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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Oct 31. 2024

정의(正義)는 일상이다.

내 할 일을 하는 것으로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대학 시절 내내 갇혀 지낸 질문.

그 시절 학생들에게 숙제처럼 던져진 이 질문은 마이클 샌델 교수의 관련 서적 판매량과 함께 시대의 폭발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온갖 대중매체에서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는 JUSTICE...

도덕 수업처럼 세상을 흑백, 선악, 권선징악으로 접근하며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유튜브 강의를 찾아 듣고 책을 읽으며 아는 것이 쌓여도 결국은 돈 많이 주는 회사를 찾아 떠나는 현실에 대학생들은 한낱 헛똑똑이에 불과했다. 앞서 최루탄을 터뜨리며 민주주의를 외치던 선배 대학생들의 기개는 후배 대(代)에 와서 민주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 이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직장 생활의 햇수가 거듭되며 승진이 되고 통장 잔고는 쌓였지만, 헛껍데기 같은 돈 안에서 청춘 시절에 이상으로 여기던 정의를 발견하지 못한 삶은 쉽게 매너리즘에 잠식당했다. 오늘이 행복한 것은 내일이 오늘보다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지, 완벽히 똑같은 모양의 삶이 평생 반복된다면 삶은 그 자체로 공포 영화가 된다. 컴퓨터 시스템의 요구에 따라 입력하고, 컴퓨터가 도출하는 데이터로 방향을 찾고, 인간이 컴퓨터를 이용하는지, 컴퓨터가 인간의 길을 지시하는지 모르겠는 기계 같은 삶 속에서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한 인공 지능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모했다. 공감과 이해의 결핍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시대는 정의의 시대와 반대편에 있었다. 


지독한 매너리즘에서 도피하기 위해 택한 곳은 대학원이었다. 입학 지원을 하기 위해 작성한 수학계획서에는 온통 정의와 관련된 내용 뿐이었다. 기업의 이익 추구 뒤에 가려진 온갖 부정, 책무 불이행과 무책임을 예로 들었다. 식지 않은 꿈은 문서 안에서 해결사나 히어로의 모습으로 의기양양하게 드러났다.  




Stella Jang의 노래를 좋아한다. 재즈풍 음색과 산뜻하고 청량한 보이스를 좋아하지만, 그녀에게 매료된 건 사실 노래 '빌런(Villain)'의 가사 때문이었다. 


We all pretend to be the heroes on the good side.

넌 착한 사람이고, 걘 나쁜 사람이고, 재미없는 너의 세상은 흑백.

I'm killing someone maybe

You're killing someone maybe

I'm killing you maybe

You're killing me maybe

Am I good?

Am I bad?

Are you good?

Are you bad?


누군가의 정의롭지 못한 행위가 내 삶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나의 모자람이 다른 이에게 플러스로 작용하기도 한다. 내게는 이상적인 삶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국산 제품을 선호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국산 제품만 옹호하면 수입이 줄어든다. 수입이 줄면 자연히 수출을 하려고 해도 상대 국가가 환영하지 않는다. 국산을 애용하는 것은 결국 수출에 악영향을 미치고 국가 간 무역 수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심각한 무역 불균형이 국산만 애용하는 소비자를 애국자가 아닌 그 반대로 정의할지도 모를 일이다.  단편적인 케이스 안에서도 선악과 흑백이론만으로는 설명이 불가한 삶이고, 현실이다.  


계산에 없었던 플러스, 마이너스의 결과로 세상은 어떻게든 맞물려 돌아간다. 다시 말해, 계획이 없어도 세상은 사필귀정으로 될 일은 테고, 될 일은 것이다. 죽도록 노력하는 것이 한낱 먼지가 되어 휘발할 수도, 어느 날 갑자기 로또를 맞아 벼락부자가 수도, 세상의 어느 곳에든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는 고로, 지구 전체적인 시각으로 볼 때 그것은 정의의 큰 그림이 된다. 눈앞의 현실에 안달복달하며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대신 지금 당장 내가 있는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 모이면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세상은 그 안에서 정의를 만들어간다. 


기대에 없던 계산으로 어느 날 주부라는 직업이 내게 왔다. 나는 주부이기에 매일같이 식구들 밥을 챙기고 옷을 세탁한다. 나의 밥을 먹고 내가 세탁한 옷을 입고 오늘도 각자의 일터와 학교로 나아가고, 이 또한 얼마나 사회에 필수적인 직업인가 조용히 생각한다. 자신의 몸을 통해 사회의 구성원을 충원하고, 먹이고 입혀 키워내는 지극히 숭고한 직업. 나는 존경받아 마땅한 주부로서 사회 안의 정의를 무의식적으로 실현하고 있었다.


정의란 사회에서 부여받은 각자의 일을 해내는 것.
우리는 오늘도 모두가 지킨 정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를 움직인 문장들, 오하림>


폭우 속 글쓰기

주부로 살기 시작하며 눈에 보이는 단편적인 것으로 상대의 능력과 재량을 폄하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정의란 어쩌면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그 자리를 잘 감당해 내는 삶으로 정의되는 건 아닐까.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쓰기로 마음먹은 이상 독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바람이 나른한 잠도 쫓아낸다. 내가 하기로 맘 먹은 일을, 혹은 내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으로 사회 안의 정의는 매순간 실현된다. 


산책은 기분을 내 손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준다. 머무르는 곳마다 각기 다른 감성이 몰아치는 경험을 언젠가 해봤기 때문인지 비가 무자비하게 쏟아질 거라는 예보를 보았음에도 야외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빗방울이 바람에 날려 지금 이 자리에 들어치고 있다. Stella Jang의 노래를 들으며 그녀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음미하는 중이다. 그러곤 조용히 속삭인다. '난 내 일을 하면 된다.' 

정의는 결국 우리의 일상과 아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 테니까.


무심한 듯 오셔서 무표정한 얼굴로 내 발밑을 쓸어준 청소 아주머니의 일이 여전사처럼 정의로워 보인다. 






스텔라장 (Stella Jang) - 빌런 (Villain) |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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