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의 말들

내 마음이 네 마음과 같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by 엄민정 새벽소리
여우가 '길들인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아닌 것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을 그것의 삶 속에,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있게 하는 일이다.

<황현산,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책 속을 걷다가 발에 툭 걸리는 문장을 찾습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시작합니다.


나는 책의 생각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고, 예측이 불가능한 결승점을 향해 발을 내디딥니다. 길가에서 만나는 아이스크림 장수나 솜사탕 장수에 눈이 팔리면, 나는 고개를 돌려 방향을 곧게 조정할 수는 있지만, 생각이 이르게 될 결승점을 미리 알고 가서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결승점에 뜻밖의 누군가의 문장이 이미 도착해서 마중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와중에 스친 적이 있는 낯선 이들이 떠오릅니다. 누군가는 완전한 초면이었고, 다른 누군가는 살짝 낯이 익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수다 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내 귀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어느새 내 손끝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면서 동시에 내 것이 아닌 것이기도 합니다. 경계는 모호할수록 자연스러웠습니다. 그건 아마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히 녹아들어 한 몸으로 존재하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일 테지요. 문장과 사유는 바람과 바람 소리처럼 분리할 수 없는 하나가 됩니다.


'길들인다'라는 말을 그동안 좀 오해했습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던 시선에 의심 없이 동참한 까닭입니다. 오해와 달리,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일은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과정일 뿐입니다. 갓 들여놓은 스테인리스 팬이 계란후라이 하나도 쉽게 내어주질 않는 데 비해, 주방장과 연식을 같이 한 낡은 팬은 만들어 내는 족족 작품이 됩니다. '내 마음과 네 마음이 같다.' 서로에게 길든다는 것은 이런 것이지요.


나는 지금 무엇을 길들이고, 무엇에 길들여지고 있을까요. 속도는 미미합니다만, 나는 점점 길들여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왜 잠을 줄여?라는 질문이 왜 안 써?로 변화한 데에는 글이 나를 당기는 힘에 진작부터 길들여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