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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서제미 Sep 19. 2024

한 끼 밥에 묻어난 정

밥 해 나르던 그때 그 시절, 희망은 도처에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보람이 있었던 때가 언제였어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을 때가 있다.

그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성취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때요"라고 답을 한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2주에 한번 하루 6시간씩, 주 5일 동안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17명까지 참여한 구직자들과 웃고 울었던 시간은 인생의 황금기였다.


나를 키운 건 구직자들이었다. 성취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매일 쏟아지는 감동을 나누고 싶어 글을 썼고, 방송을 했으며, 어디서나 자신 있게 강의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대통령 앞에서도 성취프로그램  목요일 오전 '만나는 마당' 이력서 쓰기를 진행했으니(이에 대한 글은 나중에 별도로 쓰기로 한다)


이쯤 해서  "성취프로그램, 그게 뭐죠"라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성취프로그램은 고용노동부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구직자들의 취업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전문기관에 의뢰하여 만든 집단상담프로그램이다.  


지금은 개정을 거쳐 4일 동안 하루 6시간씩 주 24시간이었지만 최초 프로그램은 5일간 월~금, 오전 9시~오후 4시까지,  주 30시간씩이었다.


성취프로그램의 주목적은 취업준비를 하는 구직자를 대상으로 구직효능감 자신감을 끌어올리고, 이들이 효과적인 구직기술을 습득할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2000년 최초 만들어진 구직자를 위한 집단상담프로그램


성취프로그램이 처음 세상에 나온 해는 2000년이었다.


이름도 생소한, 그것이 무엇인 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성취프로그램, 이게 뭐지, 아 성공적인 취업으로 가는 지름길의 약자. 정도였다.  


진행자 선발 공고가 나왔을 때만 해도 모르니 관심이 없었다.  


성취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구직자들의 긍정적인 피드백이 이어지자 직원들에게도 체험학습의 기회가 주어졌다.  구직자 입장에서 5일간을 보낸 후, 눈은 밝아졌고 마음은 환해졌다.


'바로 이거야,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도전해서 진행자가 될 거야' 라며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2차 진행자 선발 공고가 뜬 거였다.


성취프로그램 2기 진행자가 된 것은 나에게는 큰 선물이었다. 


면접을 보던 날 어찌나 떨었던 지 강의시연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그때 받았던 피드백만 생생하게 지금까지 남아 있다.


면접이 끝난 후 면접관이 해주었던 피드백은 진행자가 되어서도 나를 따라다녔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 얼버무리지 말고 발음도 정확하게 당당하게 씩씩하게 하라'는 말을 진행자 교육을 받으면서도 강의를 때도 항상 되새겼다.


진행자교육은 강도 높게 이어졌다. 집체교육, 개별 시연 등을 통해 끊임없이 피드백을 받았다.  '말이 빨라요', '발음이 부정확해요', '시선처리가 불안정해요', '얼굴표정이 딱딱해요' 등등.


돌이켜보면 수백만 원 수강료를 냈고 받을 집단상담프로그램에 대한 진행과 강의에 대한 코칭을 무료로 받았으니 행운 중 행운이었다. 


공감이 필요한 것에는 공감을, 경청이 필요할 때는 최대한 주의 집중해서 경청을 하는 것들을 익히고 체험하며 집단상담프로그램 진행자가 갖춰야 할 덕목들을 배웠다.



한 끼 밥에 묻어난 정


2000년 첫 성취프로그램이 생기고 2001년 두 번째 진행자가 되었으니 초창기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구직자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집단상담프로그램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구직자들에 대한 지원은 최소한이었다.  필요한 자료준비물과 약간의 간식비 정도였다.  


하루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오전은 9시~12시, 오후는 1시~4시까지이니 점심이 문제였다.  무슨 상담이든 라포형성이 중요하듯이 집단상담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행자와 참여자 간 라포형성이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좌우했기 때문에 구직자들과 같이 먹는 점심 한 끼는 그냥 밥이 아니었다.  '점심 드시고 오후에 만나요'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중식비를 달라고 건의했지만 예산이 한정되어 있으니 힘들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무엇보다도 취업을 하기 위해 온 구직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잘 알기에 인근 식당에 가셔서 점심을 사 먹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새벽에 일어나 구직자들이 먹을 밥을 해서 날랐다. 한 회차당 진행자 포함 최소 12명에서 18명까지 먹을 밥을 진행자 2명이 집에서 해 온 것이다. 


월요일 점심시간에 "저희들이 밥을 해 왔으니 같이 먹어요'라고 하면 놀라던 구직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화요일, 수요일이 되면 구직자들이 집에서 반찬을 가져와 목요일, 금요일이 되면 식탁이 풍성해졌다. 


점심 한 끼를 나눠 먹으며 취업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 시절, 모든 시간들이 보람이었다.


지금도 어제일처럼 생생한 기억이 있다.


하염없이 비가 내리던 날 아침, 프로그램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1기 진행자였던 동료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떡하죠.  딸내미를 안으려다 밥을 엎어버렸어요"


맞벌이 부부였던 동료는 아침이면 큰 딸 학교 보내랴 둘째 딸 어린이집 보내랴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구직자들과 같이 먹을 도시락 통을 챙겨오다 손이 미끄러져 비가 내리는 길에 밥이 떨어져 버린 거였다.


우린 구직자들에게 식비예산이 내려오긴 전까지 밥을 해다 날랐다.  


후배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어요"라고 묻는다.


그에 대한 그럴듯한 답이 떠오르질 않는다.  단지, 내가 하는 일이 좋았고 집단상담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마다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구직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나아가게 했던 것은 '선생님 덕분에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그 말이었다.


그것은 서로를 살리는 꿈이자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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