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것들

부제 : 시간을 삼키는 악마

by Anna


코퍼스 시계.png 코퍼스 시계

chapter 1.





동건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정문으로 들어섰다.


오래되어 보이는 아파트 앞엔 아무도 손대지 않은 듯한 작은 화단과 각종 분리수거 쓰레기통이 낡은 철골 부스 안에 놓여 있었다.


화단 가장 안쪽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는데 열을 맞추어 겨울초가 송송 심어져 푸릇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동건이 사는 신일 아파트는 이름과는 다르게 시멘트가 여기저기 노출되어 있었고, 배달 음식점 광고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현관들이 복도를 따라 있었고 복도에는 집안에 놓기 힘든 각종 기물들이 나와 뒹굴고 있었다. 신일 아파트는 한 동짜리 작은 아파트이지만 40년 전에는 이 근방에서 가장 떠오르는 아파트였다.


동건은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아파트의 외벽 페인트가 벗겨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살아온 곳이라 신일 아파트가 낡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신일 아파트 바로 한 블록 앞, 유리의 번쩍거림이 가득한 아데라움 주상복합이 들어서면서


신일 아파트는 기가 죽은 모양새를 하게 되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샤시들 중 제법 흰색의 새 샤시를 단 집도 몇몇 보였지만


구색이 맞지 않아 어수선해 보였다.


신일 아파트의 공동 현관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위에 달린 전등은 거미줄과 죽은 날파리들 때문에 그리 밝지 못했다.


전등이 제대로 작동이나 하는지 의심스러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신일 아파트의 계단 난간은 여기저기 녹이 슬고 여러 번 페인트칠을 한 것이 벗겨져 우중충해 보이는 느낌을 더하는 듯했다.


페인트칠이 날아가 버린 난간 손잡이 안쪽은 이전에 발랐던 와인색의 페인트가 드러나 있었다.


엘리베이터 대신 촘촘한 계단으로 이루어진 5층짜리 신일 아파트였다.


학교를 마치고 아데라움으로 들어가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신일 아파트를 사랑하는 동건에게 아데라움의 등장은 기가 죽을 일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고 화단도 그저 시멘트 회색빛이었지만


엄마가 심어놓은 겨울초만 없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겨울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동건은 "어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절레 절레 고개를 젓고는 계단을 3칸씩 빠르게 올라갔다.


날랜 몸놀림이었다.


4층이 없는 신일 아파트의 5층.


동건이의 집이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이 "철컹!" 하는 소리가 나며 닫겼다.


엄마는 쳐다보지도 않고 "응, 왔니?" 하는 짧은 대답으로 동건을 맞이했다.


동건의 엄마는 말수가 없었고 머리가 긴 편이었다.


동건은 엄마의 긴 머리가 늘 좋았다.


긴 머리를 한 엄마가 드라마에 나오는 여배우보다 더 예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아파트 베란다에 있는 수십 개나 되어 보이는 화분에 있는 잎사귀들을 정성스레 닦고 있었다.


동건이는 가방을 현관 옆에 털썩 던져놓고는 작지만 푹신해 보이는 오래된 소파에 자신의 몸을 털썩 던졌다.


핸드폰을 두 손에 슬쩍 쥐고 뭔가 할 태세로 앉았다.


흘긋 보니 엄마는 동건의 귀가에는 관심이 없는 것인지 잎에 집중하고 있었다.


얇고 부드러워 보이는 거즈 천 같은 것으로 고무나무의 널따란 잎을 정성스레 닦는 중이었다.


잎사귀들이 반짝거리며 윤이 나고 있었고 화분 아래에는 물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건은 벌떡 일어나 가방을 책상 위로 던졌다.


싱크대에 비치해 둔 비누로 깨끗하게 손을 비벼 씻고는 주전자에 담긴 보리차를 한 컵 가득 따라 마셨다.


말랐던 목이 촉촉해지고 시원함을 느끼자 컵을 싱크대 안쪽에서 야무지게 씻고는 건조대에 잘 엎어두었다.


동건은 방문을 열어 둔 채 책상 앞 의자에 비스듬히 앉았다.


가방에는 학교에서 수능에 필요한 교과서나 문제집 대신 블루투스 이어폰과 충전기 그리고 동건이 평소 즐겨 읽는 책 한 권이 있을 뿐이었다.


수능과 관계가 없이 지난 3년을 지내온 동건이었다. 수능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해도 동건에게는 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시 준비에 한창인 아이들이 고작 1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간 때문에 발을 동동 굴렀다. 수능은 그들만의 이야기일 뿐, 동건과는 관계가 없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침대에 던져진 가방에서 주섬주섬 블루투스 이어폰을 한쪽만 끼우고는 하굣길에의 들었던 노래의 가사를 읊조렸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왠지 가슴 한쪽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발라드 노래의 가사 때문인 듯했다. 괜히 동건이는 자세를 바꾸어 다리를 꼬고 한껏 몸을 뒤로 젖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데 그저 곁에 있어 주면 되는데.


I'll always be with you......!'


자세를 바꾸어도 가슴 안쪽이 자꾸만 아려왔다.


언젠가부터 발라드 음악을 들으면서 아려오는 이상한 느낌이 점점 더 심해지더니


이제는 음악을 듣자마자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감정에 무딘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음악에 빠져든 모습에 어색했다.


들을수록 눈물이 나는 음악을 듣지 않으면 그뿐이었지만


눈물샘을 자극할수록 더 슬프고 딥한 음악만 찾는 동건이었다.


슬픈 발라드를 들으며 가슴이 저릴 때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슬픔이 슬픔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닌 한 단계 진화한 더 깊은 감정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감정선이 건드려지는 노래만 찾고 듣게 되었다.


엄마가 가끔 듣던 '도망가자'라는 노래의 전주가 끝나고 미간에 '川' 내 천자를 그리면서 집중하려고 하는 찰나,


동건의 어깨를 한 번 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였다.


잎사귀 닦는 일이 다 끝나지 않았는지 젖은 흰색 거즈 천을 왼손에 쥐고서 동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 볼일 보고 일하러 다녀올게. 그래서 오늘은 일찍 나가야 해"


동건의 엄마는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진성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주로 밤 근무를 나가 오전이 되어야 집에 돌아온다.


밤 근무가 수당이 많았고 좀 더 조용했기 때문에 다른 직원들 대타로 엄마는 밤 근무를 많이 나가곤 했다.


동건이 가장 싫어하는 순간이다.


"......"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대답을 들은 것처럼 엄마는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집을 나선다.


"식탁 위에 제육 덮밥 해 놨으니 챙겨 먹어. 내일 아침에 조금 늦으니까 엄마 없어도 학교 잘 다녀오고."


한 달 뒤 수능을 치르는 가족답지 않게 엄마는 시험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작은 에코백에 흰색 텀블러와 핸드폰 그리고 색이 없는 립밤 하나를 툭 던져 넣고는


긴 머리를 검정 고무줄로 질끈 묶고 신발을 신었다. 집을 나서는 엄마를 보러 방에서 나온 동건은 “조심히 다녀오세요.”라며 인사를 했다.


한번 ‘씩’ 웃어 보인 엄마는 현관문을 닫기 전에 발랄하게 손을 흔들었다.


“쿵“하고 문이 닫혔다.


엄마가 나간 뒤의 집은 고요했다.


TV 소리도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어폰을 빼고 조용히 책상에 앉자 방 창문 바람이 부딪히는 소리만 희미하게 날 뿐이었다.


바람 소리 때문인지 더 적막해진 듯 했다.


고개를 떨구고 바라본 누릿한 장판을 도화지 삼아 머릿속으로 '도망가자'의 가사를 써 내려갔다.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 말자.' 잡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다시 나타났다.


노래가 시작되었고 피아노 반주 때문인지 동건의 가슴도 콩닥콩닥 뛰는 것만 같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고 서러운 그런 날이었다. 고요한 거실과 이어진 부엌에 엄마가 만들어 놓고 간 제육 덮밥이 식탁 위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먼지를 방지하기 위한 작은 보자기를 들어 올려 제육 덮밥의 향을 더 깊게 맡았다. 다행히도 군침이 돌고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저와 젓가락을 일부러 수저받침에 깔끔하게 올리고 엄마가 내일 아침에 먹을 것이 있는지 가스렌지 위의 냄비를 확인했다. 고추기름 냄새가 식욕을 자극하는 제육 볶음과 구수하게 국물이 잘 우러난 미역국이 있는 냄비가 있었다. 엄마가 힘들까 봐 하교 후 동건이 저녁 준비를 하려고 해도 자꾸만 동건이 도착하기도 전에 모든 준비를 다 해놓는 엄마였다.


”잠잘 시간도 부족하면서.“




chapter 2.




등교 시간 남평 고등학교 앞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고급 세단, 큰 suv, 경차들이 재빨리 오가며 아이들을 하나, 둘 내려주고


깜빡이로 표시를 한 차량들은 꽤 질서 있게 교문 앞을 지나갔다.


그리 넓지 않은 교문인지라 차량들과 걸어서 등교하는 아이들이 몰리게 되었다.


'남평 고등학교'의 교문 앞 차량과 학생들 사이로 동건은 어두운색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 터덜터덜 걸어갔다.


지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엄마의 평소 당부 덕분이었을까.


늦지 않게 학교에 도착했다.


교문 바로 앞이었다.


비상등이 켜진 제네시스가 누군가를 내려주려 했다.


동건은 차량 옆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등교 시간이 가까워져 마음이 급한 학생들 때문에 동건은 차량 쪽으로 몰렸다.


그때 갑자기 검정 제네시스 차량의 뒷좌석 문이 힘차게 열렸다.


동건의 눈앞에 차 문이 갑자기 열려 동건의 가슴팍 아래에 가볍게 부딪혔다.


문이 열리는 순간 몸을 뒤로 젖혀 큰 충격은 피했다.


동건의 반사 신경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내리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3학년 김지연.


차 문에 가로막힌 동건을 보았다.


"어머나, 정말 미안해. 괜찮아?"


괜찮은지 확인하려 지연의 손이 동건에게 향했다.


동건은 손으로 됐다는 표시로 두 손바닥을 펼쳐 보이고는 빠르게 그 자리를 피했다.


차 문을 여는 사람의 잘못을 따지려는 마음이 없어 보였다.


지연은 뒤돌아 차 문을 살짝 닫고 차를 보낸 다음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교문 안으로 호다닥 뛰어 들어갔다. 동건은 벌써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10월. 채광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교실.


수업 시간 내내 동건은 차 문을 벌컥 열었을 때 지연의 손이 머릿속에서 다시 그려질 뿐이었다.


햇볕을 전혀 받은 것 같지 않은 손으로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문을 그렇게 빠르게 열어젖히다니. 그 하얀 손이 자신의 몸을 향해 왔을 때 너무 놀라 차 문이 열렸을 때보다 더 심장이 크게 뛰었다.


동건의 생각에 그 지연의 손힘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게 생긴 손은 무거운 차 문을 빠르게 열어젖히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지연이 의외로 힘이 세다는 것 외에 제대로 빗질도 하지 않은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여 빛이 났다는 것 그리고 동건을 쳐다보던 눈빛이 계속 떠오른다는 것 세 가지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엎드려 자거나 의지가 없는 듯한 눈빛으로 칠판을 보고 있는 아이들 가운데 동건만은 고개를 조금 돌려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을 운동장에 시선이 꽂힌듯했다.


물론 시선만 그곳에 있을 뿐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에는 운동장을 도화지 삼아 지연의 얼굴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얼굴에 이어 이마에서 흩날리던 머리카락 그리고 그 옆으로 뽀얀 볼살의 곡선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계속 생각나던 손.


그리고 그 손을 타고 위로 올라가면 쳐다보기 힘들었던 눈.


이제는 손 대신 눈빛에 대해 다시 곱씹고 있었다.


지연의 눈빛은 부드럽고 상냥했지만, 동건의 생각을 알고 있는 듯한 눈이었다.


어떻게 그런 눈빛이 있는지 의아했다.


다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한 번 더 생긴다면 처음보다 더 당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점심시간.


동건은 급식소에 빠르게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점심 후 교실로 돌아가지 않고 운동장이 잘 보이는 학교 스탠드 구석에 앉아 늘 그랬듯 이어폰을 착용했다.


아직 한낮의 해는 뜨거웠지만 답답한 교실보다는 운동장 옆 스탠드가 좋았다.


이어폰을 착용한 채로 음악을 들으려다 물끄러미 급식실 쪽을 바라보는데 지연이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캔 음료를 마시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지연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고 지연의 친구들은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깔깔거리며 캔 음료를 홀짝거렸다.


어떤 이야기 때문에 지연이 그렇게 즐거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지연이 자신을 볼까 얼른 고개를 떨구어 운동장 바닥으로 눈길을 치웠다. 지연의 웃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동건이 시선을 꽂고 있는 운동장에 지연의 웃는 얼굴이 그려졌다. 동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슬픈 가사에 어울리는 애달픈 노래였지만 가사가 들리지 않았다. 동건의 귀는 이어폰 너머 지연의 웃음소리에 집중되었다.


지연이 친구와 깔깔거리며 웃다 문득 동건이 있는 스탠드 쪽을 바라봤다.


고개를 떨궈 땅을 보고 있는 동건이 보였다. 귀에 꽂은 이어폰은 대화 막는 수단인 듯했다.


지연은 웃음을 멈추고 친구들에게 먼저 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사라지자 주변을 잠깐 살펴본 후 동건이 있는 스탠드 쪽으로 걸어왔다.


동건의 귀에 꽂아진 이어폰은 높은 음량의 음악이 계속되고 있었고 지연과 눈을 마주친 이후동건은 줄곧 운동장 바닥에 시선이 꽂혀있었다.


지연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동건이 앉아있는 스탠드로 걸어갔다.


지연은 노크를 하듯이 동건의 무릎을 살짝 톡톡하고 두드렸다.


동건은 얼굴을 들어 무릎을 친 상대를 바라보았다.


'서지연이다.'


동건의 어깨가 살짝 움찔한 것은 지연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동건 자신도 적나라하게 느껴진 자신의 당황함이 들키자 멋쩍었다.


지연이 건드린 무릎이 갑자기 간지러운 것 같았다.


"아까 차 문을 세게 열어버려서. 많이 다쳤을까봐 물어보려고. 그리고 내가 사과했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대답 대신 동건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괜찮아."


"그래? 괜찮다니 다행이야. 여기 앉아있으면 해가 뜨겁지 않아? 음악은 교실에서 듣지 그래?"


"......"


"얼굴 탄다고."


멍한 표정이 되어버린 동건은


"상관없어."


"항상 혼자 다니더라? 혼자 있는 걸 좋아해?"


"......"


"혼자 있으면 좋냐고."


"음악 듣는데 누군가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음. 그거 말이야. 네가 매일 듣는 노래. 그건, 기분전환에 도움이 돼? 음악 듣는 거."


"조금."


"무슨 노래 듣는지 물어봐도 돼?"


"......."


"나랑 얘기하는 거 좀 불편한 모양이네? 나는 아침에 일이 신경이 좀 쓰여서 괜찮은지 궁금하기도 했어."


"......"


"방해한 것 같으니 가볼게. 이거 후식으로 먹어."


지연은 교복 앞주머니에서 스카치 캔디 커피 맛을 꺼내었다.


스카치 캔디가 동건의 무릎 위에 살포시 얹어졌다.


빨간색 사탕 봉지가 동건의 진회색 교복 바지 위에서 반짝거렸다.


동건이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음악 들어. 갈게."


지연은 추운지 교복 앞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으며 뛰어갔다.


무슨 일이 지나간 것인지. 어리둥절한 동건이었다.


3학년 5반 서지연이 나를 알고 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에 동건은 어리둥절했다.


스카치 캔디.


반짝거리는 빨간색 사탕이 지연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동건은 사탕을 교복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잘 들어갔는지 주머니를 손으로 살짝 벌려 다시 확인해 보았다.


빨간색 스카치 캔디가 교복 주머니 안에서 반짝하고 빛이 났다.


캔디를 주머니에 넣는 것을 본 사람은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노래가 끝났지만 끝났는지도 몰랐다.




chapter 3.




매주 화, 목, 토요일은 신일아파트 근처 백반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이다. ‘An’s 한식 백반‘ 이라는 간판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불이 켜졌다.


백반집 아르바이트는 일주일에 세 번이지만 바쁘다고 연락이 오면 일요일에도 일을 도와드리곤 했다.


동건이 일하는 식당은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서양식 메뉴가 아닌 한식집이라 집밥이 그리운 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계란말이, 김치찌개, 된장찌개, 순두부찌개, 제육 볶음, 부추전 같은 음식에 맛깔난 반찬들이 같이 제공되었다. 직접 참기름과 소금을 바른 김구이, 손이 많이 가는 호박전에 짭짤한 멸치볶음과 오이무침, 도토리묵 같은 메뉴들은 엄마의 손맛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끌어들였다.


대학생들이나 젊은 직장인들로 늘 북적이는 백반집에서 동건이 일한 지 1년이 넘었다.


테이블 수가 12개로 크지 않은 가게이지만 찾는 사람이 많아 일손이 늘 부족했다.


동건은 식재료를 대주는 밭에서 보내준 재료들을 옮기고 손질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주로 감자와 양파, 그리고 부추와 오이, 깻잎 같은 재료를 깨끗이 세척하고 껍질을 까는 작업이었다.


원래 이 백반집은 엄마와 자주 이용하던 식당이었다.


바깥 음식을 잘 먹지 않았던 동건이와 엄마가 유일하게 나와서 외식하는 식당이었다.


사람이 많이 붐비는 저녁 시간이 되기 전, 엄마가 출근하기 전에 들러 이른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곳이었다.


가게 주인의 이름은 안예찬으로 40대 초반쯤 된 키가 큰 남자였는데 점잖은 말투를 썼다.


예찬이 동건과 엄마의 저녁 식사에 계란말이를 서비스로 주었는데 계란말이를 흡입하듯 맛있게 먹는 동건에게 마음을 홀딱 빼앗겼었다.


그 뒤로 밥을 먹으러 오는 동건에게 새로 개발한 메뉴를 가장 먼저 선보여주기도 하고 맛 평가와 더불어 무거운 식재료 상자를 함께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몸을 쓰는 것은 동건이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일을 도와드리니 서비스로 받은 음식들에 대한 답례가 되는 것 같았다.


주인은 백반집 음식을 잘 먹는 동건이에게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브레이크 타임에 식재료 운반과 손질을 한 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저녁 장사가 시작되면 저녁 8시까지 음식 서빙을 하고 9시까지 마무리를 하는 일이었다.


주인은 동건에게 식재료 운반과 손질을 맡기면서 식재료 대금 결제도 맡겼다.


식재료가 정확한 양이 들어왔는지 확인하는 방법, 좋은 식재료인지 구별하는 법도 자세히 알려주었다. 질이 좋지 않은 식재료는 돌려보낼 수 있도록 하며 이유를 알려주었다. 서로 믿고 하는 거래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매번 철저한 확인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식재료의 질이 떨어지면 손님은 금방 끊기기 때문에 절대 놓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동건은 예찬이 해야 할 일을 상세히 알려주고 맡겨 주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그러면서 예찬이 하는 말을 머릿속에서 되새겼다. 믿어주는 만큼 실수가 없도록 잘 해내야겠다 다짐하였다.


동건은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좋은 식재료를 구별하거나 정확한 결제를 하는 것을 잘 해내었다. 시금치 뿌리가 댕강 잘려진 것과 시든 재료가 섞여 있는 것, 바람이 든 무나 당근 등은 들이지 않았다. 꼼꼼한 동건 덕에 식재료 트럭에는 늘 신선하고 영양가 있는 것들만 가지고 올 수밖에 없었다.


많은 양의 양파와 감자를 까서 커다란 스테인레스 식재료 통에 담아놓고 감자는 강판 기계에 넣어 잘 갈아두었다. 양파는 채 써는 기계를 이용하여 많은 양을 미리 썰어두었다. 이렇게 재료를 미리 장만해두면 가게의 주방장이 즉석에서 재료를 한움쿰씩 집어 편리하게 음식을 조리하였다. 양파 껍질을 한 번 벗기고 나면 쌓이는 속 껍질과 고추의 씨를 모아 육수를 내는 데 쓸 수 있도록 하자 육수의 맛이 한 등급 업그레이드 되었다.


동건은 주방장이 편리하도록 잘 썰어두고 갈아놓은 재료가 쌓일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손님이 많아져 식재료가 금방 동이 나면 더욱더 흥이 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건의 일은 돕는 것이 아닌 주요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비가 오는 토요일, 식재료를 납품하는 트럭이 가게 뒷문으로 도착했다. 주말 알바가 둘이나 와서 식재료만 준비하고 가면 되는 날이었다. 일이 빨리 끝나면 집에 가서 식당과 같은 김치찌개를 끓여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외투를 벗어 걸어두었다.


목록을 확인하여 상자 안의 부추와 양파 대파 등의 품질을 살펴보았다.


대파의 크기가 조금 두꺼워 식감이 질길 수 있었다. 좀 더 부드러운 대파를 보내달라 요청하고 나머지 재료를 안으로 들였다. 식재료를 세척 할 수 있는 커다란 씽크대 쪽으로 채소를 하나씩 옮겨두었다. 밖에 있는 마지막 재료를 가지러 나가는데 트럭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


짙은 남색 우산을 쓰고 있는 지연이었다.


동건은 우산 안의 지연과 눈이 마주쳤다. 동건이 기억하는 눈이 아닌 어딘가 멍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지연의 짙은 남색 우산에서 빗방울이 마구 튕겨지고 있었다.


코팅이 잘 된 듯한 남색 우산은 구겨진 부분 하나 없이 빵빵한 모양이었다.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은 듯한 커다란 우산이었지만 머리카락과 볼에 빗물이 흘렀는지 젖어있었다. 멍한 얼굴을 한 지연은 동건을 보고 있었다.


동건은 장갑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내며 무슨 일이 있냐는 얼굴로 지연을 보았다. 비가 더 쏟아지자 트럭에서는 식재료를 빨리 옮겨 달라는 클락션이 울렸다.


다 옮겨놓지 못한 재료가 퍼뜩 생각나 트럭으로 가 재빨리 재료를 옮기고 트럭을 보냈다.


트럭 뒤에 있어야 할 지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골목 끝까지 가보아도 지연은 없었다. 동건의 머리카락과 어깨가 젖고 있었다.


