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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 Apr 25. 2024

그 향기, 기억난다

Dear 올리

어둠 속에서도 활짝 만개한 꽃나무들이 보였다. 


며칠 전 북경에서의 일이다. 

저녁을 먹고 숙소 3층 테라스에 나가 보았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담배를 피운다고 간 곳인데, 우리들은 방으로 올라가던 길이라 따라가 보았다. 

으흠.. 3층 테라스 정원에는 참 향기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좋았다, 그 달콤한 향기의 봄밤이.


5년 만에 다시 가 본 중국은 많은 것을 바꿔놓은 듯했다. 

대도시 빌딩가 아무리 휘황한 곳이더라도 어느 한 편에서는 집단무를 추어대던 시민들이 있었고, 

공원 어디서든 스피커를 틀어놓고 마이크까지 사용하며 창가를 불러대던 사민들..

그런 분들이 다 없어졌다. 

경제적으로 급속 성장하는 모습과 공산주의 시대 인민들의 생활 방식이 뒤섞여서 

제멋대로인 듯 했던 대도시 거리 풍경이 필터로 걸러내서 싸악 정리된 그런 느낌이었다. 

꼭 서울의 어딘가 인 듯한 분위기. 

북경의 봄날이 좋게 느껴지는 것이 당황스러울 정도. 


그래서 그랬는가?

그 밤, 우리들의 숙소, 호텔 3층 테라스의 밤 풍경은 한층 더 평화롭고 달콤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과 살랑거리는 밤바람은 정답다고 느껴질 정도였는데,  

무엇보다도 코 끝을 자극하는 달콤한 느낌의 정체가 궁금했다. 


낮에 우리 방에서 내려다본 테라스 정원에는 여러 조각 작품이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었고, 

이런저런 나무도 많이 심어놓은 모습이었다. 분수대와 걷기 좋은 길도 조정해 놓았는데, 밤에 가 본 테라스 정원엔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활짝 핀 꽃나무들만이 훤하게 그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조명등이 있긴 해도 대체로 어두운 형편이고 보니 코 끝을 자극하는 달콤한 향기와 함께 허연 꽃 뭉치가

가벼운 바람에 너풀너풀 한들한들. 끌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기분을 좋게 만드는 향내가 어느 꽃나무에서 비롯된 것인지 꽃 피운 나무들을 하나씩 짚어가 보니, 

목련도 아니고, 해당화도 아니고, 아니 글쎄.. 


라일락... 북경의 그 봄밤, 최고의 꽃향기 주인공은 바로 라일락이었던 것.  


나는 2년 전, 37년 동안의 직장 생활을 정년으로 퇴직하고 은퇴자가 되었다. 

퇴직했을 당시에는 꼭 감옥에서 나오는 듯한 해방감을 맛보았는데, 그런 '감옥 같았던 직장'도 대학 졸업 후 한동안 취직을 못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낸 후에야 들어갔던 곳임을 그 라일락 꽃향기가 기억나게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두어 달이 지났는데, 나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졸업 후 첫 봄의 그 어느 날 밤,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봄밤, 어디선가 핀 라일락 꽃향기가 우리 창문을 타고 넘어 들어와 내 코를 자극한다. 이제는 겨울이 다 지나갔고 봄이 이렇게 성큼, 열린 창문을 타고 넘어 들어와 있는데도 나는 아직도 .. 

어쩌구 저쩌구.. 


뭐 그렇게 처량맞게 썼던 것 같다. 나의 편지를 받았던 그 친구는, 그때 내 편지를 받고 오롯이 같은 마음이었었는지,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까지 나에게 그 편지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라일락 꽃향기를 맡으며 조금은 서글픈 마음으로 편지를 썼던 그 기억을 지금까지 간직하면서,   

라일락 꽃향기는 정말 좋지만, 그 꽃향기는 나의 서글펐던 시절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도 같이 간직하게 되었다. 


2024년 봄밤, 북경 어느 호텔 3층 테라스 정원.

취직 못한 낙오자의 좌절은커녕 이제는 은퇴자의 여유자적한 마음으로 향기를 즐기고 있으면서도,

그 때의 그 아스라한 아픈 마음을 잊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지금의 나에게, 

이제는 괜찮은 거지? 라일락 꽃향기, 좋기만 하지? 

그렇게 말하고 싶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향기, 이제는 좋게.. 

좋게만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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