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SPECT Mar 15. 2024

유배

생각보다 좋았던 유배지 토론토

며칠째 디제잉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그때만 해도 디제잉을 배울 수 있는 곳은

홍대 또는 강남에만 위치하였고, 대부분의 배울 수 있는 곳도 지금처럼 배울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진짜 어두운 분위기의 왠지 어린 학생의 신분으론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이었고,

그 당시에만 해도 나도 모르게 나의 장기를 적출당할 것만 같은 곳에만 연습실이 존재했다.

이후 22년도의 나 첫 작업실

당시만 해도 DJ 문화가 발달되어있지 않은 한국은 DJ라는 직업은 나이트클럽이 아니면, 마니아들이 가는 클럽 몇 개 말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인터넷 리서치를 하며, DJ가  녹음된 음악을 라이브로 재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디스크자키(Disk Jockey)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쿵짝쿵짝 거리며 많은 장르를 듣는 거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진짜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에 잠겨 항상 음악을 듣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캐나다 토론토라는 곳으로 도피 유학을 가게 된다.

사유는 당연하게도 공부를 안 하는 학생을 아들로 둔 학구열이 높았던 분당 엄마의 치맛바람이 나를 토론토라는 곳으로 보내게 된 것이다.


"근데 도피는 내가 원해서 가는 게 도피 아닌가...?" 마치 연산군이 유배지로 보내질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안 가고 싶다고 울고 불고 난리를 치던 나는 요즘 학생비자가 늦게 나온다는 소식을 유학원에서 듣고 조금의 안정을 되리라던 찰나,

국회의원 아들도 한 달 이상은 걸린다는 학생 비자가 2주 만에 나오는 기적 같지 않은 기적을 보았고, 눈을 떠보니 캐나다 피어슨 국제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하와유 앤유?" 였던 내가 향수병에 시달리며, 몇 달이 지났을까 오픈베타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YOUTUBE를 보던 중..


이게 웬걸.. 공부하려고 부모님이 보냈던 캐나다 토론토가 나에게 더욱 큰 무대이자 더 넓은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디제잉으로)

캐나다에 음악을 틀러온 세계에서 가장 예쁜 디제이 였던 쥬시엠

길거리에는 힙합을 듣고 있는 흑인 친구들이 넘쳐났으며, 캐나다에서 크기로 유명한 쇼핑몰 이튼센터 앞에는 디제잉 기계를 가지고 나와 버스킹을 하는 디제이들도 있고 날씨가 따뜻한 여름 시즌에 다운타운에는 항상 음악을 빼놓을 수 없는 크고 작은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러한 것들은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맨날 보던 YOUTUBE 속에는 Toronto DJ Festival 2006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영상은 찍은 장소가 지하철을 타고 30분 정도만 가면 있는 클럽이라는 걸 알고 보면서 "성인이 되면 저 클럽 먼저 가봐야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꿈을 키워 나갔다.


어느 날과 다를 것 없던 아침, 검은 머리 보다 금발머리가 더 많은 캐나다의 어느 사립 고등학교에 등교하였고, 학교가 끝나고 난 뒤에 나는 얼른 집으로 달려가

내가 당시 좋아하던 DAFT PUNK의 음악을 들으며, 띵가띵가 듣고 있었다. 그 당시 홈스테이를 하고 있던 나는 방에서 음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한국에서 부모님의 전화가 왔다는 홈스테이 이모님의 소리를 듣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불길한 예감이 내 뇌리를 스쳤다.

저번주에 보내드렸던 고등학교 성적표가 얼추 한국에 도착할 시간이 되었을 때 엄마의 전화가 온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마치 성난 황소 같았고, 마지막에는 결국 울음 터뜨리셨다.


없는 살림에 캐나다까지 보냈으면 공부를 해야지 왜 그렇고 살고 있냐며, 흐느끼는 처음 들어보는 엄마의 울음소리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은 나는 공부를 해야겠단 마음을 17년 살면서 처음으로 갖게 되었고 나는 캐나다에서 11학년(고등학교2학년)이 되었다.


그 이후 나는 그래도 다행히 분당 엄마의 선견지명이 맞았다는 걸 증명하듯 캐나다와 미국에서 유명하다는 대학교의 합격 통지서를 5개나 받았고, 한인 학생회 부회장을 하며 유배당한 것치곤 성공한 케이스를 보여준 것 같아 뿌듯하다.


지금 와서 엄마에게 물어보니, 내가 그런 적이 있냐며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말투로 말을 하신다. 나는 당한 거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좋은 결과인 거 같아 다행이지만, 아직도 어딘지 모르게 조금 분하다.

 

작가의 이전글 꿈 많은 방구석 DJ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