일에 몰두하고 있던 동건은 지연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멍한 표정이 되었다.


왜 여기에서 나를 보고 있었을까? 식당에 온 것일까? 그렇다면 왜 뒷문으로 온 거지?


지연이 왜 좁은 백반집 뒷골목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론가 가고 있던 길도 아닌 듯했고 꽤 오래 동건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동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지나가던 길에 동건이 일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서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연이 자신을 응시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빠르게 일을 해치우던 모습과는 달리 감자의 껍질 까는 속도가 더뎠다.


오늘처럼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까 싶었다. 비가 오는 것과 상관없이 큰 대로변까지 샅샅이 뒤져 지연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전과는 다른 얼굴이었던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거나 실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불러야 했을까?


식재료를 나르는 일이 지저분해 보였을까?


이미 비에 젖어버린 어깨를 괜히 한번 툭 털어냈다.


살짝 달라붙은 라운드 티셔츠 가슴팍을 잡고 털어냈다. 덥다는 듯 공기를 넣어주고


다시 일에 집중하여 남은 재료 손질을 하였다.




저녁 장사를 하기 전까지 일을 끝낸 동건은 식당 프런트 의자에 걸어놓은 책가방을 둘러메고


"안녕히계세요." 깍듯하게 주방에 인사 후 식당을 나섰다. 카운터에서 저녁 장사를 준비하고 있는 예찬에게도 인사를 하였다. 예찬이 한쪽 손을 들어 웃어 보였다.


동건은 식당 밖을 나와 숨을 한 번 쉬었다.


비가 아직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외투를 입고 모자를 위로 올려 썼다.


우산도 없이 동건은 신일아파트로 걸어갔다.


"왜 왔을까?"


괜히 땅을 한 번 발로 차고는 초록빛으로 바뀐 신호등을 확인하고 길을 건넜다.


비가 온 도로는 매끄러웠지만 자동차 라이트와 브레이크의 빨간 불빛으로 아스팔트 바닥이 덕지덕지 물감을 뿌린 듯 어수선해 보였다.


고개를 들어 신일 아파트의 3층을 보니 동건 집의 베란다에서 보이는 거실은 전등이 꺼져 있었다.


"........"


배가 고파져 신일 아파트 입구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과 삼각김밥 두 개를 사서 나왔다.


비가 와서였을까? 매운맛의 라면과 매운맛의 삼각김밥들이었다.


한 손에 컵라면을 들고 컵라면 위에는 삼각김밥 두 개를 얹었다. 한쪽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멍한 표정으로 집으로 걸어갔다. 김밥 두 개가 컵라면 위에서 떨어질 듯 말 듯 했다.


신일아파트 입구에는 동건과 어릴 때부터 함께 놀던 경민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는 중이었다.


경민은 동건을 보자 "어어이." 하며 불러 세운다.


"오늘 스트레스 받은 거 있어? 왜 그걸 사와? 매운 거 잘 먹지도 못하면서."


"그냥." 경민은 동건의 대답을 들으면서도 쓰레기를 통 안에 골인시켰다.


"이모 아까 출근하시더라. 집에 누가 왔던데. 비싼 차 타고. 우리 아파트 차가 아니라서 주차장에서 봤는데 차주가 내려서 너네집으로 가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이모가 지각을 좀 하셨나 봐. 엄청 급하게 뛰어가시던데."


"검정색 세단 맞아? 남자?"


"어. 남자. 한 50살 정도 돼 보이는 듯?“


”알겠어.“


경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건은 아파트 계단을 놀라운 속도로 빨리 뛰어 올라갔다. 컵라면 위에 얹힌 삼각김밥 두 개를 한 손으로 잡은 채였다.


현관문 앞과 집 안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빨리 나가야 했던 엄마의 거실 슬리퍼가 평소답지 않게 가지런히 놓여 있지 않을 뿐이었다. 거실에 불을 켜고 보리차를 한 잔 따랐다. 물잔을 든 채 엄마가 키우는 커다란 화초 옆으로 창문을 열었다. 어두워진 베란다 밖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신일아파트가 앞쪽 골목에 검정색 세단이 보였다. 세단은 시동을 켜고 어두워진 골목을 헤드라이트로 밝히고 있었다. 차는 이내 출발했다. 차주가 누구인지 아는 듯한 동건은 물잔을 씽크대에 집어 던지고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 슬리퍼를 발에 꿰었다. 계단을 몇 번 밟지도 않고 나르듯 1층에 도착했다. 동건은 골목으로 뛰어갔지만, 세단은 보이지 않았다.


’큰 도로 쪽으로 빠져나갔을 거야.’


차를 잡기 위해 대로변으로 전력을 다해 뛰었다. 좌로 우로 300미터가 넘는 골목을 단숨에 뛴 동건은 이내 큰 도로와 만났다. 곳곳에 고여 있는 웅덩이를 거르지 않고 뛴 덕에 동건의 발은 금세 질척거렸다. 큰 도로에는 차들과 헤드라이트 불빛들이 뒤엉켜 있었다. 비가 내리는 퇴근 시간 빵빵거리는 도심의 소음 속에서는 검정색 세단을 찾을 수 없었다.


”젠장.“


질척거린 슬리퍼가 찝찝해졌다.


동건 머리 위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불빛 때문에 짧게 자른 동건의 뒷머리가 땀에 반짝거렸다. 목뒤로 흘러내린 땀은 후드티 안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대로변을 향해 서 있던 동건은 주먹을 꾹 눌러 쥐었다. 손톱 끝이 손바닥을 강하게 눌러 자국이 날 정도였다. 아픔도 잊은 동건의 어금니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꽉 눌러 쥔 주먹이 함께 떨렸다.






3년 전, 동건이 중학생이던 무렵이었다. 작은아버지 김기환은 납품 업체를 운영하는 경영인이었다. 공업 지역에 들어가는 수억 원대의 기계를 납품하였는데 여러 회사 대표와 시의원, 청장 등 많은 연결 고리에 뒷돈을 대주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거의 독점 판매나 다름없는 경영을 하고 있었다. 동건의 아버지 김기철은 당시 경찰로 재직하고 있었다. 4살이나 어린 동생 김기환은 자신의 부를 거들먹거리며 형을 무시하기도 하였다. 동건의 엄마는 김기환이 남편을 업신여기는 것을 알고 있었고 거리를 두며 남편과 동건을 보호했다. 김기환은 새롭게 들어서는 공단에 기계를 독점 납품하기 위해 시장과의 거래가 있었다. 시장이 가지고 있는 바닷가 변두리 땅을 비싼 값에 매수하고 그곳에 공업 기계 창고와 회사를 세웠다. 엄청난 규모의 공업 기계를 한꺼번에 들여오면서 관세를 누락시켰고 이는 시장과의 암묵적 관계로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관세 없이 독점 공급되는 기계들은 주변 공장들을 잠식해나갔다. 시장은 변두리 땅을 김기환에게 매매 하면서 10배의 이익을 남겼고 그 금액이 자그마치 220억에 이르렀다. 큰 배팅에도 김기환은 시장과 신 공업 단지 기계 납품 의뢰를 추가로 받아 1년 만에 시장이 가져간 이익의 몇 배에 이르는 자산을 가지게 되었다. 납품이 계속 이루어진다면 곧 시에서 가장 부자가 될지도 몰랐다.


수사과로 이적한 김기철에게 결탁에 대한 신고가 접수됐다. 동료들과 함께 수사를 맡게 되었다. 동생이 주동자로 가담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이 가족이라는 것을 수사과에 알린 후에 지구대로 이적 신청을 하였다. 가족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으므로 이적 신청은 금방 받아들여질 것이었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김기환은 형에게 전화해 자신이 동건이를 공격하기 전에 형이 직접 수사해서 간단히 벌금형으로 마무리 지어달라는 협박을 하였다. 같은 부모 밑에 자란 형이지만 자신을 향해 조여오는 수사망 앞에서 김기환에게 가족은 없었다. 김기철은 기환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자신이 지금까지 모든 증거를 제출하고 끝낼 것이라 전했다. 기철은 기환이 부적절한 방법으로 사업을 확장 시키는 것의 위법성을 이야기하고 동생이 먼저 자수를 하기를 원했다. 기철과의 통화 후에 기환은 핸드폰을 던졌다. "제기랄!"


기철은 자신의 직업이 가족에게 미칠 영향력을 염려했다. 동건의 엄마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전했고 동건이와 함께 다른 곳에 가 있으라고 부탁하였다. 기철의 걱정에 동건의 엄마는 오히려 담담하게 반응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리고 동건이를 절대 혼자 다니게 두지 않을게. 걱정하지 마." 경희는 두려웠다. 하지만 남편에게 말뿐인 격려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날 밤 기환은 경찰 수사과 과장을 매수했다.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매수였다. 시의원이 자신을 향한 수사망을 알고 있으며. 경찰 청장이 그들의 편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동안 수사과 과장이 받은 뇌물과 근무 행태를 다 파악하고 있으니 수사과 내 경찰 둘을 자를 것이라 하였다. 그 둘에 포함되고 싶지 않으면 수사에서 손을 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철이 가진 증거물들을 없애면 3억원을 주겠다고 했다. 수사과장은 5년째 진급에서 누락 된 사람이었다. 이번 진급에서 또 누락 된다면 경찰 옷을 벗고 나가야 할 판이었다. 이런 정황을 잘 알고 기환이 일부러 접근한 것이었다. 진급에 실패하면 아내와 둘이 조촐한 집을 한 채 집어 시골로 가 살기로 하였다. 3억이 있다면 일부러 도시에 남아 돈을 더 벌 필요는 없었다. 집을 지을 돈이 생겼으므로 연금만으로도 생활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김기환과 헤어진 후 수사 과장은 김기철에게 연락하였다. 가지고 있는 증거물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하였다. 기철은 이적 신청 후에 증거물을 과장이 아닌 수사관 회의에서 공개하겠다고 하였다. 과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차를 몰아 기철의 집으로 찾아갔다. 기철의 집 앞에는 기환이 이미 와있었다. 기환과 함께 기철의 집을 부술 듯 두드렸으나 동건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철이 동건과 동건의 엄마를 다른 곳에 있으라고 이미 연락해놓았기 때문이었다. 기환에게 시장의 전화가 왔다. 기철 혼자 기철 회사 비서와 만나 수사를 하고, 기계 창고에서 잠복해 있다는 것이었다. 시의원과 기환은 기계 창고로 차를 몰았다.


그날 밤 동건의 엄마는 기철이 기계 창고 근처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중학생이던 동건과 엄마는 기철을 잃은 날 기철의 사고가 우연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기철의 장례식에 기환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 앞에 두 번 엎드려 절을 하고는 '마음 약하게 먹지 않겠다. 김기환을 가족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다짐하였다. 동건의 주먹은 세게 눌러 쥐어 손톱이 손바닥에 깊은 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겨우 중학생이었지만 동건은 스스로 힘을 키우겠다 다짐하였다.






김기환의 차를 쫓다 집으로 돌아온 동건은 샤워를 하고 컵라면과 삼각김밥 두 개를 먹어 치웠다.


흙탕물에 물든 양말을 세면대에서 조물조물 빨아서 건조대에 널어두었다. 그러고는 보리차를 한 잔 들이켰다. 보리차의 구수한 향이 입안에서 동건의 기분을 달래주었다. 동건은 소파에 가로로 길게 누웠다. 천정에는 거실을 밝게 비추는 전등이 사람 얼굴처럼 보였다. 밝지는 않았지만 작은 거실에 적당한 아담한 전등이었다. 둥근 전등이 갑자기 지연이의 얼굴이 되었다. 급박한 상황이었건만 갑자기 지연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지연의 얼굴을 떠올릴수록 점점 더 하나씩 선명 해져갔다. 젖은 머리카락과 멍했던 눈빛.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머리를 휙휙 가로젓고 손목으로 눈을 가렸지만 감은 눈 안에서도 지연의 얼굴이 자꾸만 그려졌다. 동건의 감은 눈 안에서 보이는 지연의 눈빛은 더 강렬하게 동건을 보고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열심히 차를 따라갔더니 피곤해서였을까? 많은 생각이 드는 그런 밤이었다.




월요일. 등교를 하고 지연이 결석을 했다는 것을 알게됐다. 혹시나 하여 급식실이 잘 보이는 운동장 옆 스탠드에서 기다렸으나 지연이 늘 어울리던 무리들이 교실로 들어가고 나서도 지연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교복 주머니에 들어있는 스카치 캔디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손에서 달콤한 커피향이 났다.


학교 수업을 하면서 운동장을 쳐다보기도 했다. 늦게라도 지연이가 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엎드려서 잠을 자거나 공부하는 고3 학생이 가득한 교실 속에서 동건만 다른 세상이었다. 운동장을 가만히 응시하거나 이어폰을 낀 채 세상과 거리를 두는 동건이의 모습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되어 엉덩이를 겨우 걸친 채 긴 다리를 죽 뻗었다. 엎드려 자는 녀석의 웅크린 발에 닿을 것 같았다. 그렇게 늘어진 자세에서 세단을 향해 쫓아가던 순간이 떠올랐다. 동건의 분노가 꽉 쥐고 있는 샤프 끝에 느껴졌다. 차를 잡고 김기환을 끌어내 바닥으로 내팽개치는 상상을 했다. 동건이 죽을힘을 다해 쫓아간 세단 그리고 지연. 수능이 아니라도 동건이가 집중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충분했다. 오늘 아르바이트를 가는 길에 지연이 살고 있는 아데라움 앞으로 돌아서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렇게 하면 지연을 우연히 마주칠지도 모르니까.



종례 후, 지연이 결석한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동건은 지연이 사는 아데라움 쪽으로 하교했다. 신일 아파트로 가는 골목길과는 많이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브런치를 즐기는 카페와 멋진 책들을 파는 작은 서점, 와인 상점과 필기체로 휘갈겨 써진 베이커리 등을 지났다. 신일 아파트와 가까운 곳이지만 동건이 아데라움 근처를 지날 일은 잘 없었다. 정문 앞에 이르러 아데라움의 가장 높은 층을 올려다보았다. 턱이 저절로 하늘을 향했다. 가장 높은 곳에 시선이 닿으니 번쩍거리는 유리창에 빛이 반사되어 눈이 절로 감겼다. 지연은 저 높은 꼭대기 층에 살까? 하는 상상을 하며 아데라움을 지나쳐 모퉁이를 돌았다.



아데라움 모퉁이 뒤 신일 아파트로 가는 골목으로 진입하자마자 동건이 찾던 지연과 마주쳤다. 심장이 멎을 뻔한 동건은 말 대신 눈이 커졌다.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지연은 마치 동건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물었다.


”엇, 너!“


”아. 안녕.“


"우리 집 일부러 지나간 거야? 내가 결석한 게 궁금했구나?"


평소답지 않게 살짝 헝클어진 머리는 여전히 햇빛을 받아 윤기가 흘러 반짝였다.


가느다란 손목을 들어 넋이 나간 동건에게 빨간색 스카치 캔디 하나를 내밀었다.


주저하는 동건이의 손을 들어 직접 손에 스카치 캔디를 쥐어주고 나니 지연의 표정이 바뀌었다.


"나 집 나왔어. 이제 들어가는 길이야."


"뭐?"


"놀랠 거 없어. 벌써 몇 번 집을 나간 적이 있는데 학교를 결석하지 않아서 애들이 몰랐을 뿐이야."


"괜찮....아?"


"음.... 괜찮지 그럼. 며칠 쉬다 온거야. 내일은 학교 갈거야. 지금 집에 들어가니까." 하며 생긋 웃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맑은 웃음이었다.


"비오는 날....... 너..... 맞지? 가게에....."


갑자기 미소가 멈춘 지연이었다.


"미안해. 갑자기 찾아가서. 거기서 일하는거 알고 있었어. 할 얘기가 있었는데... 없어졌어. 신경쓰이게 했네. 미안해"


지연의 검정 눈동자에 눈을 맞춘 동건은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


"......."


지연은 대답 없이 동건의 얼굴을 빤히 볼 뿐이었다.


"그럼 이 전화번호 저장해."


그날 밤 들고 있던 검정색 커다란 우산 손잡이에는 지연의 이름과 폰번호가 쓰인 네인스티커가 있었다. 지연은 스티커를 떼어 내어 동건의 손등에 붙여주었다.


스티커가 잘 붙어진 걸 보고 싱긋 웃은 지연은 동건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녕.“ 하고 바로 돌아서 뛰어갔다.


지연이 보이지 않게 되자 동건은 손등을 확인했다. 스티커를 보니 '서지연' '000-0000-0000'이름과 연락처가 있었다.


지연을 만난 뒤 동건은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더뎌졌다.


집으로 들어서자 동건의 엄마는 퇴근 전에 동건에게 줄 카레를 만들고 있었다. 동건은 자연스레 손을 씻고 엄마 옆에 서서 큰 양파 2개와 당근 반 개를 깍둑 썰기 하였다. 돼지고기를 볶던 엄마는 "고마워." 라고 말한 후 양파와 당근, 감자, 카레를 넣어 휘휘 저었다. 한창 많이 먹을 나이인 동건을 위해 돈까스를 튀기고 그 위에 밥과 양파가 잔뜩 들어간 카레라이스를 넉넉하게 부었다. 동건이를 위한 저녁 식사를 식탁에 간소하게 차린 뒤 엄마는 돈까스가 올라가 있지 않은 카레라이스를 한그릇 퍼서 잘 익은 깍두기와 맛있게 먹었다.


"식기 전에 먹어."


"아직 저녁 먹긴 좀 이른데."


"그럼 뒀다가 해지면 데워 먹어."


"그럴게.“



주말 저녁 김기환이 찾아온 일로 동건은 늦은 밤 엄마가 일하는 병원에 찾아갔고 엄마가 잘 있는 모습을 확인하였다. 늦은 밤에 찾아온 동건을 보고 무슨 일로 왔는지 잘 알고는 있었지만 김기환과 별 일이 없었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엄마도 걱정이 되었지만 동건을 안심시키고 김기환에게 접근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게 과연 가능 한 일일지가 궁금했다. 김기환이 동건에게 집착을 하고 있었다. 자식이 없는 사람이어서 조카에게 집착을 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죽인 형의 아들이어서 집착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기환이 동건을 만나는 것을 막고 싶었던 엄마였다.


"동건아, 작은 아빠가 또 찾아오면 경찰에 신고를 할까?"


경찰에 신고해도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엄마는 동건이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하고 싶었다.


"신고 말고, 나한테 전화해."


책상 의자에 앉아 엄마에게 등 돌린 채였다.


나지막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김기환이 어쩌면 또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히 찾아올 것만 같았다.


김기환의 입장에선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었으니까.


찾아온다면 자신에게 직접 찾아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건은 오기인지 용기인지 모를 힘이 솟아났다.


김기환이 다시는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네가 그 사람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뒤돌아서서 카레라이스 그릇을 씻던 엄마는 설거지대에 그릇을 툭 걸치고는


"우리..... 이사라도 가야 할까?"


엄마가 가꾸는 베란다의 화초들이 반짝거리는가 싶더니 해가 지고 반짝이던 초록잎은 칙칙한 색이 되어버렸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병원에서 나올 수 있어." 엄마는 신발을 신으며 걱정스런 눈으로 동건의 방을 바라보았다.


"집에는 찾아오지 못할 거야. 내가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을걸?" 그러면서 엄마를 데려다주기 위해 신을 신으러 나오는 동건이었다. 동건의 엄마는 됐다고 말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둘이 함께 의지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악마 같은 인간. 인간도 아니지." 라고 말하며 눈물을 슥 훔치며 동건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엄마를 데려다주고 오는 캄캄한 어둠이 내려진 골목을 지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백반집을 지나쳤다. 월요일은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어서 사장님과 눈이 마주치자 먼발치에서 꾸벅 인사를 하니 손을 번쩍 들어 반갑게 인사해주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긴 다리로 휘적 휘적 빠르게 걷던 동건이는 가로등이 밝은 곳 밑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뒷주머니에 꽂혀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어 낮에 저장해두었던 지연의 핸드폰 번호를 검색했다.


지연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날아가는 사진이 있었다. 멀리서 찍은 사진이라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연이 자유를 갈망하는 것을 알게되었다. 지연이 하늘을 날게 된다면 동건이가 본 적 없는 함박웃음을 지을 것만 같았다.


핸드폰을 뚫어지게 보며 주저하다가 동건은 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지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식당 근처."


"기다려. 지금 갈게."


"어? 어."


"뚜뚜뚜뚜...“


전화그 끊어지고 동건은 초조해졌다. 식당 근처라고만 했는데 식당 바로 앞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지연의 집으로 동건이 뛰어가는 게 더 빠를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길이 엇갈릴까 봐 발을 떼지는 못했다. 전화를 다시 할까 싶어 핸드폰을 꺼냈지만 간다는 말을 하고 이내 끊은 걸로 봐서는 뛰어오느라 전화를 받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어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동건은 심각해진 얼굴로 고민을 하며 발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갈팡질팡하였다.


가로등 불빛이 갑자기 밝아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가 싶더니 지연의 얼굴이 동건의 턱 밑으로 훅 들어왔다.


"헉....헉..."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던 동건의 심각했던 얼굴이 밝아졌다.


"헉... 헉... 나 금방 왔지?"


"안 뛰어와도 되는데...."


"알아. 그냥 내가 빨리 오고 싶어서."


낮에 봤던 모습보다 생기 있어진 모습이었다.


"혼나지 않았어?"


"어. 괜찮아. 어차피 한두 번도 아닌걸. 배고프다. 식당으로 가도 돼? "


"어.... 어."


사장님이 여자친구라도 데리고 왔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 걱정이 됐지만 백반집보다 안심되는 곳은 또 없는 것 같았다.


작은 문 안으로 들어서니 손님들이 가득이었다.




"어서오세요! 몇 분이시죠?" 하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장님은 "아이쿠 오늘 무슨 날이야?" 하며 동건을 향해 물었다. 동건과 지연을 번갈아 보던 사장은 얼굴이 밝아졌다.


"같은 학교 친구에요. 친구랑 밥 먹으려구요.“


”안녕하세요?“ 지연은 처음 본 예찬에게 명랑한 톤으로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 동건이 첫 번째 손님이네. 그런데 어쩌지? 지금 예약 손님 5팀 넘게 남아서 그런데 요 앞 카페에서 한 30분 정도 기다릴래? 안에다가 너 좋아하는 거 해달라고 말해놓을게."


