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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의라일락 Mar 15. 2024

처음으로 버스 타던 날

서른여덟 처음으로 버스 타기


매일 건너도 매일 아름다운 한강을 건너며

처음으로 버스 타던 날이 생각납니다. 어릴 적 이야기구나 싶으신가요. 아뇨. 바로 얼마 전 이야기입니다. 수술을 받고, 퇴원을 하고, 집에서 회복기를 거치고, 가족의 차를 타고 복직을 하기까지 내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니까요. 조금 걷는 것도 버겁고 숨이 차서 택시를 타고 다니던 때. 헤모글로빈 수치 6을 기록하며 잠깐 일어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던 때. 그리고 큰 수술로 인해 며칠간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던 때. 그리고 긴 회복과정을 거쳐 회사로 다시 복귀하던 때까지 혼자서 버스를 타는 건 생각조차 못 했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날은 무슨 용기였을까요. 복직 전에 친했던 동료와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기분이 좋아서였을까요. 며칠 동안 문제없이 회사를 다녔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놓였던 때문일까요, 저는 그날 퇴근길 버스를 타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힘차게 회사 문을 나섰습니다. 보통은, 여기서 카카오 택시를 잡고 그 기다리는 잠깐조차 힘을 낭비하기 싫어 계단턱에 앉아 있었을 테지만, 발걸음을 돌려 천천히 걸어 보았습니다. 걷는다는 것. 아무나 다 하는 일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혼자 힘으로 일어서고 걷는다는 건 얼마나 숭고한 일이었는지 병원 신세를 지는 내내 깨달았으니까요.


 혼자 걷지 못한다는 건 누군가 도와줘야 한다는 건데, 그게 저를 엄청나게 사랑하는 엄마나 가족이라면 괜찮겠지만. 그리고 또 숭고한 직업의식을 가진 간호사님들이라면 괜찮겠지만. 병실에서 정밀 검사를 위해 어딘가로 이동하던 때에도, 저의 이동을 도와주는 어떤 분들은 심심치 않게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아, 물론 겉으로는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지켜야 하는 매너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안 그래도 바쁜 그분들의 스케줄 속에 저라는 사람이 덩그러니 짐처럼 느껴졌을 때, 아 내가 내 힘으로 걷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 서러운 일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을 가고 싶었을 때조차, 자고 있는 엄마를 굳이 깨워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불편했습니다.


 물론 그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정도 가지고 찡찡댄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 짧은 하루조차 나의 힘으로 걷지 못한다는 건 힘들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회사 문을 나와 내가 스스로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열 걸음을 걷고, 또 오십 걸음을 걷고, 큰 블록을 하나 지나고,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내내 고단했던 퇴근길이 너무나도 행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도보 15분 정도 거리, 집으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는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인증샷을 찍었습니다. 강남역. 밤의 길거리. 스쳐가는 차들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세련되게 불을 밝힌 카페와 음식점, 학원, 그리고 회사들의 불빛과 정류장에 앉아있는 나. 멋진 회사원.


 그날은 버스 안에서 집으로 향하는 야경조차 유난히도 아름다웠던 기억이 납니다. 회화처럼 아름다운 한강의 야경과, 동호대교의 주황색 형광펜으로 그려놓은 듯한 선. 그리고 저 멀리 반짝이는 남산타워. 그렇게 40분여를 달려 우리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내려서도 10분 남짓은 걸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동안 나 버스 탔다고 가족 단톡방에 자랑을 했습니다. 40 가까이 먹은 나이이지만 버스 하나 탔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 딸 장해요. 사랑이 많은 엄마는 이런 걸로도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날은 걱정하는 가족이 차를 가지고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와 주었습니다. 집까지 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무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은 많고, 버스를 탈 수 있는 순간은 지겹게도 많이 찾아올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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