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보낼 용기
너는 엄마의 끝없는 슬픔이어서는 안 돼.
끝없이 번져가는 사랑이었으면 해.
어디서든, 너의 빛과 나의 빛이 서로를 향해 비출 수 있기를.
송지영 <널 보낼 용기>
'시와 시선'을 주제로 강연해 주실 수 있나요?
두드림이 반가웠습니다. 누군가 나를 찾는 건 감사한 일이지 당연한 일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좀 망설였습니다. 시에서 '시'자도 모른다는 건 아는 게 전무하다는 말인데,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나를 밧줄로 꽁꽁 묶고 있었거든요. 그럴 땐 얼른 질문을 바꿔 묻습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있지 않을까?'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믿을만한 구석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내게도 스토리는 있으니까요. 그건 '시'는 몰라도 '선'은 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선線: 점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이루어진 자취.
일상은 끝없는 점으로 이루어집니다. 점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선으로 변해가지요. 그렇게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라는 것이 참 묘해서, 상황과 상대에 따라 길이를 늘였다 폈다 하는 요술을 부립니다. 내 삶에는 암투병이라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시간. 7개월은 7년처럼 길었습니다. 일단위로 찍히던 점이 시간단위로 찍히면 시간은 약 12배로 촘촘해졌습니다. 점들은 대개 의문문일 때가 많았어요. 빽빽하게 뿌려진 점들은 서로 만나 선이 되기도 했고, 그때 만나지 못한 점들은 늦은 해석을 통해 지금껏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하, 그걸 물으면 되겠구나! 당신을 이루는 수많은 점들에 대해. 점이 남긴 의미에 대해.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강연에 17살 아이가 참석했습니다. 먹는 것을 좋아한다며 또래 아이처럼 자신을 소개한 얼굴이 잠시 수줍게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미소 속에는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아이는 둥글게 등을 말고 앉았습니다. 질문이라도 받으면 시선은 좌우로 요동하다가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길지 않은 강연이었지만 아이는 내내 응달을 향해 있었습니다. 얼굴보다 정수리를 보이기 좋아한다는 것, 말하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에 집중한다는 것. 나는 아이가 보여주는 소소한 몸의 언어를 눈여겨보았습니다. 그건, 뾰족한 수는 없을지라도 도움이 되고픈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질문: 인생을 1년으로 친다면, 당신은 지금 몇 월 며칠쯤을 살고 있나요?
아이의 대답: 1월 20일
질문: 당신은 어떠한 흔적을 남기고 싶나요?
아이의 대답:.....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어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혹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 속뜻을 알아챘어요. 흔적을 없애고 싶다는 말은 존재를 드러내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라는 것을요. 자꾸만 수그러지는 고개 안에 발버둥 치는 자아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다가갈 수는 없었어요. 아이들의 마음은 닿으려 할수록 닿지 못하지요. 그러다 나는 원래 예정에도 없던 나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우회로를 택했습니다.
"나는 4월 1일을 살고 있어요. 내 삶은 만우절을 닮았거든요. 그건, 살아있다는 사실이 농담 같고 거짓말 같아서예요. 심장 박동은, 들숨과 날숨은, 결코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삶을 ‘당연한 흐름’으로 여기지만 내게 그것은 ‘우연의 연속’ 일뿐입니다. "
아이가 어디까지 내 말을 이해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감사의 시선 만큼은 전해졌길 바랍니다. 그밖에 나는 여전히 어떤 말을 해줬어야 했을지 잘 모릅니다. 바라보며 도닥일 뿐입니다. 아이가 점을 찍듯, 1밀리씩 자라날 때마다 손뼉 치며 호들갑을 떠는 어른이 되어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용기로 점을 하나 찍고 나서, 또 하나를 찍을 용기를 냈으면 합니다. 그렇게 점은 선이 되고, 선은 아이를 살리는 동아줄이 될 겁니다. 일 년 중 겨우 20일을 살아본 인생이 마치 그게 남은 생의 견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는, 응원을 보내듯 내 인생의 점을 늘여가는 것으로 모범을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우리는 '살아볼 만한 인생'을 살아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