지연을 슬쩍 본 사장님은 "아님, 다른 메뉴라도 찾는게 있어?"


지연은 "그냥 다음에 올게요. 배가 많이 고파서요. " 싱긋 웃고는 꾸벅 인사한 뒤 동건의 팔을 끌고 나갔다.


"첫손님인데 미안하게 됐네. 그럼 다음에 꼭 다시 와라. 맛있는 걸 해줄게."


"네. 감사합니다"


사장은 다행히 동건과 지연에게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떤 질문을 해도 기죽을 지연은 아니었지만....


가게 밖으로 나온 지연은 "너 여기서 밥 먹는거 몇 번 봤어. 엄마랑 같이 있는 거."


"그랬구나. 예전부터 자주 왔던 곳이야. 그런데 배가 많이 고프다며? 편의점이라도 갈까?"


"집밥 같은 걸 먹고 싶었는데 아쉽다."


"그럼."


"응?"


"우리집으로 갈래? 엄마가 해주신 카레라이스가 있어. 식었지만 먹을 만 할거야."


동건의 권유에 함박 미소를 짓는 지연이었다.




chapter 4.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거실과 부엌 등을 켰다.


지연에게 식탁 자신의 자리를 권하고 손을 씻은 후 동건은 엄마의 자리에 앉았다.


식탁에는 의자가 하나 더 있었지만 쓰이지 않는 듯 했다.


식탁과 의자는 매끄럽게 질이 잘 들어있었다. 견고하고 튼튼해 보이는 원목 의자는 멋스러웠다. 의자의 반질반질한 좋은 감촉에 자꾸만 손으로 문질러보았따. 지연은 그렇게 어색함을 달랬다.


"보리차 줄까?"


"어. 좋아."


동건은 보리차를 작은컵에 따라 자수로 멋을 낸 티 코스터를 놓고 물컵을 얹었다. 지연의 앞에 놓인 보리차에서 구수한 냄새가 났다. 보리차를 들어 두어 모금 마셔 갈증을 해결했다. 보리차의 구수한 향이 입안에 가득 채워지자


'으음.'하는 소리가 저절로 났다.


보리차에 만족하는 음성에 동건의 입에 미소가 지어졌다.


"마시고 있어, 카레라이스 데워줄게."


카레라이스와 돈까스를 데울 팬에 불을 붙였다. 돈까스를 튀길 작은 팬에 식용유를 따르고 돈까스 두 덩어리를 올렸다. 카레는 덜어서 작은 스튜 냄비에서 약불로 끓였다.


식사를 준비하는 동건의 모습은 익숙해 보였다. 카레라이스 외에도 다른 요리도 왠지 뚝딱 만들어낼 것만 같았다.


지연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낯설고 설레는 기분이었다. 동건은 배가 고픈 지연만을 생각했다. 배고파하는 지연을 위해 빠르게 해결해주고 싶었다.


돈까스를 노릇노릇하게 튀겨 체망에 올렸다. 보글 보글 끓어 오르는 카레라이스의 불을 끄고 넓적하고 우묵한 그릇 두 개를 꺼내 돈까스와 밥을 담고 카레라이스를 먹음직스럽게 얹었다. 가스렌지의 불이 다 꺼지자 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카레라이스를 뜨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보리차를 호로록 마시는 지연에게 카레라이스가 담긴 그릇 하나를 건넸다. 식탁에 엄마가 두고 간 그릇은 랩으로 덮어 냉장고에 넣었다. "내일 아침에 내가 먹으면 돼."


지연은 낯선 집에서 처음 앉아보는 식탁이었지만 동건이 앞에 있어서인지 편안함을 느꼈다. 지연은 동건이 건네주는 그릇을 받아들었다.


"이렇게 잘 할 줄은 몰랐네. 고마워."


"있던 걸 데워주는 건데 뭘....."


"아주 익숙해보였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네. 카레도 이렇게 예쁘게 담은 걸 보면 요리도 잘할 것 같아"


지연의 칭찬에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동건은


"먹어." 라며 다정하게 그릇을 지연 쪽으로 더 밀어주었다.


"잘 먹을게."


눈을 반짝이며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지연은 돈까스와 카레라이스를 맛있게 먹었다. 카레가 적당히 묻은 돈까스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는 “으음....! 진짜 맛있다.”라며 감탄하였다.


카레와 돈까스를 깨끗이 비워냈다.


보리차까지 꿀꺽꿀꺽 마신 지연은 "이야. 정말 맛있었어." 라며 배를 두드렸다.


배를 두드리는 모습에 웃음이 터질 뻔 한 동건은 맛있게 카레라잇를 잘 먹어준 지연이 이전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같은 학교 여자 아이를 집에 데려오다니..... 배가 부른 동건은 뒤늦게 자신의 용기에 웃음이 났다.


피식 하고 웃자 지연이도 피식 하며 같이 웃었다.


"걱정돼서 전화했어. 또 집을 나오진 않을까 해서."


"네 전화 오니 기쁘더라. 내가 먼저 전화할 뻔 했잖니."


"내 번호도 모르는데?"


"알아. 일전에 차 문에 부딪힐 뻔한 날 알아봤었어. 폰번호 알고 있는 애가 몇 없더라? 그래서 애먹었어."


"주로 혼자 지내서. 친구가 별로 없어."


"알아. 그래서 더 좋아."


"응?"


"좋다구."


"아, 음....."


동건이 지연의 컵에 보리차를 더 따랐다. 보리차를 마시는 머그잔 위로 동그랗게 웃는 눈꼬리가 보였다.


"집까지 데리고 오기 어려웠을텐데. 맛있는 밥 대접해줘서 고마워. 가출했던 일로 밥 먹기 편하지 않아서 학원가는 척 저녁 안 먹고 나왔거든."


"집은 왜 나온거야? 주말에는 어디에 있었고?"


"자세한 건 말하기 부끄럽네. 언젠가 용기가 나면 말해줄게..."


식탁에 마주 앉은 둘은 눈을 맞췄다. 동건은 지연이 어떤 사정이 있어서 집을 나갔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자신을 보고 있는 지연의 눈이 어쩐지 슬퍼보였다. 반항하는 마음에 집을 나가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걱정이 되었다.


지연은 동건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에 동건과 엄마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을 때 정말 보기 좋았다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지연이 종알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가자 동건은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지연의 맑은 눈망울과 즐거운 이야기들이 몽글몽글해져 동건의 가슴을 자꾸 건드렸다. 컵을 쥐었던 지연의 손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매끄러워 보이는 머릿결과 하얀 손이 자꾸만 동건의 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말투로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 지연을 보면서 자연스레 눈웃음이 지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지연 또한 편안한 마음이었다. 동건의 앞에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것이 즐거웠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인지 시간이 금방 흘러가는 듯 했다.


9시가 넘도록 식탁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건과 지연은 서로 말하지 않는 순간에도 서로에 대한 마음이 흘러넘쳤다.


지연을 보는 동건이의 눈빛에는 따뜻함이 가득했고 동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지연의 억양은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매력적인 지연이 눈앞에 앉아 자신이 해 준 밥을 먹고 보리차를 홀짝 거리며 생글생글 웃는 모습에 동건은 전에 없던 감정을 느꼈다. 지연이 밤늦도록 자신과 함께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시 30분이 되자 지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연은 동건을 한 번 보고는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댄 뒤


"네. 알겠어요." 핸드폰 너머의 사람에게 대답을 했다.


가야 할 시간이었다.


지연은 자신이 마신 컵을 씽크대 안에 갖다 놓았고


"오늘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라며 인사했다. 외투와 핸드폰, 가방을 챙겨 들고 신발을 신자 동건도 외투를 집어들었다.


"데려다줄게."


"혼자 갈 수 있어."


"요즘 이상한 사람들이 좀 있어서...."


"응."


동건은 지연과 나란히 걸으며 아데라움까지 이어진 골목을 걸어갔다. 캄캄해진 골목 가로등은 누런빛을 내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 동건과 지연의 그림자가 보였다.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자 동건은 지연의 손을 잡았다. 지연의 손은 주먹을 쥐게 만들고 자신의 큰 손으로 지연의 손을 덮었다. 지연은 동건을 한 번 쳐다보고는 따뜻한 동건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겼다.


동건은 말없이 손을 더 꽉 쥐었다.


지연은 그런 동건을 보고 싱긋 웃었다.


"나는 네가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나봐."


"차 문 열었을 때?"


"아아니. 사실은 그 전부터야."


"그전에 어떻게 만났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런 게 있어." 하며 웃는 지연을 보고 동건을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어색하게 시선을 앞으로 바꿨다.


지연의 웃음은 마약 같았다. 지연의 웃음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동건은 지연의 티 없는 미소를 자꾸만 보고 싶었다.


동건은 얼굴을 돌려 지연의 볼록한 이마와 작게 솟은 코 그리고 몇 가닥 앞으로 나온 앞머리가 흔들거리는 것을 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가득한 눈망울에 속눈썹이 누런빛 가로등 밑에서도 잘 보였다. 머리카락을 따라 내려가 어깨부터 이어진 지연의 손이 동건의 손안에 있었다. 자신의 큰 손안에 쏙 들어와 있는 지연의 손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두 사람이 손을 잡은 모습이 가로등 불빛에 그림자가 되어 점점 키다리로 변하였다. 지연의 손은 차가웠지만 이내 따뜻해졌다. 말랑한 손 가운데 조그마한 손가락들이 오목조목 들어차 있는 것이 신기했다. 동건은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손가락의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아데라움이 있는 대로변으로 나오자 지연의 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리릭 휘날렸다. 차들이 속도를 내고 달리면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동건이 지연과 도로 사이에 섰다.


"들어가. 위험하니까 집 나오지 말고. 혹시 나오면 연락하고."


"왜, 재워줄거야?"


"아. 아니. 지금처럼 데려다줄거야."


"흐흐, 그럼 잠깐이라도 보겠네."


눈꼬리로 웃음을 만드는 지연이었다.


“오늘 너무 즐겁고 행복했어. 조심해서 가. 또 전화가 올 것 같아서 빨리 가야겠다. 안녕!”


지연은 아데라움 정문으로 뛰어 들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내일 학교에서 봐."


"어."하며 동건도 어색하게 살짝 손을 흔들었다.


건물 안으로 지연이 들어가자 동건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지연의 웃음이 전염이 된 것 같았다.


지연의 손을 잡았던 느낌이 동건의 손에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보드랍고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이 감촉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씁쓸하게 자신의 손가락을 호주머니 안에서 살며시 매만져보다 머쓱해하는 동건이었다.


도로의 많은 차들은 동건의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관심 없다는 듯 더 빠르게 지나갈 뿐이었다. 동건은 가슴이 벅찼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동건이 처음 가져보는 감정이 어색했지만 행복했다. 지연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된 것 같았다. 한껏 젖어버린 감정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가슴을 괜스레 한 번 쓰다듬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골목쪽으로 방향을 바꾸려 할 때 건널목 앞에 서 있는 사람들 뒤쪽으로 비상등을 켜고 정차하고 있는 익숙한 세단이 눈에 확 들어왔다. 차 안에 있는 사람이 계속 보고 있었던걸까?


동건이의 가슴이 빨리 뛰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을 찌푸렸다. 짙은 썬팅이 된 차 안은 사람의 실루엣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차를 향해 쏜살같이 달렸다. 집에서 보았던 차와 같은 차다. 뒷번호 두 개는 1로 언뜻 보였었는데 같은 번호가 맞는 것 같았다. 더 빨리 달려 차량 번호를 확인했다. "9311" 동건이가 차 번호를 확인하는 동안 세단이 비상등을 켜고 움직였다. 이번에야말로 꼭 세단 문을 열어 누가 타고 있는지 확인해야겠다는 마음에 많은 신호등 앞의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차 앞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동건이 손을 뻗어 잡으려던 차는 ‘부릉’ 소리를 내며 동건의 앞을 스르륵 지나쳐갔다. 동건은 차를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땅을 박차고 차를 향해 돌진했다. 갑자기 신호등이 파란불이 되어버리는 통에 동건은 차를 놓치고 말았다. 길을 건너려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니 차가 멀리까지 가버린 것이 보였다.


“하아!”


허탈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코앞에 있었는데 잡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썬팅이 새까맣게 되어 있어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으나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김기환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자신을 그렇게 매섭게 노려볼 사람. 동건을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만한 사람은 김기환 그 사람밖에 없었다. 내 아빠를 죽인 살인자. 우리 가족을 박살 낸 악마. 19살 동건은 주먹을 꾸욱 눌러 쥐었다. 뒷덜미에서는 땀 한줄기가 흘렀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 악마 때문에 다시 울긴 싫었다.


악마의 장난질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지만 지연까지 지켜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9311‘ 굳이 어딘가에 적어놓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숫자 네 개를 되뇌었다.


“구. 삼.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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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늦게 퇴근하는 아침이었다. 지연을 만날 생각에 동건은 일찍 일어나 냉장고에 넣어둔 카레를 데워 먹고 등교했다. 학교 교문에 느긋하게 들어서자 지연이 등교하는 모습이 보였다. 교문에서 학교 건물로 이어지는 기다란 화단 길에서 지연이 뒤돌아 동건을 확인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이 보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동건은 지연이 손을 흔들어준 것이 반가웠다. 동건을 미소 짓게 하는 지연이었다. 동건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 손을 살짝 흔들자 지연이 “꺄르르“ 웃는 소리를 내었다. 손을 흔든 동건을 향해 환하게 웃던 지연이 친구들을 향해 앞으로 뛰어갔다.


가볍고 상쾌한 발걸음이었다. 어제 집으로 들어간 후 별일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어서 다행이었다. 지연의 부모님에게 혼나는 것보다 김기환 때문에 염려스러웠다. 확실치 않은 이야기를 지연에게 해서 불안감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지연이 김기환과 만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온 학교 분위기는 어딘가 어수선했다. 수업보다는 자율학습 분위기가 되었고 수능 최저를 맞춰야 하는 아이들이 이어폰을 낀 채 마무리 수능 공부에 매진했다. 예민해진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들도 되도록 3학년 교실 근처에 오지 않았다. 1, 2학년들도 3학년이 있는 3층은 접근이 차단된 것 같았다. 수능에 관심이 없는 동건은 자율학습을 하는 아이들을 뒤에서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동건은 고등 졸업 후 곧 군대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기환이 자주 눈에 띄는 한 엄마를 두고 입대를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지 않았다. 이사를 하는 것이 좋을지, 일을 구해서 당분간 분위기를 지켜보는 게 좋을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사실 김기환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었다. 지연. 지연의 얼굴을 떠올리니 입대 생각이 멀어졌다. 하지만 지연은 대학을 입학할 것이니 동건과는 다른 생활을 할 것이고 만나는 일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힘이 빠졌다. 지연과는 다른 자신의 선택이 처음으로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대학 입학 시즌이 오기 전에 김기환을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 일단 동건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동건은 김기환이 아빠를 죽인 사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고 그를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분노가 이제 조금은 나아지려 하는 때, 동건의 마음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자신의 죄를 반성도 하지 않는 김기환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심이 넓은 아빠를 닮은 동건이었지만 오직 한 사람 김기환만은 예외였다. 김기환이 사죄하거나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후회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사죄할 마음이 없다면 동건의 복수가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김기환이 끈질기게 동건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면 사정이 달랐다. 평화로운 동건의 마음에 불씨를 당겼다. 지금처럼 엄마와 단둘이 조용히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면 동건은 잠자코 있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아빠를 죽인 사람이었다.


알라바이를 대고 경찰의 수사망에서 빠져나왔지만 그 말고는 잠복 수사 중이돈 아빠가 갑자기 교통사고가 날 리가 없었다. 동건은 갑자기 상실감을 느꼈다. 자신이 아직 고등학생이고 힘과 부를 가진 김기환을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동건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지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조심하기를 당부해야 했다. 엄마가 일하는 병원까지 자주 동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기환이 동건에게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 했다. 엄마가 동건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이 있는지 혹은 어떤 오해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가 없는 빈자리를 동건이 더 많이 채우고 싶었다. 아빠가 하늘에서도 안심하도록 동건은 더 빨리 커야만 했다.



하교 시간, 교문에서 지연이 안전하게 제네시스를 타고 가는 것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동건은 아르바이트 하는 백반집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탓에 이제 막 브레이크타임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동건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사장님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서와. 급식은 많이 먹었니?"


"네. 배고프지 않아요."


"그래. 옷 갈아입고 기다리면 이따가 1시간 뒤에 식재료 들어오니까 부탁한다."


" 사장님, 어제는 갑자기 찾아오게 됐어요. "


"그래. 아주 예쁘고 밝은 친구던데 다음번에는 미리 얘기하면 꼭 한 자리 비워놓을게. 식사도 못 하고 가서 걱정됐어."


"집에 가서 먹었어요."


지연을 집에 데려갔다는 얘기를 갑자기 하게 되었지만, 사장님께는 이런 얘기까지 해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동건은 엄마에게도 숨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카레라이스가 더 특별했겠구나. 배부르게 먹였다니 마음이 놓이는데? 여자친구 맞지?"


"아. 네, 아마도...... 저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요."


"그래 아주 잘 어울려서 눈을 뗄 수 없더구나. 잘 대해줘."


"네. 그럴게요. 그럼,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사장님은 런치 타임 때 휩쓸고 지나간 식당을 빠른 손놀림으로 정리하고 조리실로 들어갔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서. 수저를 챙겨 들고 점심을 먹으려던 예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옷을 갈아입은 동건은 30분쯤 일찍 도착한 트럭에서 많은 재료를 내리고 정리했다. 큰 양파망과 파, 감자, 무 등을 내리고 재료를 다 다듬어 스테인레스 통에 잘 담아두었다. 칼질이 익숙해진 덕에 이전보다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쓰레기들을 정리하고 테이블과 식탁 의자에 소독 스프레이를 뿌려 기름때와 냄새를 깨끗하게 제거했다. 정리하고 뒤돌아보니 각 잡힌 테이블과 의자들이 아주 깨끗했다. 일을 하면 할수록 성취감이 느껴졌다. 머뭇거리는 시간 없이 동건은 다시 청소 도구를 가지러 다용도실로 향했다. 5시 저녁 장사 전, 식당 손잡이와 유리창 등을 닦고 있던 동건에게 사장이 다가와 식탁 의자에 하나 내어 털썩 앉았다.


"일을 좀 더 많이 하면 어떻겠니? 분점을 하나 더 낼 생각이야. 내년에 성인이 되면 오전부터 나와서 밤까지 더 신경 써 주었으면 해. 나는 20분 거리에 있는 분점을 좀 신경 써야 하니 말이야. 아직 네가 어리다는 건 아는데 너같이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이 없어.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 말이야. 물론 앞이 창창한 너한테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큰 부담을 준다는 건 아는데 너 말고는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가 없어. 대학교에 갈 생각이 없다면 내 밑에서 식당일을 처음부터 배워보는 게 어떻겠니? 서빙과 청소 외에도 식당 운영까지 말이야.”


"이 가게 운영을 맡기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말하자면 그런 거지. 하지만 이건 엄격히 비즈니스의 관계여야 해. 내가 너를 두고 어떤 시험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긴 시간 맡기면서 운영에 적합한지도 알고 싶기도 해. 사실은 너를 다른 곳에 뺏기는 건 싫구나. 20살짜리 앞날을 막는 것 같아서 많이 망설였어. 지금은 학생이라 더 길게 일을 시키기 힘들었지만, 내년부터는 너도 20살 성인이지 않니?"


"네. 저도 제 일을 갖고 싶어요."


"음. 그렇다면 조금은 마음이 일치했다고 생각해도 되겠니? 너의 엄마에게는 이전에 물어본 적은 있었어. 엄마는 네 의견이 중요하다 하셨지."


"네. 엄마는 제가 뭘 하든 반대하시지 않으세요. 대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한 것도 존중해주셨고요."


"대학교는 정말 가지 않을 생각이구나. 뭐 그렇다면 내 사업 확장에는 더 좋겠지만 네 개인의 사정이라면 나는 좀 더 생각이 다를 것 같은데 말이지."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요. 빨리 제 일을 갖고 두 발로 똑바로 서고 싶어요."


"음. 네 의지가 확고하다면 언제고 네가 원할 때 하고 싶은 일이나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도 너에게 좋은 공부가 될 거야. 그럼, 내년부터 이곳을 너에게 일임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도 되겠니?"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서로 잘해보자.“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두 발로 오롯이 서는 것이 목표인 동건에게 매우 좋은 제안이었다.


동건은 엄마와 지연에게 오늘은 9시까지 일이 있다고 문자를 하고는 조리실로 들어가서 메뉴 만드는 것을 꼼꼼히 배워보기로 했다. 사장이 시키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가게를 운영한다면 메뉴를 조리 실장님보다 더 잘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김기환에게 대적하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 독립하고 싶었다. 재료를 꼼꼼히 살피고 조리 실장님이 알려주는 대로 같은 메뉴를 여러 번 만들어보았다. 성실한 동건을 아껴주는 조리 실장은 동건에게 레시피를 알려주었다. 동건이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손님에게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내자 마스크를 낀 조리 실장님의 얼굴에 눈웃음이 지어졌다. 저녁 손님들이 들이닥치고 대기 손님이 금방 15번, 30번까지 늘었다. 40번이 넘어가면 식당 마감 전에 식사를 마칠 수 없어 41번부터는 대기를 받지 않기 위해 키오스크에 '대기 순번 마감'이라는 표시가 떴다.


정신없는 3시간이 지나고 8시 반 마지막 손님들이 9시에 가게를 나서자 조리 실장님까지 나와서 꾸벅 90도로 인사를 하며 하루를 마감했다. 동건은 가게 문을 활짝 열고 음식 냄새를 내보냈다. 바닥과 테이블이 끈적거리지 않도록 열심히 행주질과 걸레질을 하고 바닥을 꼼꼼히 청소했다. 식기들을 모조리 애벌로 설거지를 하여 식기세척기로 보냈다. 세척기의 설거지가 끝나자 뜨거운 스팀이 조리실에 가득 찼다. 뽀득해진 식기들을 보니 하루를 열심히 살아낸 보람이 느껴졌다. 조리 실장님과 예찬은 다음 날 식재료 주문 오더를 넣고 직원들을 보냈다. 예찬은 동건에게 가게 마감을 가르쳤다.


"졸업 전까지는 일주일에 한 번 마감하고 가면 어떻겠니?"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네가 오후에 연습한 메뉴들이다. 집에서 먹어보고 부족한 게 뭔지 더 잘 파악해오고."


