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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소리 Oct 30. 2024

선악 판단

익숙함에 대한 옹호일 뿐

잠을 잃은 새벽, 습관적으로 뻗은 손에 핸드폰 모서리가 손끝에 걸린다. 습관적인 터치로 습관적 페이지에 접속하고, 의미 없이 들여다보는 습관적 포털 사이트에 습관적 가십들이 밤새 그득하다. 나와 전혀 관련 없는 가십에 혀를 차고 공감하기도 하며 세상 안에서 나의 소속감을 시시각각 애써 입증한다. 화나요, 기뻐요, 후속 기사 원해요... 


젊은 시절 실속 없이 커피숍에 들러 비싼 파르페를 먹었다. 지금의 요나정 같은 도도한 디저트 겸 음료다. 가십을 좋아하는 친구와 창가 자리에 앉아 길가의 젊은이들을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곤 했다. 아이스크림에 꽂혀있는 빼빼로를 핥으며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이 쉴 틈이 없었다.

쟤, 바지 왜 이렇게 내려 입었니? 벗겨지겠다야.

쟤 머리 색깔 진짜 특이하네!

쟤쟤 우리 과 XX 아니야? 남자 친구 또 바뀌었어? 손 잡았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남일에 옳다 그르다 입을 대는 사람은 왜 이리 많은 걸까?


사람은 자신의 시야와 시각의 틀에 삶을 가둔다. 목표를 높게 잡고 멀리 보고 큰 꿈을 키우라는 옛 성인의 말씀이 그래서 여전한 진리로 남아있는 이유다. 내가 보는 만큼 세상은 결국 내게 그만큼의 곁을 내어준다. 익히 들어 알았지만 방법은 몰랐기에, 어른과 선생님의 생각을 노필터로 대뇌에 새겨 넣기 바빴던 우리네 어린 시절이 있다. 서양의 창의적이고 사고를 장려하는 학습 방법과는 달리, 아시아의 교육은 대개 외우고 또 외우는 데 온정신이 팔려 있었다. 객관식 문형에 찍는 것도 실력이라는 말이 입에서 입으로 밈이 되어 돌았고, 0 혹은 1이라는 단순한 답안을 가진 단답형 문형이 B4 갱지 시험지에 빽빽했다. 스스로 깊이 사고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공교육의 주입식 압박에서 학생들은 뉴런이 무한대로 뻗어 가야 할 왕성한 시기를 원소주기율표를 대입 성공 주문이라도 되는 양 주절거렸다. 특별할 것 없이 여러 차례 개정된 시험도 결국은 선생님의 입장에서 가르치기 편한 방식으로 반복 조정되었을 뿐이다. 우리의 교육은 그렇다 할만한 큰 변화의 이벤트를 맞이한 적이 없다. 


의무 교육을 성실히 이수한 사람들은 전인교육의 수혜자(?)며, 공통적으로 모난 돌을 혐오하게 된다. 다른 이의 생각과 입장을 충분히 고려할 의지조차 가진 적 없는 사람들은 꼰대가 되고, 의도치 않게 역꼰대를 양성하기도 한다. 습관적인 평가와 선악의 판단에 주저함이 없으며 자기의 말이 곧 진리이자 법인 이들 공통점의 가장 큰 희생자는 돌아 돌아 자기 자식이 되고 말지만, 쉽게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학생이 얼굴에 분칠을 하고, 그게 학생 얼굴이니?

본인이 부모 세대에게 듣고 자란 말들을 거름 없이 자식 세대에 전수한다. 화장과 학생이라는 황당한 연결고리에 분칠 하는 학생의 퍼프가 톡톡 거리는 두드림을 멈춘다. 

화장하는 아이는 공부를 못한다. -> 공부를 못하면 비행 청소년이 된다. -> 비행 청소년이 되면 화장을 한다. -> 다시, 화장하는 아이는 공부를 못한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단편적 케이스를 진리라도 되듯 믿고 떠드는 순환이 무한반복을 멈추지 않는다. 


실제로, 화장을 하면 예쁘다. 

어른도 그런데 아이라고 그렇지 않을까. 다만 아이는 맨얼굴도 예쁘기에 화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화장한 얼굴은 예쁘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예쁘고자 하는 욕구에 따를 뿐, 거기엔 공부와 일말의 연관성도 찾을 수 없다.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 하거든." 
<눈부신 안부, 백수린>



한 동안 티브이에 문신한 연예인이 살구색 테이프로 문신을 가리고 출연을 하더니, 요즘은 웬만한 매체에서 문신한 피부를 쉽게 볼 수 있다. 문신은 깡패들만 하는 거라던 어른들의 말이 과거에 있었다. 목욕탕에서 만난 문신 많은 아저씨에 꼼짝 못 했다는 순수 청년의 에피소드가 라디오의 사연의 단골 소재였다. 문신은 초반에 반영구 미용 문신이라는 접근으로 대중들의 인식의 벽을 서서히 허무는가 싶더니 언젠가부터는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영구 문신을 비롯해 부위별 컬러 문신도 길가에서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옛날 생각대로라면 모두가 깡패가 되었고, 야쿠자가 된 것이다. 


문신을 비롯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동성연애 커밍아웃이다. 본인은 원래 동성애자로 태어났다는 이들, 양성애자라 칭하는 이들의 수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예전에도 많았을 그들의 가려진 설움에 애도하는 마음이다. 지하철이나 쇼핑몰에 지나는 인파를 관찰자 입장으로 들여다보자면 참으로 많은 동성애자가 눈에 띄는 요즘이다. 

각자의 선택을 흠 많은 개인이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이전에 나의 생각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익숙한 것을 선으로 보고, 어색한 것을 악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내 시선의 방향이 무엇 때문인지 그 딱딱한 근원을 찾아본다. 어쩌면 선과 악은 옹호의 여부에 따라 갈리는 것은 아닐까. 어색하여 굳어진 악이 다음 세대에는 익숙한 선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본인의 교육과 종교적 배경으로 바뀌지 않는 생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건 잠시 밀쳐두고, 후대에 전할 나의 습관적 메시지는 어디에 유래한 건지 살펴볼 필요는 있다. 나의 생각이 지금도 팔랑귀의 모양으로 펄럭이는 이유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기도 한다. 부지런하고 말랑한 사고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진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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