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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마중 Sep 28. 2024

반성문 쓰면 달라집니다

 “엄마 나도 걸스카우트 단원 해보고 싶어 친구들도 다하데” 울먹였다. 5학년때도 말했지만 엄마는 단복 사줄 돈이 없다며 어렵다고 했다. 친구들은 갈색 단복에 흰 타이즈를 신었다. 야영도 하고 선서하는 모습이 근사했다. ‘동갑내기 사촌도 하고 다 하는데 나만 못하다니’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친구들을 볼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컸고 나도 단복과 흰 타이즈를 신은 내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베개에 눈물자극이 차갑다. 


몇 날며칠 풀이 죽은 나의 사정을 들은 마니토였던 친구는 나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우리 누나가 졸업해 단복 물려줄 수 있을 것 같아" 친구의 말에 곧장 엄마에게 뛰어가 “나 친구 누나가 단복 물려준데 해도 되지!” 


갈색 단복과 모자, 두 개의 배지. 

사촌 언니가 신던 흰 타이즈는 구멍이 났지만 그래도 바느질을 해서 신을만했다. 

       

걸스카우트를 하면서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흰 타이즈를 신고 선서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 갈색 단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원들 속에 나도 있어서였을까? 

   

그날은 보이·걸스카우트 야영이 끝나고 친구들과 차부가 있는 주유소까지 걸어갔다. 진희네 양조장을 지나면 노란색 큰 창고 옆에 살짝 오르막 길 대추나무집이 있다. 평소 그 아래 보건소길로 지나가는데 그날은 대추나무에 대추가 눈에 띄었다.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추에 이끌려 차례대로 대추를 따서 한입 베어 물거나 손에 들었다. 순간 “누가 남의 대추를 함부로 따? 너네들 나 따라와!” 날벼락같은 주인집 아저씨의 호통소리 었다!

손에 든 대추를 들키면 더 혼이 날 것 같았다. 마음이 콩알보다 작아졌고 심장 뛰는 소리는 귓가에서 맴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는 두려웠고 꼭 쥐고 있던 대추 두 알을 몰래 땅바닥에 던졌다. 내 양심과 함께.


셋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저씨 집은 대낮인데도 볕이 들지 않아 어둑해서 더 무서웠다. 여럿이 서 있기 비좁은 현관에 한 줄 서기를 하고 숨죽이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빨간색 유선 전화기를 꺼내 수화기를 든 아저씨는 “너네들 아빠 이름 말햇”, “집 전화번호는 뭣여” 다그쳤다. 내 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얼어버린 것 같았다. 누가 땡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심정이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들은 아저씨는 “너네들 반성문 써가지고 와”하며 우리를 풀어주셨다. 


친구들과 떠들며 갔던 주유소길이 그날따라 더 멀게 느껴졌다. 누가 신발에 모래주머니를 달아 놓았는지 발걸음도 무거웠다. 걸어가는 동안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주유소의 화장실 칸은 여러 개였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대로 들어갔다. 나는 가방을 앞으로 메고 공책을 찾아 빈 종이 한 장을 찢었다. 종이 찢는 소리가 화장실을 가득 채웠다. 벽에 종이를 대고 ‘반성문’이라고 쓰기 시작했다. 화장실 안으로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야속했다.      


주말 아침 텔레비전 소리에 섞여 신랑 목소리와 작은 아들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몸은 침대에 누워있지만 귀는 온통 거실 소리에 집중한다. 아빠 휴대폰 패턴을 알고 있는 작은 아들이 몰래 패턴을 열어 게임시간을 늘려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 작은 아들에게 아빠는 기회를 주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미 상황은 마무리 단계인 것 같았지만 나는 벌떡 일어나 두 사람 대화에 끼어들었다. 거짓말한 행동에 대한 대책회의가 필요했다. 신랑은 아무 말 없이 소파에 등을 대고 앉았고 작은 아들은 잠옷 바람으로 다시 눈물을 훔쳤다. 그 소리에 평소 늦잠만 자는 큰아들도 나왔다. 대책회의에 대한 결과는 내가 내렸다. 반성문.      


방문이 달각하고 열렸다. 작은 아이는 반성문을 들고 나왔다. 

대추서리에 대한 나의 반성은 잘 된 것 같았다. 아직까지 대추를 좋아하는 걸 보면 말이다. 작은 아이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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