사장은 동건이 연습한 음식들을 잘 싸서 들려주었다.


"감사합니다."


"고생 많았다. 모레 보자."


"안녕히 계세요."


손을 슬쩍 들어 사장이 인사를 하고 동건이 집으로 가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가게 간판 불이 꺼졌다.


포장 비닐 안에서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겼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일을 했기 때문에 음식 냄새를 맡자 갑자기 허기졌다.






chapter 5.




개운하게 씻고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식탁에 앉은 동건은 포장된 음식을 까서 입에 넣었다. 동건의 수저가 빠르게 움직였다. 숟가락을 든 손등을 내리자 포장 음식 봉투에 종이가 보였다. 사장님이 동건에게 남긴 메세지였다. 밥을 크게 한 술 퍼서 입에 넣고 계란말이까지 입안에 밀어 넣고는 종이를 다시 살펴보았다. 동건이 20살이 되어 가게를 맡게 된다면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9시 30분까지 일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하루에 11시간, 화요일을 제외한 주 6일을 일하고 4대 보험 가입, 주휴수당, 성과급, 명절 수당까지 꼼꼼하게 적혀있었으며 3년 동안 월 400만원을 받는 상세한 월급 내역이었다. 월급을 꼼꼼히 계산 한 목록 아래에는 3년 안에 현재보다 더 많은 매출을 올리면 7:2로 동건이가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고 가게에 대한 책임과 권한을 넘긴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머지 1의 배분은 취약계층이나 아픈 아이들을 돕는 것에 기부하도록 하였다. 동건은 마지막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자신이 이익을 70%나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지금도 손님이 많은 백반집에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동건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사장님은 20살짜리 동건이를 이토록 믿어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답을 알 것 같기도 했다. 불가능해 보일 때 포기하지 않고 부딪혀 보는 성격. 예찬은 동건을 잘 알고 있었다. 동건이는 타오르는 열정을 느꼈다.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고 여겼다. 사장님이 주신 기대보다 더 많이 보답하고 싶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찼다. 동건은 자신이 요리한 음식의 맛을 제대로 느껴보기로 했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는 무엇이든다 맛이 있기 때문이었다. 맛을 음미하고 보니 조리 실장님이 만든 것보다 김치가 조금 덜 익은 것이 느껴졌고 계란말이의 부드러움이 떨어졌다. 계란말이에 들어가는 파의 맛이 더 살아나면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내일 계란말이에 들어갈 파를 좀 더 추가해보거나 파의 줄기 부분을 추가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동건은 벌떡 일어나 책상에 있는 노래 가사가 잔뜩 들어있는 수첩을 꺼내 방금 생각난 것들을 빠짐없이 적었다. 밥을 다 먹고 식탁 정리를 마친 동건은 핸드폰을 들어 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원 수업이 아직 마치지 않은 건지 지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병원에 있을 엄마에게 식당에서 음식을 받아왔으니 내일 아침 퇴근을 하면 늦잠을 주무시라 문자를 넣었다. 엄마는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고생했으니 푹 쉬라는 답장을 보냈다.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이 그제야 느껴졌다. 동건은 드라이기를 찾으러 욕실로 향했다.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되었고 머리카락까지 말리면 개운할 것 같았다.


그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띵동 소리가 끝나자 시계가 째각째각 돌아가는 소리 말고는 정적이 흘렀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10시 10분이었다.


"띵동"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 문이 열리지 않아 답답한 현관문 너머의 마음이 느껴졌다.


"누구세요?" 라고 동건은 현관문 앞에 서서 크게 물었다.


"김기환."


동건이 문을 벌컥 열었다.


김기환이었다. 양복을 입은 김기환이 동건을 쳐다봤다. 양복 안 셔츠 맨 위 단추 하나는 열려있었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 꽂고 있던 김기환은 동건을 쳐다보면서 고개만 ’까딱’했다. 집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김기환은 코트도 없이 복도식 아파트의 차가운 한기에 어깨를 움츠렸다.


"누구 맘대로 이 집에 온 거야? 찾아오지 말라고 분명히 얘기하셨을 텐데?”


날이 선 말투였다.


죽여버리겠다는 말 같았다.


"네 엄마가 그렇게 이야기하든? 나는 대답 안 했어. 널 만나기 전까지는 계속 찾아올 거였으니까. 네 엄마와는 할 얘기가 없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면서 동건의 협박 같은 말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다시 고개를 ‘까딱‘ 거리면서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님, 네가 내 차에 같이 가던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김기환과 이 악연을 끊고 싶었다. 죽이던지 죽던지 결판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갈게요. 차로."


문을 쾅 닫았다. 김기환이 현관문에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닫자 김기환을 한 대 갈기지 않고 참은 것이 분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까지 악마 같은 사람이었다.


보리차를 한 잔 따라 마셨다. 잔을 씽크대에 내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힌 동건은 가벼운 외투를 꺼내입었다. 지퍼를 잠그며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보았다.


’오늘이야. 오늘 반드시 끝장내야해.‘


신일아파트 주차장이 아닌 골목이었다. 그곳에는 동건이 어제 보았던 차가 있었다. '9311'


차에 타기는 싫었지만, 김기환이 집에 들어오는 것은 더 싫었다.


뒷좌석 문을 두드리니 김기환이 타라고 손짓하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문을 열고 뒷좌석에 김기환과 나란히 앉으니 운전석에 있던 사람이 문을 닫고 내려 차에서 멀어졌다.


"드디어 만났군."


"왜 나를 찾아오는 거야? 아빠를 돌아가시게 만든 살인마."


손이 부들거렸다. 공포가 아니라 분노 때문이었다.


"네 아빠를 죽인 건 내가 아냐."


이 말을 예상이나 한 듯 동건은 코웃음을 쳤다.


"달라진 건 없어. 직접 사고를 내지 않았더라도 사주를 했던지 죽음으로 몰고 간 건 당신이거든."


김기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아? 아무리 아니라고 얘기해도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 법이야."


악마 같은 교활한 눈빛이 이글거렸다. 살인마의 눈빛이었다.


"내가 널 찾아오는 이유는 내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널 위한 것이기도 해.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지만 사실이 그래."


"살인자랑 관련된 증거물 따위가 집에 있는 줄 아는 건 아니고?"


"증거물은 없어. 이미 네 아빠가 사고 날 다 사라졌거든. 네 아빠가 돌아가신 날 내 목숨줄도 같이 사라진거야."


"잘못한 일이 많으니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겠지"


"내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너도 같이 노리고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


김기환의 사실이라면 어서 빨리 김기환의 목숨줄을 틀어쥐고 지옥으로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했다.


"난 잘못한 일이 없어서 노리는 사람도 없어. 나를 이 일에 엮어서 곤란하게 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악마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도 않아. 또 한 번 흔들어놓으면 내 목숨을 걸고 당신을 죽이고 내가 죽을 거야."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잘 들어. 네 아버지가 나를 조사하면서 건드리지 않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어. 너랑 나는 한배를 탄 거야. 명심해. 네 주변에 나와 너를 함께 날려버리려는 사람이 있어."


"밤늦게 찾아와서 하려는 이야기가 겨우 이런 협박이야? 마지막으로 말하니까 잘 들어. 다시는 찾아오지 마. 아빠의 명예를 걸고 악마를 찢어버릴 거야." 강한 어조의 마지막 문장에 섬뜩한 경고장이 담겨있었다.


김기환은 더 말하지 않았다.


차 문을 닫고 내린 동건은 김기환이 안에서 자길 보고 있든 말든 상관없이 언제든 죽여버리겠다는 느낌의 눈빛으로 다시 한번 노려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동건은 기운이 빠졌다. 악마에게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지 말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김기환이 증거물을 요구하진 않았다. 다만 김기환과 동건을 함께 누군가 노리고 있다는 것은 믿을만한 정보가 되지 못했다. 김기환이 여러 사람의 원한을 사고 있으니 그중 누군가가 김기환을 노릴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학생인 동건을 왜 노린다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김기환이 동건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아빠를 죽인 범인이 자신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것은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차에 가서 얘기를 듣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는 경고를 했으니 동건이 하고 싶은 얘기는 한 셈이었다. 김기환의 눈빛과 비양심적인 행동은 끝까지 경멸하고 싶었다. 아빠의 동생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는 살인마이고 비열한 악마였다.


띠링. 하고 문자가 오는 소리가 났다.


'집에 도착했어. 학원 수업이 이제 막바지라 오래 걸렸어. 자고 있어?' 지연의 문자였다.


'아니 아직.. 피곤하지?'


“띠리리링!”


답문 대신 전화벨이 울렸다.


"아직 안 잔다고 해서 전화했어. 괜찮지?"


"어. 괜찮아. 식당에서 늦게 마쳤어."


"보고 싶다.“


지연의 한 마디에 동건의 가슴이 뛰었다. 베란다를 통해 김기환이 돌아간 것을 확인하였다.


"......."


"왜 대답이 없어?“


"지금 보러 갈까?"


"응. 나 편의점 간다고 하고 잠깐 나갈게. 편의점 가는 골목에서 만나"


"5분 내로 갈게."


전화를 끊고는 같은 외투를 입고 집을 나섰다.


김기환을 만난 골목을 지나 지연의 집 근처 편의점으로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편의점은 골목 가장 끝 모퉁이에 있었다. 번쩍거리는 아데라움이 있는 큰 대로변 바로 옆이었다.


지연은 편의점 에어컨 실외기가 있는 곳에 서 있었다. 추운지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였다.


지연을 발견한 동건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어 지연을 와락 안아버렸다.


오늘 있었던 일을 지연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동건을 발견하고 방긋 미소 짓고 있던 지연은 동건의 기습적인 포옹에 놀라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지연은 동건의 허리에 양팔을 감싸 꼭 안았다.


"보고 싶었어."


사실 별일 없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연이 그리웠던 자신의 감정이 불쑥 먼저 나와버렸다.


"와......! 김동건이 보고 싶다는 말을 다 하는구나."


포옹을 풀지 않은 채 동건은 지연의 머리통을 가슴에 감싸안았다.


동건의 품에 파묻힌 지연은 가슴이 마구 뛰었다. 동건의 가슴이 따뜻했다. 지연이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다정하게 안아준 덕분인지 지연은 동건의 허리에 두른 팔을 풀고 싶지 않았다.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지연의 힘이 느껴지자 동건은 지연의 머리통을 더 깊게 안아주었다.


김기환이 불러온 불안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오늘 많은 일이 있었던 동건에게 지연은 빛과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지연을 안을 만큼 지연에 대한 마음이 커졌다.


지연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줄 것 같았다. 지연을 볼 수 있다면 오늘보다 더 험한 일도 담담히 겪어낼 것 같았다. 지연과 눈을 맞추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잊어졌다.




사귀자는 말도, 좋아한다는 말도 제대로 한 적 없었지만 그런 말은 필요가 없었다. 동건은 지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공부하느라 힘들었겠네. 학원은 다닐만해?"


"의미 없는 시간이야. 학원에 가지 않으면 집안 분위기가 안 좋아지니까 가긴 해야 하고. 그 시간에 너랑 있으면 참 좋겠다." 라며 웃는 지연이었다.


왠지 모르게 슬픈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꼭 미래가 불안한 사람처럼.


동건은 지연의 손을 주먹 쥐게 만들고 가만히 감싸 쥐었다.


"편의점에서 뭐라도 먹을래?"


"그래. 따뜻한 라떼 하나 사서 마시자."


라떼를 하나 사 들고 나와 둘은 동건이 사는 신일아파트 쪽으로 걸었다.


뜨거운 라떼를 호호 불어서 한 모금 마신 지연은


"음, 맛있다. 너랑 있으니 더 맛있네."


매력적인 미소로 동건은 답해줬다.


"동건아, 너는 커피 안마셔?"


"커피를 마셔본 적은 있어. 보리차를 주로 마시니까 커피는 잘 안 마시게 되네."


"보리차...... 너네 집 보리차 진짜 맛있었어. 그리고 카레라이스도."


"잘 먹으니 예쁘더라."


눈웃음을 지어보인 지연은 라떼를 홀짝 마셨다.


신일 아파트 주차장에 접어들었을 때, 경원을 마주쳤다. 동네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경원은 지연을 알고 있었다.


"우왁, 왜?"


하며 경원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지연과 동건의 손에 시선이 꽂혀있었다.


동건은 지연의 손을 더 꼭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비키라는 신호를 했다.


"시끄러워, 인마. 집에 들어가."


"김동건이 3학년 5반 서지연을 사귀다니! 믿을 수가 없는 장면이야." 라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경원이 하는 행동을 보고 지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생기 있는 얼굴에 웃는 인상의 매력적인 지연은 자연스레 시선이 모이는 사람이었다.


까만색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웃음소리와 함께 흔들렸다.


경원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날 알고 있다니 고맙네. 다음에는 좀 더 길게 보자. 오늘은 늦어서 이만."


경원이 보고 있는 걸 알았지만 잡은 손은 풀지 않은 채였다. 동건은 지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지연을 데려다 줄 생각으로 지연의 어깨에 손을 올려 방향을 바꾸어주었다.


입을 벌리고 쳐다보던 경원은 손으로 벌린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맙소사!"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흔들며 아파트로 들어갔다.


미소를 띠고 있던 지연은 손을 빼서 주머니 안에 든 동건의 손에 조심스레 깍지를 꼈다. 동건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지연의 손가락 사이로 지나갔다.


동건은 손에 땀이 나는 듯했다. 동건의 손가락 사이에 지연의 손가락이 빈틈없이 채워졌다. 손가락 사이에 느껴지는 감각에 머리카락까지 반응했다. 모든 감각이 섬세해졌다.


깍지낀 손 하나에 동건에게는 발가벗겨진 아이처럼 모든 것을 다 보여준 것 같았다.


동건은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발가벗겨진 손을 꺼냈다. 눈이 마주치자 지연의 손에 쥔 라떼를 빼앗아 들었다.


자유로워진 지연의 손이 그대로 동건의 어깨 위로 올려 감쌌다.


지연과 몸이 밀착되자 동건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하!"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지연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지연의 손목이 동건의 목을 부드럽게 감쌌다.


동건의 눈동자에 지연의 향한 마음이 새겨졌다.


"내가 너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점점 더 커져. 얼마나 너와 함께 있고 싶은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야."


볼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진지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떨림이 전해졌다.


떨리는 손을 지연의 손으로 덮어주었다.


지연의 볼을 감싸ᆞ간 손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 순간, 지연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조용하고 깜깜했던 골목이 지연의 벨소리로 흔들렸다.


지연은 얼굴이 찌푸려졌다.


재빨리 핸드폰을 낚아채어 전화를 받았다.


"네."


핸드폰에서 높은 언성이 들렸다.


"알겠어요, 지금 들어가요.“


힘없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집?"


"응....."


"빨리 가자. 데려다줄게."


"다 왔는데 뭘. 얼른 가. 나도 뛰어갈 거야. 내일 학교에서 봐."


동건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지연은 까치발을 하고 동건의 목을 한 번 꽉 껴안고는 뛰어갔다.


잠이 덜 깬 사람처럼 동건은 멍했다.


지금 있었던 일이 현실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꿈같은 일들이 왔다가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동건은 정신을 차렸다.


입술에 감촉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꿈이 아닌 듯 했다.


손가락 사이에 느껴졌던 부드러운 손의 감촉도 그대로였다.


가슴 안쪽이 부르르 떨렸다.


잊을 수 없는 느낌이었다.


이런 게 사랑인 걸까? 알 수 없는 이 커다란 감정에 동건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지연이 뛰어간 방향을 바라보며 동건은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잠시 서 있었다.


아데라움 꼭대기가 화려한 빛을 내고 있었다. 지연은 그 화려한 빛 가운데로 사라졌다.


가슴이 뜨거운 듯 아린 느낌에 손을 갖다 대어 어루만졌다.


동건은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






chapter 6.




아데라움 꼭대기의 조명이 꺼졌다.


오전 7시. 동건이는 등교를 위해 벌떡 일어났다. 엄마가 퇴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다.


동건의 엄마는 부엌에서 동건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해도 되는데. 가서 잠 좀 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기다렸어. 먹으면서 들어."


"그럼, 양치하고 세수 먼저 하고 올게요."


머리까지 감고 개운한 얼굴로 식탁에 앉은 동건의 머리를 엄마가 수건으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된장찌개를 작은 그릇에 담고 밥과 장조림, 멸치볶음과 계란프라이 등을 한 접시에 수북하게 담아 동건에게 건네었다.


아침부터 밥과 찌개, 반찬을 맛있게도 먹어 치우는 동건을 보는 엄마의 표정은 평소답지 않았다


밥을 먹다 엄마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동건은 수저를 놓았다.


"병원에 무슨 일 있어?"


"아니, 병원 말고. 너."


"나? 김기환 다녀간 것 때문에 걱정하는 거야?"


"차에 타서 얘기도 했다며? 집에는 안 들어갔다고 하던데 너 괜찮은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김기환이 또 찾아왔어?"


"아침에 퇴근길에 기다리고 있더라. 자기가 위험하대. 그리고 너도."


"나도 그 얘긴 들었어. 자기 잘못도 없다고 한 인간이야."


"나도 알아. 근데 뭔가 이상해. 너까지 위험하다고 하는데 꼭 진짜 같은 거야."


"위험한 일에 엮인 적 없어."


"알지. 그런데 네 아빠 동생은 위험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마음이 안 놓여."


"내 몸은 내가 잘 지켜. 그 정도 체력은 돼. 걱정하지 마."


"어떤 일이라도 생기면 꼭 말해주기다? 그리고 주변 잘 살피고."


"그럴게요."


"난 남편을 잃어봤잖아. 아들까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어떻게 널 지켜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엄마를 지켜야지. 엄마도 출근길 퇴근길에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다니고. 당분간 조심했으면 좋겠어."


"그래. 널 안심시키려면 나도 조심할게. 밥 먹어.“


김기환이 동건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준 이상 엄마가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동건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 멀리 안전한 곳으로 보낼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어제의 소용돌이 같은 감정이 낯설었는지 동건은 아침부터 허기가졌다.


지연을 생각하는 마음이 새롭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자신이 먹은 그릇과 수저, 컵을 씻던 동건은 방으로 들어가는 엄마를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여자친구가 생겼어. 내가 많이 좋아해.“


고무장갑을 낀 채였다.


"여자친구?"


"같은 학교 친구야.“


고무장갑을 탈탈 털어 집게에 야무지게 걸어놓고는


”우리집에도 한 번 다녀갔어. 배가 고픈데 식당에 사람이 많아서 카레라이스 같이 먹었어.“


"어머 세상에, 너 정말 다 컸구나."


엄마는 양손을 가슴에 올리며 감격스러운 마음을 표현했다.


"정말 기쁘다, 동건아."


엄마의 반응에 동건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슬쩍 지어졌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웃을 일이 없던 두 사람이었다. 서로를 보면 아픔이 떠오를까 싶어 많은 대화를 하지도 못했다. 아빠를 잃고 빠르게 성숙해버린 동건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은 좋은 신호였다.


동건은 씽크대 주변 물기를 행주로 꼼꼼히 닦고는 집을 나섰다.


”다녀올게요!“ 등교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설레는 목소리였다.


침대에 누운 엄마는 잠을 청하며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연을 볼 수 있는 학교생활은 동건에게 간질거리는 흥분과 설렘의 시간이었다. 고3이라는 것이 아쉬웠다.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수능 막바지 준비에 한창인 학교는 긴장과 집중 모드였다.


동건은 최대한 조용히 지내면서 지연과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진지해졌다.


동건은 할 수 있는 한 능력을 총동원하여 식당 일을 해내야겠다 다짐했다. 작은 가게일 뿐이지만 동건에게는 미래가 달린 일이고 가슴 뛰는 일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지연과 동건은 가끔 만났다. 주로 동건의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동건의 집으로 가서 밥을 먹고 영화를 봤다. 지연은 자신이 취미로 그림을 화실에 동건을 데려가 동건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지연은 취미로 계속 그림을 그리는 것이 꿈이라했다.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지연을 가만히 바라보고 움직이지 않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지연은 동건을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비스듬히 앉아 주로 옆모습이 보이도록 앉도록 했다. 동건의 긴 다리와 잘생긴 옆모습이 보이는 각도였다.


3M 정도 떨어진 캔버스에 동건의 이마, 오뚝한 코 그리고 입술까지 이어지는 선부터 스케치했다. 넓은 어깨 그리고 길게 뻗은 한쪽 다리를 빠짐없이 훑어보고 그려냈다. 동건의 속눈썹이 지연의 시선에 어쩔 줄 몰라 춤을 추고 있었다. 남성미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동건의 턱선과 긴 손가락 그리고 목의 라인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목에 튀어나와 있는 남성의 뼈는 한 번씩 움찔거리며 위, 아래로 움직이거나 사라졌다 다시 나오기도 했다. 동건의 눈동자에는 힘이 있었다. 선하지만 강해 보이는 눈빛이 돋보이는 외모였다. 19살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완연한 남성의 모습이었다. ”삭삭삭“ 연필이 그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적막한 화실에서 소리 없는 두 사람의 긴장되고 어색한 기운이 연필이 캠퍼스에 닿을 때마다 벗겨졌다.


"지연아, 네가 나를 그렇게 자세히 보고 있으니 내가 어쩔 줄을 모르겠어. 어색하고 부끄러운데 기분이 좋기도 해.”


'생각하는 사람' 자세를 취한 모델이 어쩔 줄을 모르겠다고 말하자 지연도 당황했다. 동건의 솔직하고 뜬금없는 이야기에 지연은 목덜미가 붉어졌다.


"계속 그려달라는 말 맞지?"


사람을 홀릴듯한 미소를 지으며 동건이 말했다.


"응. 계속 그려줘."






chapter 7.




