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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mmy Park Jun 08. 2024

낯선 문제를 푸는 힘

Jailbreak

“The true test of intelligence is not how much we know, but how well we use what we know.” (John Holt)


세 번 연속으로 같은 막다른 길을 만나자 웃음기가 빠졌다.


2005년 겨울이었다.
LG전자는 초창기 내비게이션을 현대차에 납품한 이후 협업 과제를 다양화 하고자 논의를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현대차 남양연구소에서 'LG기술전시회'를 기획하게 되었고
하루는 현장 확인을 위해 오후 늦게 남양연구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한 겨울이라 금방 어둑어둑해졌고 길은 생각보다 외졌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따라갔는데 문제가 생겼다. 길이 막혀 있었다.
당시에는 '공사 중' 같은 실시간 정보는 반영되지 못했던 탓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돌고 돌아 내비게이션이  같은 길로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길로 돌아갔는데 몇 번을 돌더니 그 길이 다시 나왔다.
순간 식은 땀이 흘렀다.

세 번 연속으로 같은 막다른 길을 만나자 웃음기가 빠졌다.

지리를 전혀 모르는데... 지도도 없는데... 주위는 깜깜하고…

당시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머리가 멍해졌다.
결국 현대차 담당자에게 전화로 물어 어렵게 찾아가긴 했지만 덕분에 깨닫게 되었다.
기술이 발전하여 생활이 편리해지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게 망가졌을 때 플랜B를 미리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미국에서 처음 운전을 배웠던 때가 떠올랐다.
직접 운전을 한다고 생각하니 설레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다.
그래도 운전은 어찌어찌하겠는데 그 복잡한 길들을 어떻게 찾아다닐지가 오히려 걱정되었다.
그런데 막상 운전을 시작하자 머리 속에 나만의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운전을 반복하니 그 주변이 이미지처럼 머릿속에 그려지게 되었고
나중엔 처음 가는 곳도 상대적인 방향만 가지고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내비게이션이라는 기술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지만 감으로 찾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물리적으로 어딘가를 찾아가야 하는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을 몸으로 익힌 것이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모든 게 안개처럼 사라졌다.
내 머릿속 지도도 사라졌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백번을 오가도 머릿속에 남는 게 없다.
이제는 내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이 없으면 지난 주말에 갔던 곳도 다시 찾아가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새로운 기술로 쉽게 문제를 푸는데 익숙해지니
그 기술 없이 스스로 풀어내는 능력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왠지 씁쓸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집 플라톤' 시간을 갖곤 했다.

아빠가 질문 하나를 던지면 두 아들이 자기 생각을 정리하여 이야기하고 의견을 나눴다.


가령,

지금까지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뭘 어떻게 바꿔보고 싶은가?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선물이란 무엇일까? 어떤 선물이 좋은 선물일까? 등등


정답이 없는 열린 문제일수록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외워서 맞추면 끝나는 게 아니라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름의 논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늘 이야기했다.

수학 공식을 외워서 문제를 푸는 것도 중요하고, 객관식 문제의 보기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풀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직접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일타강사들은 말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미래에 대한 선택권을 가질 확률이 높아진다고.
좋은 대학을 졸업하면 사회에서 나를 증명하는데 드는 수고가 덜어진다고.
좋은 대학 졸업장 만으로도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증거가 된다고.
모두 맞는 말이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주입식으로 공식을 암기하여 연습문제를 풀도록 훈련받은 사람은 생활 속 문제를 잘 풀어낼 수 없다.
삶의 중요한 문제들은 기출문제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길에 정형화된 공식은 없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가서 인정받고 미래를 자기가 선택한다고 해서  
삶의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일류대학을 나왔든 아니든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가 맞닥뜨려 스스로 풀어내야 한다.
일류 대학의 졸업장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생각의 깊이와 폭이 중요하다.
자신만의 생각이 정립되지 않은 사람은 휩쓸리기 쉽다.
타인의 기대를 자신의 꿈이라 혼동하기도 하고
경쟁에서 이기는 걸 인생의 승리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다 인생의 중간 어디메쯤에서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애매모호한 배신감의 화살은 누구를 향하게 될까?
오롯이 자신의 책임이다.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비게이션으로 모르는 길을 찾아다니고

ChatGPT를 써서 외국 논문을 척척 번역해서 읽으며
스마트폰 하나로 온 세계의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는 세상.

최신 기술을 활용하여 문제를 푸는 역량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함정은
그런 기술이 가능하지 않은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우리의 두뇌가 순간 멈춰버린다는 것.

당연하던 게 당연하지 않은 순간이 오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

수학공식을 외우고 주어진 문제풀이를 수 없이 반복하여

남들에게 인정받고 일류 대학을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정은
한 번도 배우지 않고 미리 외우지 않은 문제를 마주했을 때

어디서 풀이를 시작해야 하는지 생각이 안 난다는 것.

늘 풀던 유형의 문제가 아닐 때 처음에 시작조차 하기 어렵단는 것.


최신 기술에 대해 적응하고 잘 활용하는 능력이,

학교 시험을 잘 치르는 기교가

생각의 깊이와 폭을 자라지 못하게 방해해선 안된다.
사고의 축적을 가로막아선 안된다.


인생을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지적 능력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모르는 것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로 결정된다고 했다.


낯선 문제를 풀어내는 사고의 힘이 필요하다.

사고하는 힘이 인생의 힘이다.


PS.
며칠 전 스포츠 뉴스를 보다가
프로야구에서 스트라이크 자동투구판정시스템이 고장 났다는 소식을 봤다.
판정시비를 없애기 위해 KBO가 최초로 도입했다고 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그 시스템이 먹통이 된 것이다.
심판들이 모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한참의 회의 끝에 남은 경기는 심판들이 직접 눈으로 스트라이크와 볼 판정을 하기로 했다.

그때 심판들의 표정은 결연했다.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까지 적어도 20년은 직접 눈으로 판정을 해왔을 분들인데

그 표정에서 읽히는 미묘한 불안감은 나만의 기분이었겠지.

자동투구판정시스템이 적용된 건 불과 두 달 남짓 전이다.


(Baseball Umpire, Powered by DALL.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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