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토론이 있는 화요일 방과 후, 풀어 내린 긴 머리가 의기양양하게 좌우로 찰랑거리는 아이의 뒷모습에 오늘 좋은 일이 있었음을 예감한다. 곁눈으로 살핀 얼굴엔 숨기지 못하는 엷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상하이의 초등학교는 5학년이 최고참이고 6학년부터는 중등교육으로 편입된다. 올해, 학교의 큰언니가 되고부터 학교의 모든 행사에서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는 일이 잦아졌다. '되는 게 하나도 없다'라고 생각한 학교 생활은 다행히 '되는 것도 있네'로 바뀌어 갔다. 자잘한 성공의 경험이 쌓여 마음 상태와 태도에 당당함으로 자연스레 깃들었다. 부모로서는 이런 맛에 학교 보낸다.
"또 이겼어!"
토론 연습에서 아이가 속한 팀이 좋은 코멘트를 받았다며 전장에서 이기고 돌아온 당당한 억양과 흥분된 목소리가 굿뉴스를 전했다. 오늘의 토론 주제는 학교에서 체육교육이 필요한지에 대한 찬반 토론이었는데, 토론은 말 그대로 양립하는 논제를 가지고 상대를 설득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공통적 가치에 따라 입장은 찬성에 몰렸지만, 논제를 반박하고 설득하는 연습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각 팀의 입장은 중재자가 정해주기도 한다.
특별히 아이의 토론 참여를 내가 장려하는 이유는 중고등학생 언니 오빠들이 그 수업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 시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란 없다. 선배들은 토론 대회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조언을 후배들에게 전수해 주고, 설득의 노하우와 언어 외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후배가 팁을 얻는 방식으로 시간은 채워진다. 대가족 품앗이 시절, 아이가 태어나면 동네가 아이를 키웠다는 말이 있었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엔 이웃들이 하나의 거대한 가정이 되어 서로 도우며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했다. 언니가 엄마가 되고, 언니는 동생을 자식처럼 돌보기도 했다. 교단에 선 선배들의 이야기에 반짝이는 후배들의 눈이 무엇이든 던져만 주면 달려들어 받아먹을 기세다. 선생님이 아닌 또래 선배의 말에서 오는 동질감과 좁혀진 세대 차이의 갭이 한 몫하기도 했다.
"다음 주에는 한 번 지고 와봐." 하는 나의 말에,
"지려면 토론을 왜 해?" 퉁명스레 대답하는 아이다.
백분토론, 끝장토론.
매체에서 보여지는 토론은 정해진 시간 내에 꼼짝 못 할 결론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다가 우리나라의 토론은 이런 전투적인 성격으로 발전해 왔는지 그 안에 여유와 이해가 결핍된 소통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유감이었다. 선거철 후보들의 TV토론회를 보면 서로 비방의 꼬리를 무는 부끄러운 모습에 동네 싸움 구경이 따로 없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적 메시지와 폭력성을 고려해 19세 청불로 지정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과정에서 의미를 찾고,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고 살피는 과정을 토론의 목적이라고 봤을 때, 어떻게든 상대를 누르고 승리의 깃발을 앞다투어 꽂으려는 식의 토론은 이미 레일을 벗어났다. 최재천 교수님은 이미 그의 신작에서 이와 비슷한 맥락을 언급하였는데, 토론이라는 단어보다 서로의 의견을 숙고해 보는 '숙론'이라는 단어가 사실 그 목적과 의미에 더 적합하다고 첨언하였다.
숙론은 상대를 제압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나와 상대의 생각이 다른지 숙고해 보고 자기 생각을 다듬으려고 하는 행위다. 서로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식 수준을 공유 혹은 향상하려 노력하는 작업이다. 숙론은 '누가 옳은가 Who is right?'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 What is right?'를 찾는 과정이다.
<숙론, 최재천>
아나운서 같은 냉철한 목소리가 중재하는 토론의 분위기가 때로는 사람의 생각을 굳어지고 부자유하게 할 때가 있다. 논리 정연한 패널들의 말솜씨에 나 같은 수준의 언변은 말 한마디 갖다 얹기도 죄송하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고 단호하게 드러내야 하는 자리에서 분위기와 상대의 표정에 겁을 먹는 나는 토론이라는 단어가 연상케 하는 차가운 촉감이 여전히 어렵다. 용기내어 뱉은 한 마디가 오랜 시간 이불킥의 소재가 되기도 하고, 날카롭게 반박하는 상대의 말투가 평생 머릿속에 각인되어 토론은 내게 그저 무겁고 무서운 표정이다.
아이는 토론에 대하는 형식적이고 전형적인 어투를 훈련받기도 했다. 정립된 생각을 전달할 때 언어 외적인 부분도 분명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고쳐 쓴 듯한 어휘로 흔들리지 않고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대게 듣는 걸 택한다. '그래, 니 팔뚝 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