20살 첫눈이 내리던 날. 동건은 식당 운영을 바꾸었다. 주방 크기를 조금 늘린 후 옆 가게와 벽을 트고 규모를 2.5배로 늘린 것이다. 치킨집을 운영하던 옆 가게 주인은 어려운 경기에 건물주와 계약을 만료하였다. 동건은 식당을 맡은 지 2개월 만에 식당의 모든 메뉴를 조리 실장님만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5개월 만에 메뉴 정리를 하고 식재료를 업그레이드 하였다. 이익을 이전보다 더 적게 남기는 대신 손님들의 식사 만족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였다. 좋은 식재료를 찾기 위해 쉬는 날이면 여러 곳을 발로 뛰며 찾아다녔다. 좋은 품질의 채소를 재배하는 밭을 보면 얼마나 수확할 수 있는지 양을 확인하고 직접 음식을 만들 때 써보기도 하며 신선도와 맛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 평가했다. 재배한 채소를 단독으로 납품받기 위해 예찬이 운영하는 분점과 4곳의 또 다른 분점까지 같은 채소를 납품하는 것으로 계약을 맺었다. 식재료 경쟁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스스럼없이 밭일을 돕기도 했다. 밭 주인은 양심적이고 부지런한 사람이었기에 자식같이 기른 채소들을 대량으로 계약해주는 동건에게 상당히 고마워하였다. 안정적인 공급과 식재료의 신선도 덕분인지 식당 운영 10개월이 지나자 이전보다 2~3배 많은 손님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테이블 회전을 의식한 듯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나갔음에도 불만이 거의 없었다. 4인용 테이블에 5인이 앉게 되어도 식사를 할 수만 있다면 운이 좋게 생각했다. 식당에서 매주 한 번 직접 김치를 담갔고 김치찌개용 김치의 맛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대형 김치냉장고 여러 대와 김치 저장고로 사용할 창고를 사들이기도 했다. 동건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손님 수가 늘어도 더 높은 만족도를 위해 계속 먹어보고 연구하고 또 노력했다.


눈발이 흩날리는 12월의 어느 날. 동건은 새롭게 오픈하는 식당의 간판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동건의 꿈은 끝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 생각했다. 식당 주인이 동건을 축하해주러 왔다. 간판을 보고 있는 동건의 어깨를 툭하고 치며


"결국 해냈구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기회를 주신 덕분이에요."


"기회를 만든 건 너야. 네 능력과 강한 마음을 나만 눈치챈 것이 아닌 것 같네."


학교 강의를 마치고 온 지연이 생크림 케이크를 들고 식당으로 오고 있었다.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지연을 향해 동건은 몸을 돌렸다.


동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식당 정식 오픈은 내일이니 오늘은 미리 연습이나 해보자. 들어가자."


지연과 동건은 식당 주인 예찬을 따라 들어갔다.


식당 리뉴얼을 기념하여 직원들과 다 함께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낸 동건은 지연과 함께 먼저 가겠다고 인사를 했다.


조리 실장은 오픈 준비 하느라 고생했다며 가게 문 잘 닫고 갈테니 내일부터 즐겁게 일해보자 라는 말로 인사했다.


가게 문을 나선 동건은 그동안 오픈 준비에 잠잘 시간도 부족했지만 지연을 보는 순간만큼은 새로운 힘이 생겼다.


"춥다, 빨리 가자." 하고 지연의 손을 잡자 지연은 동건의 양 볼을 살포시 감쌌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온 1년이었다. 지연의 한마디 말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길거리 간판들이 화려한 빛을 내며 동건과 지연이 지나가는 길을 밝혔다. 말없이 손을 잡고 걷는 둘이었다.


12월의 첫눈이 동건과 지연의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았다. 식당과 술집마다 가득한 사람들이 노란 조명 아래서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술병에 마주한 얼굴들은 취기에 달아오르거나 흥겨움에 달아올라 있었다. 날리는 눈발을 헤치며 걷는 둘의 얼굴은 추위에 빨개졌다.




동건은 목도리를 지연의 귀까지 올려 다시 감아주었다.


"다음 달은 되어야 보겠다. 많이 바빠질 예정이지?"


아쉬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아마도."


"가야겠어. 하지만 가기 전에 안고 싶어."


반달 같은 눈을 하며 웃는 지연이었다.


마지막으로 지연을 꽉 안아준 동건은


지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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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마지막 날. 출근을 하자마자 동건이 본 광경은 가게 간판 아래 입구가 나무 판자와 석고 보드 등으로 완전히 막혀 있는 광경이었다. 아무렇게나 잘린듯한 2미터 짜리 나무 판자들이 여러 겹 겹쳐 입구를 완전히 막고 있고 초록색 테이프로 칭칭 동여매어져 쉽게 열지 못하게 막아놓은 모양이었다. 동건은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없는 번호이오니........"


차가운 서리가 뒷목 정수리로 타고 올라오는 듯 했다. 외투를 벗은 동건은 맨손으로 나무 판자에 엮인 테이프를 떼어내고 석고 보드를 치웠다. 큰 판자 때문인지 가게 앞 작은 입간판은 부서져 넘어진 상태였다. 여러 겹의 나무판자 뒤 가게 문은 두꺼운 자물쇠로 칭칭 감겨있었다. 비밀번호와 지문을 사용하는 가게 도어락이 의미가 없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도어락 지문 인식기에 작은 메모장 하나가 테이프로 붙어져 있었다.


'미안하다.' 단 네 글자가 써진 메모장이었다.


조리 실장과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출근 시간 1시간이 지나도록 기다려봤지만 모두 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4명에게 연락했지만 모두 어젯밤 늦게 식당 사장으로부터 2주 치 알바비를 미리 받고 내일부터 가게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동건은 전 식당 사장이 운영하는 20여 분 떨어진 식당을 찾아갔다. '당분간 영업을 중단합니다.'라는 글자만 덩그러니 붙여진 채로 가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러 온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늘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엉망으로 훼손된 가게 앞 상황을 본 사람들의 황당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동건은 SNS에 '식당 영업 당분간 중단합니다.' 글을 올렸다.


글을 올리자마자 무슨 일인지 묻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렸다.


주변 가게들을 돌아보며 어제 늦은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려 했지만, 새벽 시간에는 모두 문을 닫는 가게들이 대부분이라 새로운 정보를 얻기는 어려웠다. 식당이 갑자기 문을 닫은 것에 대해서 오히려 더 놀라는 눈치였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1년 동안 공을 들인 가게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다니.


사장은 왜 미안하다는 쪽지만 남겨놓고 연락이 두절 됐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건은 경찰서를 찾아갔다. 경찰은 동건이 실질적인 사장이 아닌 관계로 사건 조사를 하기 어렵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아 마른 얼굴을 두 손으로 부볐다.


보리차를 따라 마시면서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아침에 끓여놓은 보리차는 아직 따뜻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 했다. 전날까지도 조리 실장이나 알바생들은 다른 점이 없었다. 밀려드는 손님 때문에 눈치를 채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루아침에 식당 운영을 중단하다니. 동건은 침착하려 했지만, 뛰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종종 일어나기에. 동건에게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다만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일 년의 마지막 날 31일. 자정이 되자 사람들은 새로운 한 해를 축하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신년 덕담을 담은 문자를 주고받거나 건강을 기원했다. 12시 자정이 되자마자 지연에게 전화가 왔다.


"21살이 된 걸 축하해. 이 순간, 같이 있고 싶었어."


지연에게 이 황당한 소식을 전하기가 어려웠다. 동건이 머뭇거리는 사이 지연이 먼저 말을 이어갔다.


"동건아, 나 유학을 가게 됐어. 그래서 너한테 말해주고 싶어서 전화했어."


말문이 턱 막혔다. 지연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동건은 실망하거나 섭섭하다는 말을 전하기가 어려웠다. 식당은 갑자기 영업이 중단되고 지연은 동건에게서 멀어지기 직전이었다.


"축하해. 정말 좋은 일이네. 늘 가고 싶었던 영국 말하는 거지?"


"응. 축하할 일인지 모르겠어. 나는 너를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게 자신이 없어.“


"어떤 사정이 있는거야?"


"아마도....."


"내가 널 위해서 뭘 해줄 수 있을까?"


"마음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멀리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지만 사실 너와 영원히 떨어져 있고 싶지도 않아. 말하고 보니 내가 이기적이네."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그런데 네가 간다니 마음이 아파."


지연의 울음을 참는 음성이 느껴졌다.


"2주후에 출발이야."


"응."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더 미안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전화를 끊고 맥이 탁 풀렸다. 지연은 영국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걸까? 21살. 아무런 힘이 없는 동건은 처음으로 좌절감이 무언지 알 것 같았다. 식당 영업이 중단되고 지연도 2주 후 영국으로 떠나게 된 이 스토리가 어쩌면 동건이 꼭 넘어야 할 높은 산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을 넘어뜨리는 시험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깊은 곳에서 무언가 북받쳐 올랐다.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 뒤 동건은 완전히 날 것으로 놓여진 것 같았다. 억지로 일구어낸 삶의 희망 불씨가 자근자근 짓밟아진 기분이었다. 수 분 동안 동건은 수백미터 아래로 내동댕이쳐진 작은 벌레처럼 굴었다. 짧은 발로 오르고, 오르고 또 올랐다. 유일하게 보이는 작고 좁은 하늘에서 수십 개의 삽들이 인정사정없이 흙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작은 벌레는 흙에 질식하기 직전 몸부림을 쳤다. 뻥 뚫린 높고 파란 하늘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잠깐 곯아떨어졌다가 오싹한 추위가 느껴져 벌떡 일어났다. 바깥은 시리도록 찬 바람이 불었지만, 동건의 목덜미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니 짙은 흙냄새가 났다. 흙냄새에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었다.




식어버린 보리차를 한 잔 가득 따라 꿀꺽꿀꺽 마셨다. 냉장고에 넣지 않았음에도 목젖이 확 열리는 차가움이 느껴졌다. 집안 온도가 16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보일러의 난방 버튼을 누르니 이내 ”우위잉“ 하며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집안을 이제 겨우 따뜻하게 만들었을 뿐인데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다.


머뭇거리거나 슬퍼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21살이 된 첫 날. 동건은 같은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을 틀었다. 목욕을하고, 머리를 말린 후 주간 근무를 마쳤을 엄마를 기다렸다.


저녁 7시. 집에 돌아온 엄마는 동건이 집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늘 공휴일이라서 쉬는 거야?"


"아니. 식당 운영이 중단됐어."


자세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지는 못했지만 갑작스럽게 식당 운영이 중단되었고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차라리, 입대를 할까 해."


"믿기지 않아. 예찬씨가 연락 두절이라니. 입대하는 거 지연이는 알아? 상의하고 결정한 일이야?"


"지연이는 유학 가게 됐대. 2주 후에. 영국으로."


담담하게 말했지만, 쑥대밭이 된 동건의 마음을 엄마가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엄마는 동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많이 컸네."


엄마의 눈을 쳐다보지 못한 동건이었다.


"군대에서 어떻게 할지 고민 많이 해볼게요."


"그래."


"당분간 혼자 지내야 해. 괜찮겠어?"


"그동안 별일 없었잖아. 그리고 너도 언젠가 독립할 텐데 혼자임을 두려워해선 안 되지. 사실 두렵지도 않아."


엄마는 강단 있게 말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도 김기환이 기웃거리면서 힘들게 했을 때도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엄마였다.


엄마를 혼자 두고 입대해야 하는 것이 걱정됐지만 지연이 없는 상황에서 군대를 마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힘을 회복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올게."


정해져 있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듯이 동건은 엄마를 다독여주었다.


엄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 동건은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목에 가시라도 걸린 것 같았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 목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방문을 닫은 동건의 볼에 뜨거운 눈물이 끝도 없이 흘러내렸다.






2주 후, 지연과 동건은 이별을 했다. 떠나기 전날 동건은 지연을 만났다. 지연은 동건을 부둥켜안고 서러움이 가득한 울음을 뱉어냈다.


부모님이 억지로 유학을 보내는 건지, 아니면 다른 어떤 사정이 있는 건지 동건은 묻지 않았다. 지연이 울고 있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헤어짐은 쓰리고 아플 것 같았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붙잡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동건은 울고 있는 지연을 따뜻하게 안았다. 지연은 편지를 동건에게 주었다.


”나는, 지금 여길 떠날 수밖에 없어. 네가 여기 있는데 가야만 해서 마음이 너무 아파.“


편지를 꼭 쥔 손은 쓰린 가슴을 달랠 수도 없었다. 지연을 집에 보내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금 동건의 발밑에 밟히는 흙 한 톨보다도 자신이 못난 존재처럼 느껴졌다.




좋아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은 가슴 안쪽을 깊이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먹먹함에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되어졌을 때,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다가 동건은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오래되어 반질반질 윤이 나기 시작한 나무 침대가 들썩거렸다.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다 바꿔놓을 수 있을 거야.‘


아무리 밑바닥까지 내려쳐도 짓밟아도 다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통이 컸지만 견뎌내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아버지를 잃었고 김기환에게 시달리기도 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더 잃을 것이 없었다. 이미 최고로 고통스러웠다. 지연이 멀리 있음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잃을 것이 없어 마음이 편하다니 실소가 터졌다.




봄이 오기 전 아주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불던 날이었다. 동건은 훈련소에 입소했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추운 날씨였다.


훈련소까지 오겠다는 엄마를 만류하고 혼자 머리를 깎고 훈련소에 들어가면서 동건은 다짐했다.


'이건, 오롯이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야. 모든 걸 다 바꿀 거야.’






chapter 8.




18개월 후, 동건은 제대하였다. 특수임무대에서 다져진 근육으로 떡 벌어진 어깨가 돋보였고 가방을 들었기 때문인지 반팔 티셔츠 아래 전완근이 불쑥 튀어나왔다. 제한된 기간이었다. 동건은 18개월을 허비하지 않았다. 특수 훈련과 강도 높은 훈련 외에도 따로 운동을 추가하여 다부진 몸을 만들었다. 그리고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학창 시절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공부였지만 바닥으로 추락한 만큼 자신을 일으켜 세울 무기들이 많이 필요했다. 다시 추락하더라도 재기하는 데에 도움이 될 목발과 같은 지지대가 필요했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의 도움 없이 동건은 혼자 두 발로 꼿꼿이 서야 했다. 그냥 서 있는 걸로는 부족했다. 큰 타격을 받아도 휘청거려도 아무렇지도 않을 맷집과 근육이 필요했다. 여전히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했다.


선하고 부드러웠던 동건의 눈빛은 18개월 만에 달라졌다. 사람을 꿰뚫어 볼 것 같은 예리함이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도 허투루 빗지 않았을 것이며 쉽게 말을 붙이기 어려운 냉랭함이 담긴 얼굴이 되었다. 차가운 얼굴은 평소 얼마나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부대에서 나와 곧장 엄마가 일하는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창문으로 동건을 확인하고 달려 나온 엄마를 와락 안았다.


랜 시간 동안 잘 견뎌준 동건의 멋진 엄마였다. 군대에 가 있는 동안 혼자 지내야 할 엄마 생각에 아버지의 부재가 더 크게 와닿았다. 엄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제대 축하해. 이제 사회인이네."


밝게 웃는 엄마를 보니 제대를 한 것이 실감 났다.


18개월 군 생활 동안 지연과는 연락이 끊겼다. 영국으로 갔다던 지연은 이메일도 전화도 회신이 되지 않았다. 1년을 매일 보낸 이메일은 읽지도 않고 쌓여가기만 했다. 답이 없는 이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지연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부터 영원히 헤어짐이라 생각됐다. 지연과의 연락 두절은 동건의 재기의 힘을 다지게 해주었다.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느낄수록 힘이 자꾸만 솟아났다. 이전보다 더 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곱씹었다.


22살 동건의 여름이었다.


동건은 군 생활을 하면서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 번은 훈련 후 탄약고에 미처 넣지 못한 수류탄 한 발이 터져 같은 내무반의 상병 하나가 복부와 다리를 심하게 다친 일이 있었다. 상병이 동건의 우측에 서 있지 않았다면 동건이 다쳤을 일이었다. 동건은 손등에 수류탄 조각으로 인한 상처를 하나 입었다. 다른 하나는 헬기를 타고 임무를 수행하던 중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착륙장에서 일어났다. 착륙장에 다다르기 전 특임대대원들이 낙하하려는 지점이 아닌 건물 바깥 상공에서 문이 갑자기 열리며 동건이 바닥으로 추락해버릴 뻔한 일이었다. 첫 번째로 내리려 준비하고 있던 동건은 헬기 문이 열리자마자 공기의 압력에 추락할 뻔했으나 가까스로 문 안쪽 손잡이를 끝까지 잡고 버텼고 두어 명의 동승자가 벨트를 잡고 온 힘을 다해 끌어 올려주어 헬기에 다시 탑승할 수 있었다. 갑자기 열린 헬기 문에 대한 정비나 관리 소홀에 대한 감사는 없었다. 동건은 두 가지 일을 겪고 난 뒤 김기환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강한 의문이 들었다.




김기환에게 찾아와서 했던 이야기과 군에서 일어났던 일을 종합해보면 동건을 해하려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김기환은 더 이상 동건 가족을 찾아오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쫓겨 다니고 회사가 궁지에 몰려 건강이 나빠졌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듣게 되었다. 물론 김기환이 직접 엄마에게 전한 이야기였다. 엄마의 이야기로는 김기환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했다.


동건은 김기환이 입원한 병원을 직접 찾아갔다. 자신에게 생긴 일을 김기환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김기환은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한 탓에 피부가 허옇게 변했고 많이 말라 있었다. 동건이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 동건이 병실에 들어서자 놀라지는 않았다. 걷지도 못하는 앙상한 다리를 손으로 당겨서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침대를 세워달라고 부탁하여 동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모습을 보니 이제 실감이 좀 나니?"


"무슨일이 있었던 거에요?"


"니가 이렇게 보다시피 나는 말라가고 있어. 이 병원도 안전한지 그것도 모르겠어."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 진짜라는 건가요?"


"믿지 않으려는 사람을 설득시킬 자신은 없다. 하지만 너도 네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난 이상 내 얘길 믿지 않을 수 없었겠지. 더군다나 내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


"알려줘요. 대체 누가 이렇게 하는 겁니까?"


"알려준다고 해도 네가 만날 수도, 해결할 수도 없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죽던가, 아니면 죽은 것처럼 살던가 두 가지 중에 하나야."


"대체. 무슨 말인지."


"난 머지않아 죽을 거야.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긴 하지. 너도 곧 나와 같은 미래를 마주할지도 모르지. 그걸 경고하고 싶어서 찾아갔던 거야."


"아버지가 하신 일이 절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일로 아버지는 목숨을 잃었고 저까지 위험에 처해있어요. 이렇게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용서하고 싶지 않아요. 가만두고 싶지 않다고요. 누군지 알려준다면 어떻게든 힘을 키워 끝까지 싸울거에요."


"글쎄.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너도 눈치로 알겠지만 대응하기 어려울 거다. 힘이 미치지 않는 다른 곳으로 가. 어디든 먼 곳이 더 좋겠지.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 아직 젊으니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도움을 줄 수가 없어. 힘을 뺏겼고 나이도 들었지. 거기다가 이렇게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누워있어. 최대한, 최대한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여자친구도 연락이 끊기고, 하던 일도 중단됐어요. 1년 동안 온 힘을 다해 맡아온 일이었어요. 좌절감을 크게 느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잘됐죠. 더 바닥으로 내려갈 곳이 없어요. 저를 지켜보고 있는 그자가 누군지 알려줘요.”


"몇 년 전 네 아빠가 수사하던 그때부터 뭔가 크게 어긋났어.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냐. 지금은 어떤 것도 통하지 않을 거야. 빨리 다른 곳으로 가야 해."


"누구인지 알려줄 마음이 없군요."


김기환의 은 동건의 눈을 피했다.


"니가 힘을 키워서 복수를 해 준다면, 나는 그때까지 잘 버텨보마."


껍데기만 남은 듯한 얼굴에 광대가 솟아 올라 있었다. 근육도 없이 피부만 남아있는 목젖이 흔들렸다.


"수사 내용은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언젠가는 너에게 도움을 줄 거야. 식당 주인."


"네? 그분은 갑작스럽게 연락도 되지 않아요. 식당 운영도 중단시켰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수사 내용을 알고 있다고요?"


"네 아버지와 수사를 같이 하던 사람이야. 수사 내용은 거의 다 알고 있고. 식당은 아마도 스스로 문을 닫은 게 아닐 거다."


"세상에. 도대체 몇 사람을 죽이고 있는거에요? 참을 수가 없어요."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사람이다. 지금은 잠자코 있어."


"......."


서랍에서 주먹만 한 파우치를 꺼낸 김기환은 동건에게 파우치를 건네주었다.


"내가 가진 금붙이들이야. 모두 24K니까 적은 돈은 아닐 거다. 현금도 재산도 모두 잃고 그거 하나 남았어. 나에겐 필요가 없지만 너에겐 필요하겠지.“


파우치를 받아 들자, 손목이 갑자기 밑으로 쑥 꺼질 만큼 무거웠다.


동건은 파우치를 받아 들고 잠시 머뭇거렸다. 김기환에게 무엇도 받기 싫었지만 동건에게 필요한 건 될수록 많은 자금이었다. 결심한 듯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가볼게요."


병실을 나서기 전 뒤를 한 번 돌아볼까 생각했지만, 돌아가신 아빠를 떠올렸다.


동건이 나가고 기환은 바짝 마른 입술을 벌리고 동건을 보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얼굴이었지만 동건은 그대로 나갔다.


혼자서는 다리도 마음대로 펴지 못하는 만신창이가 된 기환이었다.


동건은 군대에서 받은 월급과 식당에서 일하며 벌었던 돈을 모두 찾았다. 7,000만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숨어서 잘 지낼만한 곳은 어디일까?'


동건은 일단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영국을 거쳐 또 다른 나라로 갈 생각이었다. 지연이 있는 나라 영국. 지연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연락이 되지 않는 기간에도 동건의 마음에는 지연이 함께 있었다.


동건의 엄마는 동건이 외국으로 간다는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동건에게 어떤 위험이 있다면 그것이 더 끔찍하고 싫었다. 동건보다 자신이 타겟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연락은 못 할 것 같아. 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내가 출국했다는 걸 알면 엄마를 찾아오거나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핸드폰 프로필에 엄마 사진 말고 내 사진 올려. 바로 알아보고 찾아올게."


"엄마를 찾지는 않을 것 같아. 이유가 뭔진 모르겠지만 네가 안전했으면 좋겠다. 오직 그거 하나 바랄 뿐이야."


"군대에서 느낀 게 한 가지 있어. 이렇게 마냥 죽을 날만 기다리고 살지는 않겠다는 거야. 나는 죽지 않기 위해 가는 거야. 아빠가 돌아가신 것처럼, 이유도 밝혀지지 못하고 죽지는 않을 거야."


"동건아, 엄마가 아무 힘이 없어서 미안해. 이렇게 보내게 돼서 정말 미안해."


