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입양과 파양을 경험하며
주말 나들이 길, 목적지는 바깥이었지만 우리는 더운 날씨에 조용히 쇼핑몰 안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마치 원래 오려던 것처럼 느긋하게 시선을 두며 그곳의 살거리를 구경하고 먹을거리를 탐하고 있었지요. 그러다 문득 호랑이 무늬 털을 입고 있는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마음에 들어왔다는 표현이 더 잘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펫샵에서 고양이 전시회를 하고 있었죠.
귀여운 것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 많은 행인의 발걸음을 붙잡고, 심지어 동동거리게 만드는 걸 보면요.
딸아이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꼭 감았어요. 너무 귀엽고 좋은 것을 보면 그 감정을 먼저 마음에 담느라 눈을 감을 때가 있지요. '잠깐, 나 지금 너무 좋아서 정리 좀 하고 눈 뜰게.' 하는 느낌.
고양이는 참 작고 예뻤습니다. 짧고 부드러운 털을 만지고, 영롱한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만으로 '내가 오로지 널 위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까지 들었으니까요. 누군가는 사랑의 정의를 ‘나를 지우는 일’이라 했지요. 그 말에 이끌려, 멀리서 바라보던 우리의 소극적 사랑은 나를 잊을 만큼 적극적인 사랑으로 기울었습니다. 손바닥이 뜨끈뜨끈한 건 고양이의 체온이었다기 보단 어쩌지 못하는 내 감정의 온도였을 겁니다. 다소 즉흥적인 만남이었지만, 충동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함께 화목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으니까요. 나는 보통 이런 계산 없이는 어떤 실행도 쉽게 옮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계산이 맞아떨어지는 한,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데려가자."
딸아이는 커피색 고양이에게 커피콩을 엮어 만든 팔찌를 걸어주며 '모카'라 이름 붙였습니다. '집사'라는 타이틀에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까지 흘렀지요.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운동도 산책도 포기한 채, 온 가족은 그 작은 생명체의 움직임에 따라 고개를 따라다녔습니다. 오도독 사료를 씹고, 여린 목청에서 새어 나오는 야옹 소리, 틈만 나면 무릎에 올라와 벌러덩 누워 자는 통에 잠이 깰까 조심조심 움직였음은 물론이에요.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은 내 마음이 잔잔하게 떨리는 일이어서 이유 없이 조마조마하지만, 그 기분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무엇이 됩니다. 그건 사랑이었고, 우리 집안의 사랑의 총량은 확실히 불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이의 몸에 동그란 도장 같은 발진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전신에 산발적으로 퍼진 십여 개의 붉은 흔적이 점점 늘어나자 우리는 급히 피부과를 찾았습니다.
"집에 고양이 키우시나요? 진균에 감염되었네요. 아이와 고양이를 격리해서 치료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 둘은 서로를 위해 떨어져 있어야 하는 어려운 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한번 속한 것을 억지로 떨어뜨리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집안을 소독하고 아이에게 연고를 발라주는 동안, 모카는 펫샵으로 돌아가 격리치료를 받았습니다. 약샴푸로 씻고, 약을 먹는 등 어린 모카에게 행해지는 일들이 가혹하게 느껴져 마음이 저렸지만, 진균의 확산을 막을 방법은 그뿐이었습니다.
모카의 치료가 끝났습니다. 아이의 몸에는 아직 군데군데 도장무늬가 남아있어 계속 약을 발라줘야 합니다. 모카를 다시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펫샵 주인장의 메시지를 받고, 한동안 가만히 정지해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나는 스치듯 보았습니다. 아이는 지금, 사랑하는 일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나를 지우는 일이라고 하지만, 내가 지워지면 사랑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진균은 곰팡이 포자 하나에도 다시 살아나 감염을 반복적으로 일으킵니다. 모카를 키우는 일은 어느새 진균을 감당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살리는 일이어서....
<살리는 일, 박소영>
사랑하는 일이 살리는 일이라면, 살리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되기 어렵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모카를 다시 데려올 수 없습니다. 또한 모카를 사랑하는 만큼, 모카도 진균 감염을 일으키지 않는 주인을 만나게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의견이 합의에 다다르자, 아이는 꾹꾹 눌러온 울음을 어젯밤 베개 위에 쏟아냈습니다. 모카 몸에서 나던 고소한 냄새, 목을 긁어주면 내던 가르랑 소리, 그 사이 우리가 주고받은 체온. 모카와 함께한 몇 주간의 기억은 슬픈 추억이 되어 목이 아픕니다.
사랑은 이어집니다. 그저 함께 할 수 없을 뿐.
아이는 사랑의 여러 형태를 배우고 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과 모카를 입양 보내는 마음의 줄기는 같습니다. 이참에, 책임감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파양'이란 단어에 담기지 못하는 우리의 사연까지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해 왔는지 모릅니다. 무조건 끌어안는 모습만이 책임감이고 정답인지 묻고 물었습니다.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무지가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습니다만, 그 잘못을 인정하는 일 또한 책임의 일부라 생각하며 막다른 곳에 닿을 때까지 생각의 시뮬레이션을 돌립니다.
사랑하는 일은 서로를 살리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모카가 돌아온다면 아이는 모카를 피해서 지내야 하고, 모카는 모든 자취에 제한을 받게 될겁니다. 우리가 모카에게 주고 싶은 환경이 이것이었을까를 생각해보게 하는 지점입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아이는 힘겹게 문자를 써서 주인장에게 보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살리는 동시에, 모카를 살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별이 왔음을 인정하는 마음 또한 사랑의 마음이자 책임지는 마음이었어요.
"모카는 제가 만져주면 좋아하는데, 저는 이제 모카를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없어요."
그 후로 펫샵 주인의 연락은 끊겼습니다. 가끔 보내주던 모카의 동영상도 더 이상 오지 않습니다. 사랑의 방식을 택했다면, 그 결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서로를 위해 헤어지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에 매여있기보다, 그 사랑을 기도로 축복으로 보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을 탓하기보다, 함께했던 시간을 감사히 떠올리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사랑의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모카는 이제 다른 품에서 살아가겠지요. 우리가 함께한 짧은 시간이 모카의 기억 속에도 작은 온기로 남아 있기를 바라며 애끓는 사랑을 이곳에 풀어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