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과수원>4

by 눈항아리

꽃이 지면 열매가 맺힌다. 모든 꽃은 열매 맺기를 바란다. 흐드러지게 핀 봄날의 꽃들은 앞다투어 양분을 그러모은다. 그러나 과실을 맺는 건 소수에 불과하다. 꽃들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꽃이 열매를 만들었다고 해서 모두 사과로 성장하는 건 아니다. 나무는 있는 힘을 다해 많은 열매를 매달려고 하지만 농부는 팔기 좋은 과일을 만드는 게 목표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버티고 농부는 대부분의 열매를 솎아낸다. 열매를 솎는 걸 적과라 한다.


적과, 무수한 어린 열매를 따내는 작업이다. 서릿발에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지는 이른 봄의 꽃잎처럼, 어린 열매는 서툰 가위질에 속절없이 추락하고 만다. 봄날의 적과는 비정한 작업이다. 모든 열매들 중 크고, 튼실해 보이고, 위치 좋은 곳에 있는 열매를 남기고 다른 것은 모두 가차 없이 잘라낸다. 아기 열매가 후드득 바닥으로 추락한다. 미처 자라지 못하고 떨어져야 하는 신세는 얼마나 처량한가. 열매는 작은 유리구슬에서 왕구슬 크기로 자라나고 있는 중이었다.


명주 언니와 나는 늘 짝꿍처럼 붙어 다니니까 한 나무에 같이 붙어서 일했다. 가위를 들고 마구 열매를 잘라내는 나와는 달리 명주 언니는 뭔가를 아는 듯했다. 명주 언니는 열매와 열매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고 신중하게 하나씩 떨구었다. 나는 몇 번 잔소리를 듣고 나서 대충 알아들은 척하곤 한두 뼘 정도 사이에서 대충 열매를 잘랐다. 그 정도면 괜찮게 일한 것이었는지, 전지 할 때처럼 과수원에서 쫓겨나지는 않았다. 나는 농사일 좀 하는 중학생이었다.



적과가 끝나고 또 한참이 지나면 봉지를 씌운다. 그동안 열매는 자라서 왕사탕만 해졌다. 종이봉투를 벌려 씌우고 봉투에 붙어있는 가는 철심으로 묶어준다. 나무에는 불룩 배가 부른 누런 종이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나무마다 가족 농부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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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발견하기 위해 귀 기울이다 자연스레 글쓰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족, 자연, 시골생활, 출퇴근길,사남매의 때늦은 육아 일기를 씁니다. 쓰면서 삶을 알아가고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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