"아빠가 없는 동안 나 키우고 두 다리로 버텨온 것만도 정말 대단해. 그리고 감사해요."


영국으로 출국하는 날. 동건은 공항에 도착하여 잠깐 머뭇거렸다. 자신을 보는 눈이 있는지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엄마와 집에서 인사를 한 뒤여서 동건 혼자였다. 이런 혼자인 상황이 더 위험했지만, 사람이 북적거리는 인천공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대단한 사람이라도 불가능했다.


미리 비행기 티켓을 두 개를 예매해 둔 동건은 빈 수화물 하나는 베트남으로, 다른 하나는 영국으로 가는 항공편에 맡겼다. 비슷한 시간대의 비행기 시간이 지연되지 않는지 수시로 체크하며 베트남으로 가는 비행기 게이트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러고는 영국 편 비행기가 출발하기 40분 전, 화장실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안경과 모자를 착용했다. 가지고 있던 기내용 캐리어를 화장실에 버려두고 배낭을 캐리어에서 꺼낸 다음 어깨에 착용하였다.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타이밍에 나와 영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게이트로 이동했다.


영국행 비행기는 큰 여객기여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영국행 비행기 창가에 앉은 동건은 주변이 큰 특이점이 없음에 안심했다.


이코노미석에 꽉 찬 사람들은 동건에게 관심이 없었다. 긴 비행시간 동안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혼이 빠진 아이의 엄마, 코를 심하게 고는 옆 사람 때문에 짜증이 난 사람, 원하는 메뉴를 받지 못해 승무원에게 다른 음식을 요구하는 등 몇 사람들 덕분에 동건은 더욱 눈에 띄지 않는 듯했다. 쓰고 온 모자챙을 한껏 내리고 눈을 감았다.


오전 9시 반이 지난 히드로 공항은 한국 공항처럼 천고가 높지는 않았지만 큰 규모에 많은 이용객이 북적였다. 낯선 이국의 모습을 처음 접한 동건은 그동안 익힌 영어를 총동원하여 지연이 있는 캠브리지까지 가는 버스 터미널을 찾았다. 비가 흩날리는 날씨에도 영국인들은 마치 비가 오지 않는 것처럼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비도 문제였지만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기 위해 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동건에게 카드를 이용한 버스표 예매는 난관이었다. 지나가는 영국인 부부에게 도움을 구하자 부부는 안내소가 있는 곳을 보았다며 알려주었다. 덕분에 동건은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


캠브리지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다.


도착하자마자 허기가 져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hound’라는 이름에 황금빛 손잡이 칠이 벗겨지고 반질거리는 것이 눈에 띄는 오래된 카페였다. 단골들이 매일 들릴 만한 카페였다. ‘카페 이름이 별나네.‘ 커피 향에 이끌리듯 가게로 들어갔다. 턱에는 많은 수염이 짧게 깎여 있었고,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손이 매우 긴 주인이 눈으로 인사를 했다. 메뉴판에서 가장 무난한 메뉴였던 오믈렛 두 개를 주문하였다. 오믈렛이 두 개인지 주인은 확인 후, 주방으로 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믈렛 두 개를 레이스 모양의 흰 접시에 내어왔다. 아기 엉덩이처럼 포실포실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오믈렛을 보자 숨이 막힐 듯 허기졌다. “Thank you.” 인사하기 무섭게 뜨거운 오믈렛을 단숨에 먹어버렸다.


김이 나는 뜨거운 음식을 먹는 속도에 커피를 내리던 주인은 놀란 표정이었다. 불편감을 주지 않기 위해 주인은 그릇 정리대로 시선을 돌렸다. 오믈렛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동건은 바깥 풍경과 가게의 정겨운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릇을 치우러 온 주인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평소 보리차만 즐겨 마시던 동건에게 처음으로 마셔보고 싶은 충동이 일게 하는 커피 향이 오믈렛을 먹는 내내 코를 자극했다. 매우 아름다운 커피잔에 핸드드립 커피를 내 온 주인은


“Enjoy.” 라는 말을 하고 그릇 정리대로 다시 돌아갔다. 아름다운 커피잔에서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있었다. 커피잔의 아름다움은 지연을 생각나게 했다. 커피잔은 가벼웠다. 커피잔의 유연한 곡선과 꽃무늬에 추상적인 형상이 섞인 문양은 향기로운 커피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넘기니 커피를 좋아했던 지연이 생각났다. 커피를 마시고 잔을 받침에 내려놓을 때 ’챙‘ 하는 소리가 맑게 들렸다. 캠브리지 어딘가에 있을 서지연.


지연이 위험해지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던 마음이 이제는 어서 만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고소한 커피 향 때문인지 지연과 함께 있었던 추억들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커피는 향기롭고 뜨거웠다. 낯선 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건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동건은 처음으로 한국을 떠났고, 처음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카페 주인은 오믈렛 두 개를 흡입하듯 먹어 치운 동건이 처음부터 신기한 눈치였다. 근육으로 다져진 몸이 옷 밖으로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카페에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짙은 선글라스를 안경처럼 눈에 붙인 채로 다니는 사람들이 카페 앞을 오갔다. 저 사람들 사이에 동건이 찾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동건은 계산서를 요청하였다. 주인은 영수증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팁과 함께 돈을 올려둔 후 동건은 배낭을 메고 밖을 나섰다. 동건의 머리통으로 “Thank you.”라는 영국 억양이 들렸다. 날씨가 어느새 뜨거워져 있었다. 알다가도 모를 영국 날씨였다.


퀸스 칼리지까지 걸어가 나무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다리를 구경했다. 낭만과 멋이 넘치는 다리였다. 모든 것이 궁금하고 많은 것을 눈에 담고 싶었다. 지연이 살았을 혹은 살고 있을 이 작은 도시가 동건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도시 전체가 대학 캠퍼스여서 어느 곳이든 지연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킹스칼리지의 웅장한 건물인 예배당이 동건의 눈에 띄었다. 이국적인 느낌에 이끌리듯이 안으로 들어갔다. 부채모양의 천장에 눈이 절로 커졌다. 높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지연도 이 스테인드글라스를 보았을까? 고혹적인 분위기에 동건은 취해버렸다. 나갈 길을 잃은 사람처럼 예배당 안을 서성거리다가 스테인드글라스가 잘 보이는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시선은 오로지 한 곳에 고정되었다. 신이 있다면 이런 예배당 어딘가에 앉아 동건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만 같았다. 스테인드글라스에서 화려한 빛이 통과되어 동건이 앉은 의자에 앉았다. 동건의 눈이 절로 작아졌다. 신이 신호를 주는 것만 같았다. 혼자가 아닌 것만 같았다. 종교를 가진 적이 없는 동건이었지만 앉은자리에서 절로 두 손이 맞잡아졌다.


'부디, 주저앉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기도를 드린 말은 단 한 문장이었지만 맞잡은 두 손은 오래도록 풀지 못했다.


아빠를 잃은 슬픔에 더해 먼 나라까지 도망을 친 현실에 갑작스레 가슴이 무너졌다. 지연이 있는 곳까지 왔지만,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다시 떠나가야 할지도 몰랐다. 산 송장의 모습을 하고 누워있던 기환의 모습도 스쳐 갔다. 혼자 두고 온 엄마가 생각나 가슴이 아렸다.


동건은 마음이 단단한 남자였지만 언제나 돌아가야 할 곳은 인간적이고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손등으로 눈물을 슥 닦고 기도를 마쳤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동건의 얼굴에 파랑과 초록 그리고 빨강의 색을 주었다.


간절함이 전해진 듯했다.


동건은 한참을 앉아 신의 대답을 들었다.


동건은 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배당 밖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은 고요해졌다.


동건이 앉은 의자에 그림자가 하나 가까이 다가왔다.


낮은 슈즈의 부드러운 밑창에서 나는 발걸음 소리였다. 소리가 가까워지는가 하더니 가까이에서 멈추었다.


동건이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지연이 서 있었다.


낮은 굽의 슈즈에 가벼운 청바지, 가디건 차림. 까맣던 생머리가 유난히 아름다운 지연이 동건 앞에 서 있었다.


지연의 눈은 동건을 향해 있었다.


"왜?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하!"


놀라움에 한 마디 탄성밖에 나오지 않았다.


짧은 우산을 손에 쥐었던 작은 손이 동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건의 손과 다리가 고장이 났다.


지연의 손을 잡을 수도, 안을 수도 없었다.


지연의 머리카락처럼 까만 동공 아래로 눈물이 점점 차는 것이 보였다. 일렁거리는 동건의 눈처럼 지연도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성모 마리아처럼 두 팔을 벌려 동건을 꼭 껴안았다.


그토록 그리웠던 이와 드디어 안게 되었다.


지연의 어깨에 눈물이 후드득 흘러내렸다.


눈물을 쏟던 지연이 작은 손을 올려 동건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말해봐. 어떻게 된 건지."


"만나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그냥 와버렸어."


“너무 그리웠어."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어."


"유학을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야."


"그럴 것 같다고 짐작했어. 부모님이 반대하신 거야? 나 때문에?"


"다른 일 때문이지만. 어쨌든 너를 지키려고 영국에 온 거야."


"그랬구나. 나랑 같은 일을 너도 겪었구나. 다른 위험한 일은 없었지?"


"응. 영국으로 오니 안전하다고 느껴졌어. 네가 제대하는 날 널 보러 한국에 갔었어. 멀리서 보긴 했지만."


"세상에."


"한국으로 가자마자 불안함을 느꼈어. 그래서 너를 만나지도 못하고 바로 돌아왔어."


"어떻게 이런 일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멋진 동양인 남자가 오믈렛을 두 그릇이나 깨끗하게 비우고 갔다고 얘길 들었어. 네 외모를 설명해주길래 그 길로 찾아다녔어. 동건이 네가 여기까지 오다니. 상상만 하던 일이 이뤄졌어. 정말이야. 나 지금 너무 믿어지지 않아."


"나도 그래. 지연이 네가 내 앞에 있으니까 꿈만 같아."






chapter 9.




캠브리지에서 지연과 하루를 보낸 동건.


아침 햇빛이 커텐 사이로 들어와 동건을 깨웠다.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져 흠칫 놀라니 머리가 헝클어진 지연이 곤히 자고 있었다.


엎드려 자는 특이한 자세를 보고는 동건은 피식하고 웃었다.


이불을 어깨까지 살포시 덮어준 동건은 머리를 손으로 괴고 지연이 잘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발그레 한 볼 밑으로 팔이 길게 뻗어있었다. 가는 손목 위로 작은 손은 작은 물건이라도 쥐고 있는 듯 오므리고 있었다.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손목에 붙은 작은 손이 신기했다.


동건은 지연을 깨워버릴 것만 같아서 조용히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지연이 살고 있는 집은 작지만 아기자기했다. 엔틱한 책상과 의자. 어울리지 않는 모던한 조명 허리춤에 작은 오리 인형이 달라붙어 있었다. 오리 인형의 털을 쓰다듬었다. 지연의 살결처럼 보드랍고 따뜻했다.


안락의자 곁 작은 테이블에는 노트북과 여러 권의 책들이 쌓여있었다.


사그락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지연이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뜬 참이었다.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동건을 보자마자 지연은 와락 달려들어 안아버렸다. 놓치기 싫은 행운의 선물이라도 잡은 것처럼.


동건과 지연은 가까운 곳에서 가벼운 브런치를 먹고 캠 강을 따라 함께 걸었다. 아침부터 기온이 높았지만, 지연은 동건의 손을 꽉 잡았다. 지연이 함께 걷고 있었지만, 자꾸만 지연을 확인하는 동건이었다. 캠 강을 함께 거닐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풍요로웠다. 또 헤어져야 했지만,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 사실을 잊으려 노력했다. 온전히 둘만의 시간을 가져본 지가 언젠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이 그대로인 채로 오랜 시간을 버텨온 두 사람이었다.


영국의 날씨는 오락가락 마음대로였지만 동건과 지연에게 날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손을 잡고 걷는 것이 평화이고 행복이었다.



메뚜기가 앉아있는 캠브리지의 '코퍼스' 시계에서 지연은 손에 힘을 주어 동건을 멈춰 세웠다. 사납게 생긴 메뚜기가 황금 시계를 계속 당기며 시계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가시가 튀어나온 것 같은 다리와 이를 가진 호감이 가지 않는 메뚜기였다. 메뚜기가 시계를 가지고 노는 건지 시계 위의 메뚜기가 시계의 마법에 걸려 착취당하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시계의 마법에 걸린 메뚜기가 영원히 시계를 돌려야만 하는 벌을 받게 된 것 같았다. 메뚜기의 사악한 얼굴이 흡사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름 150cm는 되어 보이는 금빛 시계는 바늘도 숫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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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퍼스 시계






"스티븐 호킹 박사가 공개한 시계야. 전기 모터로 한 번 충전으로 25년을 작동한대."


시간이 흐를수록 메뚜기의 입은 벌어졌다. 정각이 되자 메뚜기의 입이 닫혔다. 시계의 쇠사슬 소리가 동건을 자극했다. "한 번 충전으로 25년을 작동하는 금빛 시계."


"처음에는 기계음이 듣기 싫었는데 갈수록 이 메뚜기 시계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 소리보다는 눈금을 가리키는 빛이 보이기 시작하고 갈수록 메뚜기가 열심히 뛰는 게 이해도 되고. 시계가 무려 황금이니까.”


천재 학자가 선보인 시계 같지 않게 음흉한 느낌이 드는 시계였다. 지연처럼 오랫동안 시계를 본다면 다르게 보일지도 몰랐다.


"신이 없다고 주장했대. 스티븐 호킹이. 우주는 신이 창조한 게 아니라 물리학적 법칙으로 완성된 거라고 했대. 그래서 그런지 시계도 되게 물리적으로 만든 느낌이 들지? 바늘도, 숫자도 없이 말이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시계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설명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야. 지연이 네 말대로 내가 그동안 본 시계와는 느낌이 달라"


"그렇게 말하니까 메뚜기 시계가 왠지 더 마음이 가네."


"메뚜기가 울고 있어서 기괴하게 보이는 것 아닐까?"


"울고 있다고?"


"저 시계에서 평생을 뛰어야 하잖아."


"그러고 보니 악을 쓰면서 우는 것 같기도 해. 가슴 아픈 메뚜기로구나."


캠 강에는 펀팅(punting - 영국 런던 도시 내, 시내를 끼고 흐르는 좁은 강을 돌면서 긴 장대로 강 바닥을 밀어 배를 움직이게 하는 뱃놀이) 하는 관광객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한가로워 보이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작은 강을 따라가며 캠브리지만의 분위기를 감상하는 것은 행복하고 설레었다. 동건은 이 행복이 계속되길 바랐다.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사람처럼 동건은 지연의 얼굴을 간혹 확인하였다. 펀팅을 즐기는 저 사람들처럼 그저 웃고 즐겁기만 하고 싶었지만, 지연과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연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 같았다. 동건은 지연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세웠다.


"내일 나는 다른 곳으로 갈 거야. 저 사람들처럼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을 너와 보내고 싶어. 다른 건 모르겠어. 그거 하나만 생각하며 살 거야. 그런데 나를 기다려 달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지연아, 네가 무엇을 하든 다른 누구를 만나든 이 순간, 여기 이곳을 영원히 기억할 거야. 내 사랑은 정말 간절해. 스티븐 호킹처럼 나도 신을 믿지 않았어. 너와 있는 이 우주는 어떤 물리적인 법칙이 만들어낸 거야. 그런데 물리적인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어.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다시 이곳으로 올 수 있도록 할 거야. 내 가슴이 시키는 일이 우주이고 신의 일이야. 내 가슴은 온통 너이고."


강인한 마음이 느껴지는 눈이었다. 그 눈빛은 단호했다. 그리고 뜨거움이 느껴졌다. 지연은 결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마음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알아. 너의 간절함이 이 공기로 느껴져. 너보다 내가 더 간절하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만든 우주를 가슴에 꽂아둘게. 다시 보는 날부터 다시 펼쳐 새로 만들어. 블랙홀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지만 에너지는 영원해. 우리가 만든 우주도 어딘가에서 떠돌다가 다시 행성을 만들 거야. 난 슬퍼하지 않을 거야. 너를 떠올리면서 희망적인 미래를 꿈꿀 거야."


해가 지는 캠 강 근처 누군가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동건은 지연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깊이 지연을 안아 자신의 가슴에 품었다. 놓고 싶지 않은 풀어주고 싶지 않은 동건의 애절함이었다.


다음 날 아침. 동건은 조용히 지연을 안아주고 가방과 모자를 착용하고 집을 나섰다. 지연은 더 말하지 않았지만 그를 안는 순간만큼은 후회 없이 꽉 껴안았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팔을 풀어 놓아주었다.


창밖으로 뒤도 보지 않고 걸어가는 동건의 뒷모습이 보였다. 긴 다리로 빠르게 걸어가는 그 발걸음이 갑자기 야속했다. 참았던 울음이 밀려 올라왔다. 점점 멀어져 작아진 모습이 차오른 눈물에 가려 가물가물해졌다. 눈물이 제멋대로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 쉴 틈 없이 가슴이 베인 것처럼 아파서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그대로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지연은 동건의 체취가 남은 베개와 이불을 꼭 껴안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울음을 뱉어냈다.


동건은 런던으로 돌아가며 유로스타 티켓을 예매했다. 프랑스로 들어가서 동유럽으로 갈 계획이었다. 프랑스를 거쳐 스위스로 온 다음 야간 버스로 체코로 향했다. 취리히에서 체코행 야간 버스는 10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동건의 이동이 묻히는 좋은 노선이었다. 야간 버스 조명이 동건의 얼굴을 은은하게 비춰주었다. 함께 탑승한 사람들의 시선이 문득문득 자신에게 와 닿았다. 영국과는 다르게 동유럽 사람들은 동건에게 호기심이 있었다. 처음 외국에 나와 이방인이 되어 본 느낌 중 가장 어색하고 긴 시간이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 미리 알아봐 뒀던 도미토리를 찾기 위해 구글맵을 켰다. 영어 발음이 둔한 주인이 반겨주었다. 오후 2시가 되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었기에 짐을 맡긴 후 도미토리를 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도미토리를 가던 길에 마켓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을 봐뒀기 때문이었다. 고픈 배 때문에 걸음이 빨라졌다. 매쉬드 포테이토 한 접시와 치킨윙을 시켰다. 토르티야와 구운 옥수수가 같이 나왔다. 매쉬드 포테이토 덕분인지 식욕이 넘쳤다. 두 접시의 음식을 순식간에 비웠다. 야외 좌석에 홀로 앉아 음식을 맛있게 먹는 동건의 모습을 힐끔 힐끔 보던 웨이트리스가 다가왔다.


어색한 억양으로


"Why you don't drink beer? do you need? Beer is the best set with dishes."


"Please give me a bottle of water instead of beer."


"Oh, yes. I will get you a bottle of water."


"Thank you."


주변을 둘러보니 현지인들이나 관광객이나 모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거품이 잔뜩 들어가 있는 흑맥주, 보리차 색의 맥주가 여름의 더위를 잊게 해주고 있었다.


플라스틱 병 하나를 탁자에 놓아둔 웨이트리스가 앞치마 주머니에 두 손을 살짝 꽂은 채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I think you are not japanese. right? Are you Korean?“


"Yes, I'm Korean. how can do you know I'm Korean?"


"Oh, you are Korean. you are tall. I think japanese are lttle bit smaller than Korean.“


"Oh, I see."


동건이 키가 크다며 웃는 웨이트리스는 동건의 옆을 떠나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호기심을 폭발시키며 계속 질문을 이어가려고 했다.


"Yes. And even you are handsome. wow! you look like an actor."


젊고 잘생긴 아시아인 남자를 처음 본 것처럼 웨이트리스는 동건에게 비언어적인 호감의 표정과 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이 이 상황을 흘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속마음을 표현한 웨이트리스는 멋쩍었는지 동건에게 다크 코젤 맥주를 한 잔 가져다주며 분위기를 바꿨다.


"This is for you. it's free."


"Thank you." 술을 먹지 않는 동건이 맥주를 받아들었다. 웨이트리스는 동건이 맥주를 마실 때까지 떠날 기세가 아니었다. 무거운 맥주잔을 들어 입에 갖다댔다. 다크 코젤 한 모금이 꿀꺽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마지막 혀에 느껴지는 쓴맛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리고 씁쓸하지만 풍부한 효모의 맛이 입안에서 느껴지자 "으음!" 하고 작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동건을 보고 웨이트리스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Is it good?" "Yes, It’s a great taste. thank you." "My name is Yana Esova. Call me if you need help from the Czech." 야나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도움을 청하라는 말에 동건은 가볍게 야나의 손을 잡고 가볍게 감사의 목례를 했다. 동건의 진심어린 목례에 야나는 감동이 가득한 표정으로 쟁반을 가슴에 안았다. 옆 테이블의 그릇을 치우러 간 야나의 몸이 가벼워보였다. 동건이 식사 후 계산서에 팁을 포함하여 돈을 올려두고, 야나에게 인사를 했다. "Thank you for giving me a nice beer and you kindness. Bye." 야나는 대답 대신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잘 가라며 손을 들었다.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돌바닥이 인상적인 체코 골목들을 지나 저녁으로 먹을 식료품과 물을 사기 위해 마켓으로 향했다. 길가에는 키가 큰 체코 연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서로를 껴안은 채 키스를 하고 있었다. 허리를 감싸 안고 길을 걷는 연인들, 야외 테이블마다 데이트를 즐기는 체코인 커플들의 서로를 향한 눈맞춤이 진지하고 특별해 보였다. 이별에 참았던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바로 옆에 있는 것 처럼 지연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영국에서 지연을 다시 만난 후, 감정은 더 커졌다. 영국에 있는 지연이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아렸다.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 동건이 자리 잡고 위험에서 벗어나야 했다. 꼭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체코 바츨라프 광장과 까를교 사이에 관광객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그들은 체코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깔깔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건은 그들을 지나쳐갔다. 체코에서 같은 이방인이지만 그들처럼 웃을 여유가 없었다. 땀에 젖은 목덜미가 햇빛 아래 번뜩였다.






