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깨나라에서 육아를?
육아
밭 매라면 밭 맸지 애는 안 본다고. 육아 너무 힘들지. 그것도 중국에서
밭 매고 나면 뿌듯하고 보람이라도 있겠지. 애 보면 애 잘 봤다고 누가 칭찬을 해주나? 당연한 걸로 쳐버리니 이건 뭐 보람도 없고 뿌듯함은 있나? 아.. 오늘도 하루가 마무리가 되었구나 하면서 잠을 잘 잘 순 있는 건가?...
아무것도 마무리된 느낌이 없다.
애 재우면 엉망진창인 집안 꼴을 보게 되니 그거 두 눈 감고 잘 수도 없으니까.. 치우고 치우다 내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자야 되고 그러면 또 아침이다.
육아하면 다 이런 일상이다? 근데 중국에서 육아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중국은 시부모님께서 아이를 봐주는 게 당연시된다. 중국을 반으로 잘라보면 남쪽은 더하고 북쪽은 그래도 조금 덜(?)하다.
한 3년간 출근을 할 일이 있었다. 그때 만난 사람들을 보면 남쪽에서 온 직장인들은 시부모님께 아이를 맡겨두고 출근한 사람이 많았다. 신선한 문화충격! 일 년에 아이를 한 번만 본다는 것. 잉? 보육원에 맡겨놔도 그것보다는 더 보겠다는 생각이 띠용 들었다.
왜 그러고 살아요?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했다. 으잉?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하고 다른 동네 와서 월세내고 살면 그 비용이 그게 그거 아닌가? 왜 굳이 이렇게 멀리 와서 아이를 일 년에 한 번만 보면서까지 이렇게 생활해야 할까? 이 부분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적게 벌어도 한 동네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 우리 신랑 말은 우리가 아직도 그렇게 부유하지 못한 데는 아이들을 끼고 살아서 그렇다고 얘기한다. 항상 얘기하면서 남편을 다독거리는 말은 "애들 금방 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양보할 수 없고 절대 아이들 곁을 비워두지 않겠다! 다짐한 이 부분..
한국에서는 이런 거 다짐 꼭 안 해도 되잖아요..?
근데 중국에서는 남편을 다독여야 하고 또 다짐해야 된다.
그래도 중국에서 좋은 건 육아 스케줄이다
오전 10시 정도가 되면 공원에 아파트 단지에 3살 미만 유아들로 바글바글 꽉꽉 차 있다는 것.
커뮤니티 형성이 잘 되어 있다는 거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사람이 없지만 햇살 좋은 날 봄여름가을겨울이고 할 것 없이 아주 그득그득하다. 그래서 항상 아침을 먹이고 오전 한기가 없어지면 출근 도장을 찍으러 공원에 들른다.
항상 마주치는 아이들과 할머니 손잡고 오고 안고 들고 업어서 그렇게 한 시간 한 시간 반 가량을 아이들을 보면서 마주하는 이웃주민들과 이랬다 저랬다 뭘 먹인다 얼마큼 먹인다 과일은 어쩌고저쩌고 금방 시간이 지나간다 그러고 보면 점심시간이다.
오전 스케줄 뭐 이렇다 할 특별한 건 아니지만 온 중국이 오전마실에 동참해 있다는 것.
그건 내 아이의 스케줄에도 영향이 있다. 즐겁지 뭐
한국은 문화센터에 간다고 들었는데.. 한국에서 육아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지만 중국 오전 마실 정말 유익하고 좋다. 내가 E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난 이 스케줄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왜 3살 미만 아이들만 북적일까?
중국에서는 보통 만 3살 이후로 아이들을 받는다. 그 당시 유행했던 책이 3살까지 엄마가 키워라. 가정육아책이 유행했었다. 정부 시스템(?)으로 3살까지는 가정육아한다는 게 참 마음에 들었다.
정말 작은 반은 2살 이후도 받는다고 하는데 개월수가 적을수록 교육비가 늘어난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은 2살짜리 아이가 가는 걸 참 안쓰럽게 쳐다보기도 한다.
우리 큰 아이는 2살 8개월에 그러니까 32개월부터 유치원에 갔다. 어린이집이라고 해야 하나? 엉엉 울면서 갔다. 둘째도 있었기에 선택해야 되는 부분이었지만 난 전혀 안쓰럽지 않았다.
