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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Nov 05. 2024

내 폰은 온종일 무음이다.

배려의 데시벨

아래층에서 몇 번이나 올라왔다. 남편을 액세서리 키링처럼 달고 온 그녀는 인사도 없이 내게 중국어로 기관총을 쏘아댔다.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심장이 무수한 총알에 맞서며 쉼 없이 벌컥했다. 그녀의 총구 같은 뾰족한 입이 임무를 다할 때까지 참았고, 실언의 끝이 어딜지 기다렸다. 말은 금세 동어 반복의 굴레에 빠져 결국은 막다른 곳에 갇혔다. 그녀가 총알을 다 뱉어버린 탓인지 부록 같던 그 얇실한 남편은 빈 총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우리 집 아니야. 너 잘못짚었어.


층간 소음이 수직으로 내려오는 것 같지는 않다. 소음 이동 경로가 어떤 때는 대각선이 되기도, 파이프를 타고 한 층을 건너뛰기도 하는 모양새다. 그녀가 우리 집에서 지속적으로 난다는 딱딱 소리를 나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녀의 일방적이고도 무례한 방문에 불쾌했고 억울했다. 이웃집을 수소문해서 소음의 진상을 밝혀낸 후에도 그녀는 일관적이게 인사나 사과가 없었다.


국외에 사는 삶은 많은 양보와 이해를 요구한다. 처음엔 중국말을 못 해서 원치 않는 양보도 숱하게 했지만, 지금도 양보하는 게 차라리 편하다는 생각이다. 왜냐, 옳고 그름과는 별개로, 그들과 중국어로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모국어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소음 같은 음성을 견디고 싶지 않아서다. 이건 뭐 깊게 말 안 해도 알지 않나.


모르는 번호가 하루에도 수십 통이 부재중으로 찍힌다. 연예인이 쓰던 번호인가도 싶었다. 적어도 10년 넘게 내 번호로 살았는데, 어디에 어떠한 연유로 번호가 표류하고 다니는지 알 방법이 없다. 임시변통으로 해둔 무음 설정이 몇 년째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눈이 불빛에 민감해져 이제는 전화를 불빛으로 받는 경지에 이르렀다. 빛 또한 소음이 되었다.


도시는 공기도 시끄럽다. 생활 소음의 기본값이 높다. 집 앞 광장에는 조석으로 스피커 부대가 출동한다. 중국인의 문화유산 '광장 댄스'다. 선호에 따라 지르박, 힙합, 고전 무용 음악이 한 곳에 뒤섞여 현란한 저세계 음악을 만들어 낸다. 펑퍼짐한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에어로빅 무리와 우아한 동작으로 짝꿍의 손을 마주 잡은 사교댄스, 그리고 고쟁(古筝) 소리 낭랑한 중국 무용의 무리가 뒤엉켜서 광장은 한 마디로 카오스다.


이른 아침 공원에 가 있는 매일의 루틴은 잠시 이들 소음으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하다. 나는 보통 이 시간에 음악이나 오디오 북을 듣는데 주의력이 온전히 내게 있기에 고막에 더 깔끔하게 전달되는 맛이 좋아서다. 휘발성이 좋은 오디오 북은 여간한 집중력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후루룩 지나가기에 다시 돌아가 들어야 하는 수고스러움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나의 산책 시간을 마침맞게 알고 있는 지인이 메신저를 통해 주기적으로 내게 전화를 건다. 본인의 한갓진 시간을 수다나 떨며 보내려는 생각에서 일 텐데, 몇 번 받아주니 받기도 안 받기도 애매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하소연과 온갖 걱정거리를 습관적으로 쏟아내는 그녀의 전화벨에 나는 폭력을 느낀다. 받지 않으면 으레 해줘야 할 콜백의 의무가 또한 무겁다.


요즘엔 전화를 바로 걸지 않고 미리 문자로 통화 가능 여부를 물어주는 이들의 배려를 종종 경험하기도 한다. 나같이 벨소리를 무서워하는 이들에게는 환영받을 일인데,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혹은 통화 가능하실 때 연락 주세요. 등의 밑밥이 콜포비아*를 안심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부드러운 문자는 공격적인 벨소리의 가장 반대편에 있다. '띠링'하고 짧게 울리는 배려의 데시벨은 식전 수프가 되고 샐러드가 되어 천천히 위장을 덥히 가동할 준비를 시킨다. 준비가 된 위장에 영양가 있는 음식은 아무래도 자극도 적고 소화도 쉽다.


'하루에 한 끼 정도는 같이 먹어야 식구'라는 광고 카피를 티브이에서 보았다. 누구나 맞다고 생각하는 모호한 생각을 이리 한 줄로 보여주니 같이 밥 먹지 않는 식구는 식구가 아니라는 말이 되어 뼈가 아프다.

저녁 같이 먹나요? 

매일 보내는 건조한 메시지에 남편은 내킬 때만 답을 준다. 지금 가요. 라든가 먼저 먹어요. 라는 식으로.

남편의 답이 없으면 나는 전화를 걸기도 하는데, 전화는 보통 통화 중이거나 통화 불가지역에 있다고 안내한다. 콜백도, 메아리도 없다.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 생활에서 끝없이 걸려오는 업무 전화와 화상 회의에 그의 피로도를 짐작한다. 통화 불가지역이라는 안내 메시지가 한편으론 다행스럽다. 그 틈에 잠깐 숨 돌리면 좋겠다.


 




*콜포비아: 전화벨만 울리면 깜짝 놀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것 같은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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