동건이 운영하는 한식당은 바츨라프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에 있었다. 동건이 익숙한 요리들을 선별하여 재료가 공수 가능한 선에서 메뉴판을 만들어 운영중이었다. 체코 외곽지역 출신인 야나는 레스토랑에 온 동건에게 처음 저렴하고 작은 가게 매물을 알려주어 계약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1인 가게로 운영하다가 손님이 많아져 프라하에서 이름난 한식집이 되기까지 7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종업원이 20~30명이나 되는 큰 식당 4곳을 운영하며 지역 신문에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다. 동건은 한국에서 익힌 기술 이외에도 친절과 맛있는 한식으로 승부를 보았다. 프라하의 명물 식당이 되기 위해 하루 꼬박 15시간을 일에만 몰입하였다. 식당 개업 5년 후 동건은 한식당 뿐 아니라 맥주 유통과 식재료 유통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인의 남다른 집념과 정확함에 체코는 항복했다. 동건과 알고 지내는 주변 식당들은 체코 내에서 재배되는 식재료를 공급해주는 유통 시스템에 발이 묶였다. 더 편하고 가격이 좋았다. 야나와 체코 전역을 돌아다니며 좋은 식재료를 재배하는 주인들과 계약을 맺어 서로에게 이득이 되었다. 29살에는 지역 신문이 아닌, 체코 신문에 동건의 인터뷰가 실렸다. 동건의 사업은 성장 가능성이 더 높았기에 체코의 유력 일간지에서 동건을 인터뷰 하기 위해 접촉을 하였다. 피터로 이름을 바꾼 동건은 사진을 찍지 않고 인터뷰에 응했다. 한국인의 사업 성공으로 체코 한인 사회가 떠들썩해졌다. 29살 젊은 나이에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를 모두 궁금해 했다.


12월. 눈이 내리는 날. 바츨라프 광장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처음 열렸다. 동건은 식당 운영을 살피기 위해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광장에는 반짝거리는 크리스마스 용품들과 선물로 주기 좋은 소품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눈길을 끌고 있었다. 길거리 음식점들이 즐비한 곳에 가서 동건은 뱅쇼를 한 잔 주문했다. 따뜻하고 달콤한 맛에 눈이 스르르 감겼다. 눈발이 아름답게 내리는 날이었다. 해가 지고 조명이 켜지자 거대한 트리 장식이 화려해졌다. 광장에 나온 연인들, 관광객들의 시선이 트리로 향했다. 동건은 야나에게 조금 늦는다고 연락한 후 뱅쇼를 홀짝 거리며 가로등에 기댄 채 트리를 구경하였다. 곧 30살이 되는 체코의 피터는 만 7년을 일만 하며 살았다. 좌절도 실패도 있었다. 29살의 피터의 얼굴에 삶의 여러 조각들이 엿보이는 듯 했다. 뱅쇼를 마실 때 입술 옆으로 살짝 지는 주름은 묘한 매력을 주기도 했지만, 그가 얼마나 삶을 진지하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눈발이 더 날려서 그랬을까. 졸음이 오는 것처럼 느껴져 피터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광장 안의 사람들이 함께 그려낸 번잡한 모습과 소음이 잠시 멈추었다. 눈발이 점차 굵어지는 바츨라프 광장 가운데에서 동건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먹먹한 느낌이 들고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영화 테이프가 늘어난 것처럼 사람들의 동작이 갑자기 느려졌다. 트리가 아닌 어두워진 하늘에 별똥별들이 무수히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플러그가 뽑힌 듯 동건은 광장 바닥에 스르륵 하고 쓰러졌다.


하얀 천장에 백색 조명. 정신을 차린 동건의 눈에 처음 보인 것이었다. 얼굴을 조금 옆으로 돌리자 연두색의 소파와 작은 보조 의자 그리고 동건의 팔에서 시작된 기다란 링거 줄이 눈에 들어왔다. 큰 링거액이 높게 매달려있었다. 동건은 말을 하기 힘들었다. 눈동자를 굴려 이리저리 살펴보니 병실 문이 조금 열려 있고 문밖에서 통화 중인 사람이 있었다. 야나였다. 동건은 야나의 전화 통화가 끝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비로소 문을 열고 들어온 야나는 눈을 뜬 동건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Peter!“


들뜬 목소리로 괜찮으냐고 물었다.


동건은 "Yana, voda." (야나, 물.) 겨우 두 마디를 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눈치가 빠른 야나가 얼른 생수병에서 물을 조금 따라 동건의 입에 대주었다.


야나가 머리를 살짝 들어준 덕분에 동건은 물을 몇 모금 마시고 훨씬 더 나은 기분이 되었다. 입부터 목구멍까지 시원하게 뚫리자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묻는 질문에 과로로 쓰러져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핸드폰을 열어, 야나에게 연락해 주었다고 설명해주었다. 병원에 데려왔고 입원해있지만, 걱정되어 맘이 편치 않다고 했다. 야나는 동건의 한국 집으로 연락을 해주고 싶어 한국인 통역사를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야나의 이야기를 들은 동건은 집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할까 생각했지만, 몇 년간 만나지 못했던 엄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동건과 엄마는 8년 가까이 연락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이제 한국에 간다면 위험에 맞설 수 있을지도 몰랐다. 피터로서 쌓아온 부와 경력이 동건을 지켜줄 것이었다. 한국에서 동건을 기다릴 엄마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동건은 야나에게 법인 이름으로 영국을 거쳐 한국에 입국할 항공편을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다. 2주 후 출발이었다. 야나에게는 체코에서 받을 검사를 한국에 가서 다시 받겠다고 안심시켰다. 유통업이 확장되면서 계약을 체결한 곳이 늘어나 무리하게 일한 것이 화근이었다.


상황을 바꾸기 위해, 지연과 함께할 미래를 위해 몸 사리지 않고 일을 했다. 20대를 모두 다 바쳤다. 방법이 없었기에 더 악착같이 일에 몰두했다. 아빠가 돌아가신지 10여년 만에 동건은 자신의 두 발로 완전히 우뚝 서 있었다. 한국에 돌아간다면 자신을 괴롭히던 검은 그림자를 완전히 걷어야겠다 다짐했다. 피터로 사는 인생은 성공적이었지만 동건으로 평범하게 가족과 함께,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길 포기한 인생이었다. 지연이 너무나 그리웠다. 지연을 위해 오기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쯤이면 사랑을 갈구해도 위험을 극복할 수 있을듯했다. 과로로 입원하는 동안 당분간 사업에서 손 뗄 수 있도록 했다. 드디어, 영국을 거쳐 한국으로 가야 할 때였다.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한 한국으로.






chapter 10.




영국을 거쳐 가기로 한 동건. 지연이 캠브리지를 떠난 것을 확인했다. 동건이 지연과 밤을 보냈던 지연의 집은 5년 전, 주인이 바뀌었다. 키가 큰 금발의 굽슬굽슬한 머리칼을 가진 영국인 남자가 나왔다. 키가 큰 집주인은 지연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지연이 떠났다니. 동건에게 연락할 수 없으니 그냥 한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국행 비행기 시간을 바꿔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동건은 22살 처음으로 영국으로 왔던 때가 떠올랐다. 외국이라고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동건이 영국에서 지연을 만나 성장시킬 힘을 받았다. 지연을 생각하며 버텼던 여러 해가 스쳐 지나갔다. 오래전에 와 보았던 영국이 마치 며칠 전 다녀간 듯 익숙한 느낌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동건의 입에서 입김이 연기처럼 뿌옇게 뿜어졌다. 코트재킷을 여몄다. 찬 공기에 동건의 손이 붉어졌다.




인천공항.




묵직한 통 가죽의 보스톤백 하나가 동건의 손에 쥐어있었다.


모범택시 기사에게 중앙동 신일아파트로 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기사는 자연스레 흩어놓은 머리칼에 멋스런 코트를 입은 동건을 백미러로 슬쩍 본 후 신일아파트로 출발했다. 신일아파트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을 받은 엄마가 나와 있었다. 엄마는 나이가 많이 든 모습이었다. 동건과 헤어졌을 때 마흔 중반이었지만 어느덧 50세가 훌쩍 넘어 얼굴은 좀 더 야위어있었다. 동건의 엄마는 건조해진 손을 들어 동건의 얼굴을 만졌다. 겨울 바람에 엄마의 손이 시릴까 염려되었다. 보스톤백을 잠시 내려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엄마의 두 손을 자신의 손으로 살포시 덮었다. 엄마와 아들의 눈에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연락도 받지 못한 채 기다렸을 엄마를 보니 가슴이 아렸다. 선인장 같은 가시가 박힌 건지 목이 자꾸만 불편해지고 울렁거렸다. 참고 참았던 것이 울부짖으며 튀어나오려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떨어져 있는 동안 엄마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을 엄마가 알아채고 슬퍼할까 봐 고개만 자꾸 떨구었다.


더 오래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엄마였다.


동건의 엄마는 많이 변한 아들을 눈에 자꾸만 담고 싶었다. 정말로 돌아온 것인지 믿어지지 않았다. 언제 다시 떠나갈지 모르는 통통 튀는 공처럼 영원히 손에 잡을 수 없는 존재인 것만 같았다. 성숙하고 강한 모습의 동건이 오랜 시간을 건너뛰고 다시 돌아왔다. 동건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고 자신 앞에 아들이 있다는 것을 온전히 느끼고만 싶었다.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훌쩍 다른 나라로 가야 했던 아들이었다. 가슴이 아려도 불현듯 스친 불안감에 잠을 자지 못해도 어쩔 수 없이 견디고 견뎌야 했다. 고통의 주머니를 달고 산 8년이었다. 29세가 되어 다시 돌아온 동건은 앳된 모습 없이 건장한 남성이 되어있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속만 끓이다 지쳤던 8년이었다.




집으로 들어온 엄마는 동건에게 김기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김기환이 6년 전 죽었다는 것. 동건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김기환은 이미 병이 깊어 보였고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던 기억이 났다. 김기환이 죽었다면 동건을 해치려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기 더 힘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서 결말을 내고 싶었는데 김기환이 사망을 하니 답답했다. 자신을 해치려는 그자가 당장 눈앞에 나타났으면 했다. 더 이상 그 무엇도 무섭지 않았다.


김기환은 생전에 이혼을 당하고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 사망 이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주식과 부동산이 조금 있어 이것이 동건이에게로 상속 처리가 되었다고 했다. 동건은 김기환에게 다른 재산을 물려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미 동건 스스로 많은 재산을 만들기도 했고 체코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이용했던 김기환의 금 때문에 마음이 내내 걸렸던 것이었다. 그것마저 몇 배로 쳐서 갚고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사망 후 재산까지 남겼다니 다시 돌려줄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김기환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그동안 타지에서 생활했던 동건에게 다시금 긴장감을 안겨줄 만한 소식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유럽으로 건너간 동건은 이제라도 제대로 사건을 파악하고 위험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유럽에서 사업은 성공했지만 빈 껍데기 같은 인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새로운 숙제가 생긴 셈이었다.




동건은 경원을 만났다.

신일아파트에서 살던 경원이 독립하여 택배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소식통이던 경원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게되었다. 식당 사장 예찬이 식당을 정리한 후 전라도 어느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하였다. 지연은 한국에서 최근에 본 사람이 있다고 했지만, 다시 외국으로 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예찬이 있는 곳을 알아내는 것은 시간이 걸릴 뿐이었다. 동건이 예찬을 찾기 시작한 뒤 1주일이 지나 예찬이 살고 있는 전라도 담양 집주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전라도 담양 외곽의 언덕 한옥 마을 가장 꼭대기에 예찬의 집이 있었다. 개량 한복을 입고 텃밭에 난 잡초를 뽑고 있던 예찬은 멀리서 언덕을 걸어 올라오는 동건을 한눈에 알아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일어났다. 예찬의 마당에서 땅에 떨어진 흙과 부스러기를 쪼던 닭들이 동건의 등장에 놀라 언덕 밑으로 후다닥 도망을 갔다. 예찬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 끝에서 동건은 잠시 멈칫했다. 살면서 가장 따랐던 어른이 저 안에 서 있었다. 어린 시절 동건을 믿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개량 한복 차림의 예찬은 텃밭에 그대로 서 있었지만 동건에게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 있었다. 뿌리째 뽑힌 잡초들이 예찬의 한쪽 손에 들려있었다. 황홀한 광경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에는 초점이 없다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예찬은 정신을 차리고 동건에게 들어오라 손짓하였다. 마당에서 동건을 마주한 예찬은 ”흠. 흠.“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동건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잠적한 것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지 마음의 준비를 한 셈이었다. 짙은 갈색의 무스탕 쟈켓에 청바지, 스니커즈를 차림은 20살 앳되던 동건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예찬의 눈이 촉촉히 젖어갔다. 안지도 먼저 인사하지도 못하고 그저 동건을 바라보며 동건의 말을 기다리는 예찬이었다. 동건은 가까이 걸어와 예찬과 가까운 거리가 되자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말도 없이 예의를 갖춰 인사하자 예찬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그치지 않은 채였다. 동건이 그 자리에 서 있자 예찬이 흙도 털지 못한 채로 동건에게 다가와 말했다.


"미안하다. 그리고 와줘서 고맙다." 헛기침을 하며 가다듬었지만, 음성은 갈라졌고 예찬의 흔들리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예찬을 보는 동건은 ”하아.“ 하고 깊은 숨을 뱉었다. 하얀 입김이 힘없이 뿜어져 나왔다. 정지된 몸과는 달리 동요가 느껴지는 입김이었다.


예찬이 안내한 한옥 내부로 들어가자 커다란 통나무 테이블과 작고 깨끗한 신식 부엌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 살기에 알맞은 크기의 집 크기였다. 온통 나무로 마감한 덕분에 은은한 나무 향이 기분 좋게 코를 자극했다. 예찬의 개량 한복과 어울리는 집이었다. 소박하고 은은한 멋이 느껴지는 집이었다. 예찬이 부랴부랴 손을 씻고 찻잎을 꺼내어 우렸다. 작고 동그란 찻잔에 따라 동건에게 권하였다. 향긋한 향이 나는 찻잎이었다. 차를 따라주는 예찬의 손이 거칠었다. 집 안에는 두 사람이 차를 호로록 마시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침묵 끝에 동건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동안 잘 지내신 거죠? 묻고 싶은 말이 많아요."


"나는 잘 지냈는데 나는 항상 네가 궁금했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계속 무거웠거든."


"무슨 말이든 해주세요. 제가 가장 믿고 따랐던 분이시잖아요."


"미안하다.”


“김기환 아시죠? 왜 제 삼촌이 사장님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했는지 궁금해요.”




“김기환. 너희 삼촌이라는 사람 말이다. 캐나다에 있는 내 아내와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어. 모든 것을 감시하고 협박했는데 끝내 협박에 굴복했다고 해야 하나. 내 가족의 안전을 확인하고 지키려고 김기환이 시키는 대로 식당을 폐쇄하고 캐나다로 갔어. 실제로 아내와 아이에게 김기환의 손이 닿아 있어서 굉장한 공포심을 느꼈어.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 눈에 띄지 않는 방법으로 숨어 살았어. 김기환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는 나는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었어. 그런데 너를 찾을 수가 없었어. 해외로 도피하다시피 나갔다는 이야기 외에는 알아낸 것도 없었어. 내 죄가 너무 큰 것 같네. 너희 아빠가 나 대신에 죽었어. 그 사건이 내게 떨어졌지만 네 아빠가 마무리하길 원해서 자원해서 잠복을 선거야. 교통사고이지만 사고를 낸 트럭이 김기환 사업체 법인 차량이고 우린 김기환과의 연관성을 찾지 못했고 김기환도 알리바이가 있었어. 완전범죄였지. 아무리 노력해도 김기환을 잡지 못한 것이 너무 한이 됐어. 네 아버지에게도, 너에게도 나는 많은 빚을 진 사람이 됐어. 너를 일으켜주고 싶었는데 또다시 도망가게 되어 할 말이 없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야. 평생 원망한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어. 정말 정말 미안하다.”


동건은 부들부들 떨려오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김기환이 알려줬어요. 사장님이 아빠와 같이 조사를 담당했다고. 그런데 아빠 장례식에서도 보질 못해서 경찰이셨을 줄은 생각도 못 했고요."


"네 아빠 돌아가시고 바로 경찰을 그만뒀어. 죄책감이 커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했거든. 제정신이 아니었어. 너를 돌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책임감 덕분에 살게 된 거야. 다행히 식당 일이 바빴고, 너를 보는 낙으로 조금씩 적응했던 것 같아."


"그랬군요." 예찬의 글썽이는 눈과 떨리는 손이 진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미안하다. 김기철 경위님께도, 너에게도. 내가 입이 있어도 뭐라 할 말이 없다. 경위님은 훌륭한 경찰이셨어. 끝까지 동생을 자수시키려 설득하려 하신 건데, 그렇게 악랄한 행동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김기환을 끝까지 잡았어야 하는 건데. 부족한 경찰이었어."


"우린 서로 잃은 게 너무 많네요. 저는 8년이나 다른 나라에 있다가 이제 막 들어왔어요. 아버지의 일로 어떤 권력자에게 위험에 노출되어있다고 말했었어요. 저는 김기환과 엮인 다른 권력자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아직 안전한 상태가 아니고요. 그래서 그 일을 밝히려고요. 사장님 덕분에 배운 게 있습니다. 험한 세상에 살아남은 법이요. 우리가 다시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지 제가 좀 더 알아볼게요. 이제는 저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아요."


"그동안, 힘들었지?"


"처음에는 일어나지 못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요. 아빠와 저, 그리고 사장님에게 악마 같은 짓을 한 사람은 김기환이니 사장님께 나쁜 감정은 없어요.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배운 덕분에 이렇게 잘 컸습니다. 제가 이제는 지켜드릴게요."


"세상에, 그렇게 말해주다니 정말 고맙다."


목이 메여 제대로 말을 맺지 못하는 예찬이었다. 녹지 못하게 단단히 얼어있던 죄책감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동건을 피해 달아났던 닭들은 바닥을 쪼며 슬금슬금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볏이 큰 수탉과 암탉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에 자꾸만 눈이 가는 평화로운 마을의 오후였다.






동건은 지연을 찾고 싶은 마음을 경원에게 전했다. 영국 캠브리지에서 만난 이후 연락을 할 수 없었던 동건은 긴 시간에도 지연 생각으로 힘든 시간을 버텨냈다. 이제 모든 것을 바로 잡고 지연에게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연 또한 그대로인지 알고 싶었다. 오랜 시간 참아온 감정인만큼 동건은 더 신중하게 숨죽이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을 기다린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조바심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지연이 자신을 잊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연은 자신을 잊고 누군가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동건이 캠브리지를 다녀간 것이 지연에게 어떤 마음의 부담을 준 것만 같았다.


지연이 한국에 들어와 있다고 했으니 운이 좋으면 한국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동건은 지연이 예전에 살았던 아데라움부터 차근차근 찾아 나가기로 했다. 동건을 만난다면 지연이 부담을 가질 수도 있었다. 동건은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장한 우연을 기대했다. 아데라움 편의점과 카페에서 이틀을 끼니를 해결하며 기다렸지만, 지연과 비슷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차량으로 아데라움에 진입하는 사람까지 꼼꼼히 보려 했지만, 지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연에게 연인이 있을 수도 있어 억지로 찾지는 않기로 하였다. 경원을 통해 주변 동창과 후배들에게 동건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려 달라고만 부탁했다. 지연이라면 동건이 입국한 것을 알고 한 번은 찾아와 줄 것 같았다.




동건은 입국 후 안전을 확인해야 했다. 동건이 많은 돈을 주고 의뢰를 한 업체는 약 2주간의 면밀한 조사 끝에 동건을 따라다니는 사람도, 집을 지켜보거나 해킹을 한 흔적도 없다고 확인해 주었다. 예찬도, 엄마도 모두가 안전해 보였다. 대단한 권력자라는 사람은 존재하긴 했었는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업체와 미팅에서 조사 결과를 듣는 동안 동건의 뇌리에 김기환이 스쳐 지나갔다. 김기환이 생전에 운영하던 기업체에 연관된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러면 뭔가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화학회사와 정밀기계, 그리고 부동산에 관련된 몇몇을 추렸다. 그중에서도 김기환의 회사에 관한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던 변호사가 눈에 띄었다. 그는 김기환이 회사를 설립하기 이전부터 인연이 있던 후배였다. 모든 회사와 일마다 김기환이 크게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다'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김기환과 긴밀한 관계였던 강성재 변호사는 법인에 소속되어있다가 김기환 사망 후 로펌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회사에 찾아가 이름을 이야기하고 강성재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기다린 지 1분도 되지 않아 강성재의 가장 안쪽 사무실로 안내받았다. 가장 안쪽의 사무실은 밖에서는 눈에 띄지 않게 문의 손잡이나 프레임이 감춰져 있었다. 벽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직원이 밀자 천고가 높고 바깥 풍경이 훤히 드러나는 넓은 사무실이 한눈에 펼쳐졌다. 강성재는 김기환보다 10살이상 어려 보이는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다. 다부진 입은 그가 승부욕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했다.


강성재는 김기환이 살아생전에 여러 가지 일을 맡겼던 사람이라 김기환의 사망과 비리 사건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성재는 동건이 이름을 밝히고 회사를 찾아온 것에 놀란 기색이었다. 강성재는 방에서 가장 편안해 보이는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동건이 나이는 어렸지만 많은 비즈니스 경험으로 앉은 자세에서 아우라가 느껴졌다. 강성재는 동건이 가진 묵직한 느낌에 압도당한 듯 수트의 매무새를 정리하고 동건의 맞은편에 앉았다. 환갑은 되었을 나이지만, 운동과 건강한 식단 때문인지 밝은 얼굴색에 건강미가 드러나는 수트핏을 가진 사람이었다. 강성재는 사람을 잘 꿰뚫어보는 재능이 있었다. 동건이 이미 이전의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파악한 것이다. 동건에게 강성재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김기환과 동건의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밝히며 김기환이 죽을 때까지 그 일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김기환의 사업이 하향선을 그리기 전부터 건강 상태가 악화됐으며 자신의 재산이 동건에게 상속될까 염려했다고 했다. 동건은 자신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싫었던 김기환이 왜 남아있는 금을 주었는지 의문이라고 하자, 변호사는 김기환이 동건에게 집착과 부정적인 감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자신에게는 아들이 없지만 형님에게는 아들이 있었고 결국 자신에게 유일한 핏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파괴하고 싶으면서도 집착하는 괴기스런 성향이 드러났다고 했다. 김기환이 동건에게 집착하는 것을 강성재도 궁금했지만, 집착의 정도가 심각하여 옆에서 말렸어도 집착하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사업을 확장 시키던 때에 김기환은 비리를 서슴지 않고 자신의 부를 위해서 애썼지만, 사업이 무너지고 건강 이상이 생기는 시기에 동건에게 집착 성향이 강해진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동건은 김기환이 자신에게 김기환과 동건을 부수기 위한 엄청난 권력자가 있다고 했다면서 그 권력자를 피해 8년간 해외에 도피해 있었고 이제는 그 사람을 만나 담판을 짓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김기환은 자신이 죽어간 것도 다 그 권력자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는 말도 전했다. 동건의 이야기가 끝나자 강성재는 이제까지 동건을 어렵게 대한 것이 실수라는 듯 자세를 편안하게 고쳤다. 소파에 등을 기대 안타까운 눈빛을 담아 담담한 듯 확실하게 설명해주었다. 증거를 찾지는 못했지만, 정황상 김기환이 김기철을 죽인 범인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끼인 권력자는 없으며 김기환은 지병으로 사망한 것이지 다른 이유로 사망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해주었다. 김기환은 오래전부터 지병을 앓아왔다고 했다.