한국은 1살 때도 잘 보내더라고요 하면서 시부모님께 얘기했고 오히려 늦게 갔다고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 당시 가게를 봐야 하기도 했었고 둘째 하나만 시부모님이 돌봐주셔도 버겁다고 생각했기에 첫째는 꼭 유치원에 갔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시부모님 그때가 참 젊었었네.. 씁쓸하다..
중국 시부모님 얘길 해보자면.. 우리 아파트 입주전이여서 시부모님과 함께 잠깐 살았다.
그때 한중커플 친구들이 집에 와서 얘기하길 시어머님이 걸레질을 쉼 없이 하신다였다. 정말 깔끔하신 분이다.
그에 반해 나는 뱀이었다. 내 몸만 깨끗하게 하지 어질러 놓고 입었던 옷은 뱀 허물처럼 벗어놓고 치우는 건 뒷전 밥도 하지 않았다.
우리 친정엄마가 날 육아했다가 시부모님께 이전된 거였다. 나보다 더 깔끔한 분에게 육아를 맡겼으니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둘째라서 그냥 이제 그러려니가 됐던 부분도 많았다.
첫째를 키울 때는 정말 아이를 손도 못 대게 했었었는데 많이 사람이 된 거였다. 집 앞 공원에서 우리 시어머니는 그렇게 우셨다고 했다. 나도 목격한 적이 있을 정도니까.
나 못된 건 우리 아파트 단지 사람들이 다 안다.
라떼 중국에 왔을 때는 카톡도 없었다.
엄마랑 스카이프로 통화를 했었다. 2010년에 중국에 왔었으니 검색은 컴퓨터로 네이버, 그리고 메신저는 네이트온이었다. 그것도 다 컴퓨터로 메신저 했던 시절.. 새록새록 갑자기 네이트온이 켜고 싶어 진다.
그 말인즉슨 정보가 너무 없었다. 맘카페? 있긴 있었지만 그렇게 활성화되지도 않았었고 노란 책 <육아와 출산>안고서는 중국에 왔다.
남편이 자기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증손주 보여드리고 싶다는 말에 남편은 담배를 6개월 전부터 끊었고(지금까지도 유지 중) 우리 둘은 한국에서 산전검사까지 마치고 중국에 오게 되었다.
그때는 그냥 6개월만 중국에서 살아보자였다. 난 어렸고 남편은 중국을 너무 사랑했다.
6개월 살아보기 위해서 한국에서 미리 중국어 학원을 일주일에 5회 2시간씩 6개월을 다녔다. 하지만 정작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니하오(안녕). 짜이찌엔(잘 가).... 소통이 안 되니까 남편 없이는 중국에서 생활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뭐 6개월 살다 갈 거니까 괜찮았다.
근데 문제는 나도 한국을 너무 사랑한 거였다.
한 달 두 달 재미났다 좋았지만 집에 가고 싶어 져서 훌쩍 집에 가버렸다 뭐 싸웠겠지? 뭐 때문인지는 기억도 안 나지만.. 또 남편이 한국으로 데리러 와서 또 좋다고 중국에 갑니다.
그리고는 기다리던 첫째가 찾아왔다.
가정이 생겨서였을까?
임신 후 남편이 고모와 식사자리에서 하는 대화.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더니 중국에서 사는 거 어때?라는 말에 "괜찮지"그 말이 그 말인 줄 몰랐다.
중국에서 눌러살자고 하는 말인 줄은..
블라블라 시부모님과도 얘기하고 블라블라 식구들에게도 그 얘기가 그렇게 됐나 보다.. 난 그 말이 그 말인 줄 몰랐는데? 이미 집 안 식구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남편은 마음을 굳혔다. 하지만 나는 중국에서 여행 그리고 가끔 오는 건 좋은데 여기서 생활은 좀 힘들다.
우리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고 형제가 없는 나는 엄마한테 말할 자신이 없어서 사촌오빠 콜까지 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괜찮다고 덤덤했다.
그럴 리가..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아이를 품고 이혼하겠다는데.. 엄마 뒤에서는 많이 우셨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가만히 있었다. 그때는 국제전화밖에 수단이 없었다. 함께 쓰는 메신저도 없었었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집에서.. 그러다가 남편의 문자 그리고 통화. 또 한국으로 데리러 오는 남편.. 사는 게 중국으로 바뀌었을 뿐 마음이 없지 않으니까 또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의 중국생활은 시작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