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해외 출장을 다녀온 동료에게 뜬금없는 선물을 받았다. 은색의 묵직한 물체는 동그란 회전판 위에 식사용 나이프를 닮은 납작한 쇳덩이 두 개를 달고 양끝을 살짝 비튼 각도로 서로 붙어 있었다. 비행기 프로펠러 같기도, 천장 선풍기 같기도 한 장난감이 그 쓰임새를 모른 채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게 뭐냐는 질문에 그는 작명소에서 갓 지어온 것 같은 세 글자를 보내왔다.
봉투칼.
그런 단어는 내 인생 단어록에 들고 난 적이 없었다. 우편물이 오면 찢으면 되고 칼로 가르면 되었지 봉투칼 따위를 위해 귀한 스테인리스를 낭비해도 되는지 의아했다. 양 날개가 모인 중심 회전판은 묵직해서 책상에 한 번 자리를 잡으니 쉽게 어디에 가지도 않았다.
엊그제 원본을 보내주기로 한 거래처 서류가 출근과 함께 자리에 도착했다. 이럴 땐 습관적으로 형광등에 봉투를 비춰 내용물을 피해 조심스럽게 뜯기 마련인데, 책상 위의 봉투칼이 그 순간을 위해 기다렸다는 사인을 준다. 한쪽 날을 손에 쥐고 다른 쪽 날의 좁은 머리를 봉인한 덮개 안쪽에 슬쩍 밀어 넣어 힘을 가해 바깥쪽으로 밀어낸다. 열린 자리가 매끈하고 말끔하여 우편물 봉투의 네모 반듯함이 그대로다. 찌그러짐이 없는 네 구석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 다른 날 도착한 흰 봉투의 우편물에도 익숙한 듯 봉투칼을 댄 내 손이 새삼 우아해 보였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모스코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읽던 소설책에 봉투칼을 꽂아 읽은 페이지를 표시하던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일까.
휴대폰이 보편화된 세상이 다시 호출기 시대로 돌아갈 수 없듯, 한번 경험한 편리는 뒤를 돌아볼 이유를 찾지 않는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조금 더 편리한 것을 추구하고, 봉투칼이 불러온 손끝의 미세한 만족감과 심미적 효과는 여전히 내게 봉투칼을 고수하게 했다. 실제로 봉투칼을 애용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은 그 후에 알게 된 사실이다.
산업 혁명과 함께 인체의 한계를 보완할만한 수단들이 끊임없이 발전되었다. 나귀나 말에 올라타 이동하던 시대는 곧 발을 굴러 전진하는 자전거와 삼륜차, 그리고 대중교통과 자가용에서 더 나아가 전용기에까지 편리함을 위해 끊임없이 나아갔다. 빠르고 편리한 것이 삶의 제일 목표가 되어버린 시대였다.
걷는 것 대신 대중교통을 선택한 만원 지하철의 승객들 틈 사이, 나는 그 안에서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다행히도 역간 소요시간이 2-3분 안팎이라 잠시의 불편함은 곧 다음 역에서 해소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묵묵히 시간을 세고 있었다. 환승역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승객들 덕분에 안고 있던 가방을 다시 원위치할 정도의 여유가 그 사이 허락되었고, 한산한 노선으로 접어들면서 입석 승객들의 은근한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앞자리 승객이 내리진 않을까 기대도 슬쩍 해보며, 빈자리를 찾은 기쁨은 건조하게 태연한 척하고 있어도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엉덩이는 이미 틈새를 비집고 있다. 옆 승객의 눈치에도 코끼리만 한 엉덩이는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러시 아워가 살짝 지나니 옆자리도 비고, 앞자리도 빈다. 그 순간, 나는 한 중년 여인에게 눈길이 갔다. 그녀는 안고 있던 백팩과 도시락 가방을 옆자리에 옮기고 그만큼 줄어든 신체의 중력에 기분까지 가뿐해 보였다. 가뿐함도 잠시, 지하철이 5개 노선이 겹치는 환승역에 도착하면서 다시 인파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옆자리에 둔 가방을 다시 무릎으로 가져오기 마뜩잖은지 옆자리를 비우지 않는 그녀의 무심하고 뻔뻔한 얼굴은 사람을 밀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부지런히 보냈다. 더 이상의 좌석이 남지 않아 그녀 옆자리의 짐들이 미안해지기 시작할 때쯤 아이를 동반한 여인이 그녀에게 사인을 보냈다. 살짝 밀어 물병 하나 놓을 만한 자리를 내어주며 더 이상은 내어줄 자리가 없음을 표하는 그녀에게 애엄마는 재차 짐을 들어 자리를 비우라는 요구를 했다. 할 수 없이 가방을 무릎으로 다시 가져왔고, 그만큼 다시 무거워진 무릎은 아무래도 옆사람이 언짢은 눈치다. 양쪽 다 한 동안 궁시렁했다.만원 지하철에서 앉을 좌석이 있고, 여전히 앉아있음에도 그녀의 불평은 끝이 없었다. 처음엔 지하철만 타면 만족할 것 같던 마음은 혼자서 몇 자리를 차지해 편히 앉고 싶은 지경에 와 있다. 편하고자 하려는 인간의 욕구에는 끝이 없다.
텀블러에 물을 담아 오기를 거부하고, 편의점에서 내 편의로 사 마신 생수는 마실 때는 편리했지만 그 쓸모가 다한 순간 쓰레기통 앞으로 나를 불러왔다. 빈 병이 쓰레기통 벽에 부딪히며 내는 공허한 소리를 비명처럼 들으며 인간은 더럭 겁이 난다. 한 만큼 돌려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우주의 이치이고 원리임을 모르지 않다. 편리하다고 집에 사 모은 예쁜 쓰레기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집안 가득히 쌓여 환경호르몬을 내뿜고 있다. 요즘 곳곳에서 일어나는 이상 기후와 전염병과 무지막지한 환경 훼손을 보며 그간 누린 편리함의 어두운 표정을 마주한다. 편리와 불편은 양립하고 있는 거울과도 같다. 편리가 불편이 될 수도, 불편이 편리가 될 수도 있다. 결국은 부인할 수 없는 한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