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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Nov 03. 2024

다시 동심으로

누구나 마음속에 아이가 산다.

느닷없이 찾아온 11월 태풍 비바람에 도로가 잠겼다. 바퀴를 푹 담근 채 턱을 치켜들고 주행하는 출근길 차량은 미래 시대에서 온 수륙양용이다. 수영장 물속에서 빨리 걸을 수 없듯, 차는 속도를 못 내고 평소 두 배의 시간 동안 길 위에 젖어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말끔한 차 본체가 반짝였다. 폭풍우가 여러 방향으로 휘몰아친 덕분에 차체는 구석구석 고강고, 고밀도 스케일링을 마쳤다. 태양과 가까웠던 북반구는 이제 기울어진 축을 따라 조금씩 태양과 멀어진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작열하는 태양이 다시 찾아왔지만 넓혀진 태양과의 소원해진 거리만큼 날은 시원해졌다. 


밤새 물기가 가신 이튿날 아침, 딸과 마주 보며 웃었다. 장화는 다시 신발장에 들여놓고, 보송한 운동화를 꺼내 놓았다. 대중교통엔 태풍 후 찾아온 이 빛나는 날씨를 붙잡으러 나온 이들로 북적했다. 인파 속에 끼여 서 있다가, 자리가 나면 앉기도 하고, 가방에 챙겨 온 책을 꺼내 보기도 했다. 우리의 소풍이 이미 시작되었다. 딸은 요즘 재밌어 죽겠다는 이야기 책에 금세 빠져들고, 중간중간 피식 웃기도 했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쌍둥이 형제가 하루씩 번갈아 등교하며 학교 생활을 이어가는 이야기를 아이는 그렇게 부러워하며 읽을 수가 없었다. 


공원 초입부터 청명한 창공에 티 없이 탁 트인 하늘이 펼쳐있다. 언젠가는 하늘을 바다라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바다가 하늘이고, 하늘이 바다인 거꾸로 세상. 

하늘의 바다는 잔잔해 보였다. 작은 구름 포말한 조각 없이 깊고 맑았다. 요 며칠 쏟아져 더 높아져 버린 바다다. 날아다니는 물고기가 철을 따라 남쪽으로 찾아온다. 이 물고기들은 이곳 호수에 떼로 몰려와 종종 계절을 보내기도 한다. 신기하고 신비로운 것은, 이들 조상이 이곳에 가면 모진 풍파 없이 안전하게 겨울을 날 수 있다고 알려준 듯하다는 거다. 이들이 작년의 그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매년 이곳을 기억하고 오는지 그들의 지혜가 인기척처럼 들린다. 


그 사이 과실이 붉어진 나무들이 다닥다닥 달려있는 자신의 후손을 가슴 벌려 자랑한다. 3미터는 족히 될 법한 가지 많은 나무는 겨드랑이 곳곳에 열매를 그득히 모아 놓았다. 초록이었을 열매는 어느새 노랗고 붉은 기운을 입어가고, 귀하고 앙증스러워 다가가 만져본 열매는 작은 사과와 산자열매를 닮았지만 그 족보 어디서도 본 기억이 없는 애매한 얼굴이었다. 몸체가 태풍에 맞서며 떨군 잎과 열매가 땅 위에 흐드러지게 피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나무 밑에서 열매를 줍는 부산한 손들이 신나 보였다. 나무를 흔들지 않고도, 직접 따지 않아도 후하게 베풀어주는 나무의 마음 가짐이 너그럽다. 몇 알씩 주워 주머니에 넣고 주먹에 넣어 흔들며 논다. 중요한 한약재라도 되는 듯 흠이 나지 않게 주워 담는 백발이 성한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척하면 딱하고 알아채는 외국인 억양을 들키고 싶지 않아 말하기를 주저하는 나지만 오늘은 할머니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붙였다.


"할머니, 이거 뭐예요?"

"몰라~."

"근데 왜 주우시는 거예요?"

"재밌잖아~."


재미에 이유가 없다. 

.... 때문에 재밌다.

.... 라서 재밌다. 

이유가 정확하면 그 재미는 금세 시들해진다.

좋아하는 데 이유 없듯이, 재미에도 이유가 없다. 진짜 재미는 그렇다.


할머니들 주머니에는 없는 것이 없다. 옛날 우리 할머니도 주머니에서도 사탕이며 휴지며 비닐봉지가 말하기 무섭게 튀어나왔다. 고쟁이 주머니에 든 고무줄로 꽁꽁 묶은 지폐 몇 장이 할머니의 전재산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던 사무치던 기억도 오랜만에 튀어나온다. 

백발 할머니 주머니에서 나온 하얀 봉지가 구겨진 입을 벌려 땅 위의 과실을 부지런히 받아주고 있었다. 헐렁하게 담은 봉지는 주둥이를 묶고 손잡이를 길게 뽑아 손가락에 걸렸다. 반동하는 힘으로 어깨와 허리를 두드리는 수제 안마기. 한참 어른의 신박한 아이디어와 귀여운 모습에 좋으시냐고 물었고, 할머니는 끄덕였다. 



봉지에서 몇 알 꺼내서 딸아이 작은 손에 건네주신다. 너도 놀아봐. 재밌다. 

빨갛고 노란 알맹이가 오가는 주름 손과 작은 손이 닮았다. 재미에 나이가 없다.

"엄마, 저 할머니 되게 애기같아."

"할머니 마음속에도 아이가 살아. 엄마 마음속에도 그런걸."


원색의 옷을 빼입고 나온 할머니들 무리가 단풍에 가려졌다 나왔다 하며 가을의 색감을 더 짙게 만든다. 꽃받침, 하트, 볼하트의 지시에 따라 포즈 잡는 옛날 소녀들의 모습은 연예인의 포토라인이 따로 없다. 모두 잠든 이른 새벽, 잠에서 일찍 깬 예전의 소녀들은 사진을 넘겨보며 프사를 바꾸겠지. 계절에 따라 봄 소풍과 가을 소풍을 연중행사로 떠나던 학창 시절처럼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봄가을의 연중행사를 잊지 않는다. 


횡단보도 앞의 노란 원복의 유치원생들이 선생님을 따라 오른손을 바짝 치켜든 채 건너온다. 그 옆으로 겹치듯 지나는 빨강, 초록의 할머니 무리 또한 오는 차를 향해 손바닥을 보인다. 

굽이 굽이 돌아 귀환한 아이의 삶. 

거칠어진 손이 그 길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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