들고 나르는 사이 오빠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주워 온 죽은 나무들을 세우고 묶어 아지트를 만들었다. 솔잎을 주워 바닥에 깔면 포근한 아지트가 완성이다. 여럿이 앉아 낄낄거리다 뻥 뚫린 나무 사이를 올려다보면 어둠이 내려앉아 샛별이 반짝인다. 
 

방학의 끝자락이다. 또다시 울며 불며 숙제를 하지 않겠다고 일기도 하루 이틀 써가며 다시 내일로 내일로 미뤄지는 일이 생겼다.       


작은 집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막내 작은 집이 있다. 외아들인 사촌 동생은 모든 형제들 중에서도 막내였고 외동이다 보니 집에 없는 게 없다. 그리고 최신식 슈퍼마리오 게임기.     

그 겨울 우리를 찾아왔다. 사촌 동생의 현란한 손동작과 게임 방법을 대략 파악하고 나름 순서를 정해서 돌아가며 게임을 했다. 화면 속 슈퍼마리오가 점프를 하고 벽돌을 깨면 마리오가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스릴을 만끽하며 깃발에 도착하면 단계마다 통과할 수 있다. 9단계가 마지막 단계인데 불을 피해 피오나 공주를 구해 낼 수 있다. 마지막 코스. 조금만 더 하면 쿠바를 무찌를 수 있는데 방법을 터득하고 찾아내는데 몇 날 며칠 막내 작은 집으로 출근을 했다. 숙제도 잊은 채. 

    

아파트 한 동이면 두 마을이 함께하는 인구이다. 인사만 하는 정도의 요즘과는 다르게 한 동네, 이웃 동네까지 친구도 사촌도 많이 살았다. 함께 온 마을을 구석구석 누비며 속속들이 알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마다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놀이와 자연 속에서 뛰놀기 바빴다. 저녁 늦은 시간에서야 집에 들어가 대충 씻고 밥 먹는 정도였으니 숙제는 불안한 요소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사촌 형제들과 함께한 놀이 하나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더 흥미로운 건 그날들의 날씨와 풍경, 온도까지 고스란히 옆에 있는 것 같다. 점점 나이가 차면서 마음이 따뜻하고 포근해지는 건 나에게 이런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아이들, 요즘 아이들도 나만큼 어른이 되었을 때 기억나는 풍경과 놀이가 가득해서 입가에 미소가 번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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