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좋았던 유배지 토론토
며칠째 디제잉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그때만 해도 디제잉을 배울 수 있는 곳은
홍대 또는 강남에만 위치하였고, 대부분의 배울 수 있는 곳도 지금처럼 배울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진짜 어두운 분위기의 왠지 어린 학생의 신분으론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이었고,
그 당시에만 해도 나도 모르게 나의 장기를 적출당할 것만 같은 곳에만 연습실이 존재했다.
당시만 해도 DJ 문화가 발달되어있지 않은 한국은 DJ라는 직업은 나이트클럽이 아니면, 마니아들이 가는 클럽 몇 개 말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인터넷 리서치를 하며, DJ가 녹음된 음악을 라이브로 재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디스크자키(Disk Jockey)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쿵짝쿵짝 거리며 많은 장르를 듣는 거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진짜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에 잠겨 항상 음악을 듣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캐나다 토론토라는 곳으로 도피 유학을 가게 된다.
사유는 당연하게도 공부를 안 하는 학생을 아들로 둔 학구열이 높았던 분당 엄마의 치맛바람이 나를 토론토라는 곳으로 보내게 된 것이다.
"근데 도피는 내가 원해서 가는 게 도피 아닌가...?" 마치 연산군이 유배지로 보내질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안 가고 싶다고 울고 불고 난리를 치던 나는 요즘 학생비자가 늦게 나온다는 소식을 유학원에서 듣고 조금의 안정을 되리라던 찰나,
국회의원 아들도 한 달 이상은 걸린다는 학생 비자가 2주 만에 나오는 기적 같지 않은 기적을 보았고, 눈을 떠보니 캐나다 피어슨 국제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하와유 앤유?" 였던 내가 향수병에 시달리며, 몇 달이 지났을까 오픈베타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YOUTUBE를 보던 중..
이게 웬걸.. 공부하려고 부모님이 보냈던 캐나다 토론토가 나에게 더욱 큰 무대이자 더 넓은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디제잉으로)
길거리에는 힙합을 듣고 있는 흑인 친구들이 넘쳐났으며, 캐나다에서 크기로 유명한 쇼핑몰 이튼센터 앞에는 디제잉 기계를 가지고 나와 버스킹을 하는 디제이들도 있고 날씨가 따뜻한 여름 시즌에 다운타운에는 항상 음악을 빼놓을 수 없는 크고 작은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러한 것들은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맨날 보던 YOUTUBE 속에는 Toronto DJ Festival 2006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영상은 찍은 장소가 지하철을 타고 30분 정도만 가면 있는 클럽이라는 걸 알고 보면서 "성인이 되면 저 클럽 먼저 가봐야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꿈을 키워 나갔다.
어느 날과 다를 것 없던 아침, 검은 머리 보다 금발머리가 더 많은 캐나다의 어느 사립 고등학교에 등교하였고, 학교가 끝나고 난 뒤에 나는 얼른 집으로 달려가
내가 당시 좋아하던 DAFT PUNK의 음악을 들으며, 띵가띵가 듣고 있었다. 그 당시 홈스테이를 하고 있던 나는 방에서 음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한국에서 부모님의 전화가 왔다는 홈스테이 이모님의 소리를 듣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불길한 예감이 내 뇌리를 스쳤다.
저번주에 보내드렸던 고등학교 성적표가 얼추 한국에 도착할 시간이 되었을 때 엄마의 전화가 온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는 마치 성난 황소 같았고, 마지막에는 결국 울음 터뜨리셨다.
없는 살림에 캐나다까지 보냈으면 공부를 해야지 왜 그렇고 살고 있냐며, 흐느끼는 처음 들어보는 엄마의 울음소리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은 나는 공부를 해야겠단 마음을 17년 살면서 처음으로 갖게 되었고 나는 캐나다에서 11학년(고등학교2학년)이 되었다.
그 이후 나는 그래도 다행히 분당 엄마의 선견지명이 맞았다는 걸 증명하듯 캐나다와 미국에서 유명하다는 대학교의 합격 통지서를 5개나 받았고, 한인 학생회 부회장을 하며 유배당한 것치곤 성공한 케이스를 보여준 것 같아 뿌듯하다.
지금 와서 엄마에게 물어보니, 내가 그런 적이 있냐며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말투로 말을 하신다. 나는 당한 거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좋은 결과인 거 같아 다행이지만, 아직도 어딘지 모르게 조금 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