강성재는 어른이 아이를 타이르듯 말을 이어갔다. 김기환이 처음부터 동건의 인생을 망가뜨릴 목적으로 거짓을 이야기하고 진실인 것처럼 꾸몄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하였다. 동건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하였다. 입이 벌어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면 동건이 군대에서 위기 상황에 빠졌던 것은 김기환이 사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해외로 도피하라고 말한 것도 김기환이었다. 권력자에 대한 여러 차례의 가스라이팅은 분별 있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동건은 김기환이 파 놓은 구덩이에서 8년을 허우적거렸던 것이었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 동건이 눈을 꿈벅거렸다. 방금 들은 그 말들이 사실이 아닐 확률이 조금은 있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강성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이 사무실에서 말한 내용을 모두 확신하고 있으며 자신이 봐 온 김기환은 동건에게 병적인 집착과 사이코패스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기억했다. 일례로 김기환이 9311번의 세단차를 구매하여 기사를 붙인 후 동건을 따라다니게 한 것, 집 앞에서 지켜본 것, 여자친구와 있는 것을 찾아낸 것 등이었다. 그리고 동건이 식당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식당 주인 예찬을 협박한 것이 김기환인 것도 기억해냈다. 동건은 혼란스러웠다. 8년을 다른 인생을 살았는데 그럴 이유가 없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자신은 왜 8년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살아야만 했을까? 김기환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당하기만 했던 가족 모두의 인생이 아깝고 처참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김기환의 뼛가루도 찾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동생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와 그의 가스라이팅에 8년을 함께 하지 못했던 엄마. 모두가 김기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에 동건의 턱이 덜덜 떨렸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분노였다. 김기환보다 아빠에게 한 것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이렇게 곱게 저세상으로 보낸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김기환의 목을 꺾어버렸어야 했는데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산 송장 같은 모습에 조금이나마 안쓰러움을 느꼈던 자신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빠도 동건도 김기환에게 잘못한 일은 없지 않았는가? 올곧게 살았던 가족이 이런 벌을 받는 것은 너무나 가혹했다.


강성재의 은밀한 사무실 문을 나온 동건은 그 자리에서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20살, 그때처럼 동건은 손톱자국이 깊게 남도록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양 벽이 책들이 가득한 사무실 복도에서 동건은 꽉 막힌 답답함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걸음을 옮기려 할 때, 전면 책장 상단, 오래된 월간지에 동건의 시선이 닿았다.


캠브리지에서 지연과 함께 본 ‘메뚜기 시계’ 바로 ‘코퍼스 시계’ 사진이 커버 사진인 월간지였다.


‘시간을 먹어 치우는 메뚜기’ 스티븐 호킹의 '코퍼스 시계' 라는 큰 제목 아래


“시간은 가버린다. 메뚜기가 먹어 치워 왔다(Time is gone, he's eaten it)” 메뚜기는 5분에 한 번씩 멈춰 서며 정확한 시간을 알려준다. 정각이 되면 쇠사슬이 관 속에 떨어지고 관 뚜껑이 요란하게 닫힌다.‘ 라는 부재가 적혀있었다.


시계 노동에 영원히 갇힌 메뚜기가 아니었다. 황금 시계를 장악하고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으며 시계를 가지고 노는 사악한 괴물 메뚜기의 형상이었다.




신일 아파트 화단에는 여지없이 겨울초가 심어졌는지 싹이 돋아나 하나, 둘씩 키 자랑을 하고 있었다. 페인트칠이 잔뜩 벗겨지고 베란다 섀시들이 녹슬거나 모기장이 뜯어져 황폐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지하에는 거미들이 구석마다 집을 지어 사람들이 오가지 않았따. 덕분에 신일 아파트의 지하는 동네 고양이들의 아지트가 되어 계단을 오르내리기 버거운 ’아기 고양이‘들이 종종 발견되곤 했다. 동건이 입국하기 전부터 신일 아파트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아파트를 둘러싼 아이보리 색 페인트 옷을 겹겹이 입었던 담장에는 “철거”라는 새빨간 글씨가 위협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동건은 가장 마지막까지 신일아파트에 머물다 갈 생각이었다. 좋은 집은 많았지만, 아빠와 함께했던 마지막 집은 엄마와 동건에게 비를 막아주는 우산 같은 곳이었다. 식탁에는 여전히 아빠의 의자가 남아있었다. 두 개의 의자는 반질반질해져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하나의 의자만은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깨끗하고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고 먼지 하나 앉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화분에 물을 주는 엄마의 뒷모습을 먼저 볼 것이었다. 동건이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주전자에 끓고 있는 보리차는 향이 코끝에 와 닿았다.


’이곳이 바로 우리집이다.’라고 말해주는 냄새였다. 촉촉이 젖은 화분의 이파리들은 호스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로 마른 목구멍에 넘기듯 해갈하며 싱싱함을 뽐냈다. 고무호스에서 뿜어지는 물줄기에 무지개가 만들어졌다. 늘 그리웠던 엄마와 호스에서 뿌려지는 물줄기, 그리고 싱그러운 화분들 뒤로 무지개 카펫이 깔렸다. 현관에 선 동건은 절로 눈을 스르르 감았다.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서서히 차올라 한 방울 두 방울 툭 떨어졌다. 하필 이 행복한 순간, 갑자기. 어린 날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뜬금없었지만 이 순간 동건의 눈이 고장이 났는지,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 같았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호스를 든 엄마가 뒤돌아보았다.


눈물이 잔뜩 머금은 눈을 하고 동건은 웃어 보였다. 호스 끝 힘차게 뿜어나오던 물이 스르륵 힘을 잃고 고꾸라졌다.




동건은 예찬이 살던 한옥 주택처럼 자연과 어우러지는 외곽지역의 주택을 매입하였다. 집 근처 원예 가든을 사들여 엄마가 그전처럼 화초와 나무, 꽃을 가꾸고 혼자 경제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동건의 엄마는 간호사로 야간 근무를 하며 벌었던 목돈을 동건에게 보냈다. 모자 관계지만 그냥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원예 사업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어 나머지 돈을 갚겠다며 당찬 포부도 밝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건은 체코에 있던 집과 유통 사업을 정리했다. 유통업은 한참 성장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눈독을 들이는 사업가들이 많았고 그에 비례해 큰돈을 받을 수 있었다. 한식당 중 가장 큰 가게인 바츨라프 광장 지점은 야나의 이름으로 해주었다. 그동안의 감사함에 대한 표현이라고 하자 야나는 어떻게 그렇게 형식적으로 아는 사람처럼 할 수 있냐며 성깔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욕을 하였다. 그리고는 동건을 안으며 펑펑 울더니 이 상황을 받아들일 때까지 체코에 한 달에 한 번씩 오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했다. 동건은 야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재차 인사했다. 야나의 큰 눈 안에 핏줄들이 도드라졌다. 야나는 온몸을 파르르 떨며 서럽게 울었다. 야나가 아니었으면 체코에서 적응하고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건은 야나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30대 중반의 나이가 될 때까지 동건을 짝사랑했던 야나는 사업이 아니라 자신의 짝사랑이 마침표를 찍게 된 것에 깊은 슬픔을 느낀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건은 마음이 아닌 다른 것만 야나에게 가득 안겨주었다.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동건은 신일 아파트 옆 아데라움에 집을 마련했다. 살던 동네를 벗어나기 싫은 것도, 지연에 대한 미련이 남은 것도 아데라움에 살게 된 이유였다.




동건은 담양으로 갔다.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하고 이제는 위험하지 않을 거라, 안심시켜주기 위함이었다. 반갑게 동건을 맞은 예찬은 지연이 담양을 다녀갔고 동건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으니 곧 연락이 올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지연이 담양을 찾아온 것은 두 번 이었고, 동건의 소식을 물었다고 했다. 지연이 자신의 소식을 물었다는 말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상상력이 갑자기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좀 지난 일이긴 하지만 지연이 동건이 한국에 들어왔는지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담양에 다녀온 이후로 동건은 핸드폰을 붙잡고 언제 올지 모를 연락을 기다렸다.


30살이 되도록 유일하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슴안에 남겨진 그 한 사람을 기다렸다.




동건은 김기환이 있는 납골당을 찾아갔다. 한적한 외곽에 있는 납골 공원 사무실에서 김기환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 그리고 가족관계를 증명하였다. 납골 공원만의 특별한 공기와 분위기가 있었다. 죽은 사람들의 한은 냉기처럼 차갑고 말이 없었기에 적막했다. 아빠도 이렇게 외로움을 견디고 있는 걸까? 온기가 없는 조화들은 유골함의 한을 애통해하고 있었다. 그 애통함을 잘 알기에 동건은 이전과 같은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동건이 김기환의 유골함을 찾았다. 사진 한 장 꽃 한 송이 없는 유골함이었다. 재가 되어버린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죽고 없는 사람에게 닿지 않는 분노가 의미가 있을까? 깊은 곳에서부터 응어리져있던 감정은 동건의 것이었다. 희석될 것 같지 않던 감정의 덩어리가 멀겋게 희석되고 가벼워져 날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동생이자 삼촌인 김기환의 마지막은 처참했다. 김기환이 그토록 정성을 들여 동건을 자극하고 정성을 들였지만, 죽음 앞에서는 허무한 일이었다. 유일한 핏줄인 동건에게 김기환이 남겨준 것은, 재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닥부터 시작할 수 있는 오기와 힘이었다. 김기환의 유골함을 보자마자 던져버리려 생각했던 동건이었다. 김기환의 유골함은 동건에게 어떠한 공격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토록 집요하게 동건을 삼켰던 사람에게 동건도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끝났다. 불타오르는 동건의 마음만 끝내지 못했었다. 단 하루도 살갗에 닭살이 돋지 않은 날이 없었다. 늘 긴장했다. 초조하고 불안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불안에서 탈출하기 위해 온몸을 던져 사업을 일궈내고 힘을 가지려 애썼건만,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지난 8년을 살아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떠나 혼자 외지에서 이를 악물고 버텨온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유골함은 동건의 물음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유골함은 대답을 하지 않으려는 듯 굳게 닫혀있었다. 동건은 장갑을 벗고 ‘古김기환‘ 이름 팻말을 손끝으로 만졌다. 더 이상 세상에 갇혀 있지 않으리라. 8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했다.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야 했다. 동건은 김기환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김기환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기운이 넘쳤다.


"감사하네요. 덕분에 많은 걸 가졌네요.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당신 손바닥에서 놀아나던 어린아이도 아니고요."


김기환의 혼령이 유골함에서 나와 동건의 목덜미라도 쥘 듯한 한 마디였다. 김기환을 자극하는 말을 했다.


"다시는 오는 일 없어요. 삼촌과 조카 관계는 오늘로 끝이니까.“


김기환의 유골함이 보이지 않게 완전히 돌아섰다. 다시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동건의 마음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전의 나약함을 털어버리듯 이마 앞으로 쏠린 앞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머리를 쓸어 올리자 자신의 앞쪽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보였다.


작은 흰색 꽃을 들고 있는 지연이었다.


’서지연.’


차마 힘껏 부르지도 못하고 가슴으로 외쳐보는 이름이었다.


지연은 자신을 부르는 말을 들었는지 동건에게로 걸어왔다.


"동건아." 그리웠던 지연이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멍한 동건의 눈동자는 지연의 얼굴로 가득 찼다.


반짝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뽀얗고 하얀 볼살이 드러나게 한 쪽 머리카락은 귀 뒤로 넘긴 덕분에 작은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지연의 귀에서 더 반짝거렸다. 지연은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동건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 이곳에서 너를 만날 줄은 몰랐어."


지연의 자연스러운 말투는 동건을 얼어붙게 했다. 장갑을 낀 채 손을 잡으려다 당황하여 장갑을 뺐다. 머뭇거리다 지연의 손을 잡았다. 손의 따스함이 동건에게 닿자 경직되었던 몸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잠깐이었지만 수천 개의 별이 동건의 옆으로 지나간 것 같았다.


"왜?"


머뭇거리다 겨우 물어본 것은 지연이 왜 여기에 있냐는 물음이었다. 지연은 동건의 궁금증에 대한 이유를 아는 듯했다. 장갑을 다시 끼고 지연은 동건의 눈을 바라보았다.


"김기환 아저씨를 뵈러 왔어. 나를 키워주신 분이야.“


”뭐?“


동건의 얼굴색이 변했다. 미간이 찌그러지고 지연의 그다음 말에 집중했다.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 시간 괜찮아?"


"알겠어."


납골당에서 나온 두 사람은 동건의 차에 함께 탔다. 지연이 옆자리에 앉자 동건은 차를 데우기 위해 시동을 켜고 열시트를 눌렀다. 침착하게 행동했지만, ‘나를 키워주신 분이야.’ 라는 말이 확성기를 켠 듯 머릿속에서 왕왕 울려댔다.


지연은 모든 것을 설명해주겠다고 긴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저씨가 신일아파트 사는 우리 엄마랑 나를 후원해서 좋은 집에서 살게 해주시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양녀가 필요한 부유한 집에 갈 수 있도록 해주셨어.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 주신 것도 아저씨야. 신일아파트 503호 네가 살고 있는 그 집. 바로 그 집에 살았었어. 너희 엄마가 기억하실지도 모르겠다. 나를 낳자마자 아빠가 아저씨 공장에서 일하시다 돌아가셨어. 그래서 아파트에서도 나가야 했고 나 때문에 직업도 갖기 힘들었겠지. 배가 고파서 내가 많이 울었었나 봐. 그런데 아저씨가 아빠 장례식을 치러주시면서 엄마 사정을 알게 됐어. 사업이 잘되던 때라서 집도 얻어주시고 나를 키울 수 있게 학자금이랑 생활비도 다 대주셨어. 근데 중학교 때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고아가 됐을 때, 지금의 부모님께 양녀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셨어. 우리 부모님은 키울 아이가 필요했던 건 아니고 사회에 내놓을 수 있는 딸 역할이 필요하셨던 거라, 많이 힘들었어. 내가 가끔 집을 나간 일 기억하지? 그때 네가 갈 데가 있었냐고 걱정하면서 물어봤는데. 아저씨가 엄마랑 살던 집을 그대로 두셔서 가끔 거기에 가 있었어. 살갑게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분은 아니셨지만 내가 벼랑 끝에 몰릴 때마다 죽지 않게 해주신 분이야. 부모님 괴롭힘이 심해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해졌을 때, 아저씨가 영국으로 유학 갈 수 있도록 해주셨어. 캠브리지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학자금도 주시고 생활비에 집도 얻어주셨어. 아저씨가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뵈러 왔었고 네 이야기를 들었어. 아저씨는 나한테 모든 걸 다 해주신 분이야. 내 인생을 살렸고 엄마와 나를 지옥에서 꺼내주셨어. 그런 아저씨가 왜 너에게 집착하셨는지는 모르겠다. 동건아,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얘기는 이게 다야. 네가 아저씨에게 어떤 마음이 있는지 변호사 아저씨랑 예찬 아저씨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 네가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아. 아저씨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왜 너에게 그렇게 하셨는지.


영국에 나를 만나러 올 때부터 네가 아저씨 때문에 얼마나 불안해하고 힘들어했는지 다 기억이 나. 그래서 너에게 아저씨 이야기를 할 수 없었어. 아저씨 이야기를 하면 날 떠날까 불안했나 봐. 한국에 네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숨김없이 다 말하기로 마음먹긴 했는데, 동건아, 정말 미안해. 미리 말하지 못해서.”


동건 인생에서 가장 최악인 사람이 지연에게는 가장 감사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 뭔가 잘못된 것만 같았다. 김기환은 그런 온정을 베풀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다. 지연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김기환이 쳐놓은 덫에 지연은 아직 속아있었다. 아니, 속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김기환에 대한 믿음이 매우 강해 보였다. 김기환이 죽고 없음에도 지연이 이렇게까지 김기환을 신뢰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김기환도 없는 지금, 지연도 조금은 알게 되지 않았을까? 지연은 동건이 생각하는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김기환에게 감사하고 있었으며 동건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었다.


지연과 이런 운명으로 묶어놓은 것도 김기환의 시나리오였을까? 김기환은 동건의 인생에 어디까지 손을 뻗은 것일까? 한 인간의 악랄함과 집요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탈탈 털어도 털리지 않는 기생충들이 더덕더덕 몸에 붙어 죽어서도 피를 빨아대고 있었다.


"김기환이 내 삼촌이었다는 것, 너는 몰랐던 거니?"


"나는 사실.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솔직하고도 태연한 말에 동건은 놀라 머리털이 쭈뼛 섰다.


"학교 스탠드에서 사탕을 줬을 때부터? 아니면 그 전부터?"


"음. 고 1 같은 학교에 입학하는 너를 멀리서 보고 아저씨가 조카라고 이야기해 주셔서 알고 있었어."


"고1 입학 때부터 알고 있었구나?"


"응."


"왜 얘기하지 않았어?"


"아저씨가 얘기하지 않길 원하셨고 나도 너를 모르니까 내가 양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이 학교에 알려질까 얘기하지 못했어."


"만나면서도 나를 믿지 못했구나."


"아니. 너랑 헤어질까 두려웠어."


"우리가 만나는 걸 김기환도 알고 있었던 거야?"


"식당에도 가서 협박하신 걸 보면 알고 계셨을 거야. 처음부터. 네가 영국에서 자리를 잡았다면 아저씬 널 금방 찾으셨을 거고. 네가 영국에 계속 머물지 않은 건 다행이었어."


'다행'이라는 말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리석었던 자신을 충분히 자책했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만들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죽어서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악마의 타겟이 하필 나였다니. 동건은 악마에게서 아버지도 잃고 자신의 젊은 날도 혼자 견디느라 쓴 눈물을 삼켰다. 납골당 유골함 앞에서 했던 다짐이 하얗게 가루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울분을 삼키고 있는 동건을 보며 저 위에서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잡아도 잡히지 않을 영혼이 끝까지 동건의 바짓가랑이를 꾸역꾸역 잡아채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도통 나아가지 않는 꿈에서 본 장면같았다.


쏟아지는 눈물이 볼을 타고 툭툭툭 흘러내렸다. 니트로 여몄던 목선이 울렁거렸다. 옆자리에 지연이 있는 것도 잊고 “꺼억 꺼억,“ 소리를 내며 참았던 감정을 모두 토했다.


지연은 동건이 충분히 울 수 있도록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아주었다. 김기환의 납골당에 놓아두려던 작은 꽃을 흙바닥에 버렸다. 동건을 만나는 날 하필 김기환을 위한 꽃이 손에 있었다. 부츠를 신은 발을 들어 꽃을 질근 밟아버렸다. 격한 감정을 쏟아내고 있는 동건이 뿌옇게 사라져갔다. 차를 등지고 먼 곳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던 오늘이 생각보다 고통스러웠음을 알았다. 동건에 대한 지연의 마음이 컸다.


차량 유리에 뽀얗게 김이 들어찼다. 지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아!" 차가운 공기를 뜨끈한 입김이 갈랐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자신이 생각한 그대로였다. 김기환과의 인연을 솔직하게 말하는 그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것. 동건은 자신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짓밟힌 꽃같았다. 지연의 마음 안에 살던 희망과 가능성이 잘근 잘근 밟혔다. 다시는 처음의 모습과 같게 될 수 없었다. 얼굴을 아무렇게나 슥 닦고는 빨갛게 식어버린 손을 외투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흙바닥과 부츠의 굽이 서로 만나 질겅거리는 소리를 내며 차를 뒤로하고 걸었다. 그렇게 동건을 떠나갔다. 동건은 온통 김기환으로 테이핑되었던 자신의 맨몸을 벗기는 중이었다. 울분은 피투성이 딱지가 되어 테이프에 엉겼다. 피가 솟구쳐 다시 튀어나왔다. 터져버린 울분과 피투성이가 감정에 동건을 흠뻑 적었고 마르지 못한 채로 축 늘어진 핏덩어리 거즈면처럼 다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깜깜한 밤과 같았다. 어리석던 지난날에 대한 자책. 몸이 거꾸로 바닥에 내려꽂히는 듯했다. 김기환이 동건의 인생을 휘저어 놓을 동안 속수무책으로 낚인 건 동건 자신의 탓이었다. 어리석고 무지했던 자신의 모습을 처음 마주했다. 앞에 있는 동건은 다른 모습이었다. 우왕좌왕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어린 아이였다. 핸들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멈출 줄 모르는 눈물로 빨개진 눈에는 어린아이와 어른이 함께 있었다. 감정의 격한 배출로 넝마처럼 늘어진 동건이 정신을 차려보니 지연은 떠나가고 없었지만, 달콤한 커피 사탕 향은 옅게 남아 있었다. 동건은 뽀얗게 김이 서린 유리창을 모두 열었다. 차가운 바람에 흘러내린 눈물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며 말랐다. 퉁퉁 부어버린 입술을 차디찬 바람에 맡겨버렸다. 울렁거리던 목젖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납골당이 앞에 있었다.


아직 납골당이라는 것을 인식한 동건은 창문을 올리고 천천히 기어를 D로 놓았다. 이마부터 얼굴을 한 번 손으로 쓸어내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김기환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젠 정말 끝이야 라고 반복하고 다짐하듯 그렇게 바라보았다. 악셀레이터가 우웅 하는 소리가 들리고 뒷바퀴에서 흙먼지가 날렸다. 이제 정말 끝이야라며 손사레를 치는 모습 같았다. 흙먼지가 커다랗게 파도같이 일어 납골당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차는 부드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그곳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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