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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서제미 Jul 11. 2024

그건 운명이었다.

우리 나라 최초 고용노동부 첫 직업상담원

"백향목, 백향목, 여기 한번 지원해 봐"

상담실장은 강의실 뒤 벽에 붙은 채용공고를 가리켰다. A4 용지에 인쇄해서 붙여놓은 공고문에는 일반상담원과 책임상담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문이었다. 


일반상담원은 학사이상 관련학과 전공이나 상담 관련 경력 2년 이상 등이었고, 책임상담원 석사이상 관련학과 전공자나 경력 5년 이상이었나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랬던 거 같다.  


그때 당시 채용공고를 찾아보려고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Gemini, Copilot, ChatGPT에게 물어봤더니 엉뚱한 답변만 한다.


그나마 Gemini에서 가장 근접한 정보를 보여주긴 하는데 자격요건도 모집인원도 다 틀리다.  맞는 것이 있다면 모집 지역이 서울, 대구, 광주라는 것과 모집기관은 노동부, 직무는 구인구직 취업알선 담당 정도다.


상담실장이 나에게 지원해 보라고 한 날이 서류 접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이력서를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던 결혼 7년 차인 전업주부였다. 경험이 있다면 청소년상담실이나 가정폭력 상담실에서 상담을 했던 경력 정도였다.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망설였다. 아이들이 6살, 4살이었고 자신이 없었다. 망설이고 있자 상담실장이 그동안 지켜봤는데 백향목이라면 잘할 같아서 추천하는 것이니 지원하라면서 손수 이력서를 가져다주었다.


백향목은 상담 관련공부를 시작할 때 상담의 향기가 백리까지 퍼져 내담자에게 평화를 주자는 의미로 지은 닉네임이었다. 


나에게 지원해 보라며 추천을 한 상담실장은 그동안 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항상 제일 먼저 도착해 맨 앞에 앉아서 공부를 했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는 성실한 모습을 높이 산 거다. 그뿐만 아니라 상담하는 모습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살기 위해 시작한 공부가 인연이 되어 


내가 상담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살기 위해서였다. 둘째 아이를 낳고 찾아온 산후우울증은 시시때때로 나를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아파트 5층이상을 올라갈 수가 없었다. 자꾸만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혹시라도 책을 읽으면 거기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어찌 보면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작가 바질이었다. 책을 통해 경험을 하고자 했던. 발은 땅을 딛고 있었지만 마음은 늘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담기질 않았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 지 알고 싶었다.  살아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상담 관련 공부였다.


다양한 상담이론을 접했고,  MBTI, 교류분석, 효과적인 부모역할 교육, 치료레크리에이션을 그때 알게 되었다.  상담을 하면서 나를 들여다보았다.  내면에 들어 있는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상담이론에 제일 먼저 나를 접목해 보았고, 내담자를 상담하면서 조금씩 치유가 되었다.


살기 위해 시작한 공부였으니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그것이 좋게 보였던 거다.


상담실장의 권유로 이력서와 관련서류를 준비해서 마감시간이 거의 다 되어 제출했다. 제출한 후에도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지, 노동부가 무엇을 하는 곳인 지 몰랐다. 국가기관은 물론 공무원에도 관심이 없었던 터라 조직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서류제출을 하면서 우리나라에 노동부라는 기관도 있구나를 처음 알았다. 그러니 당연히 구인구직이라는 말도 처음 들었을 수밖에 없다. 취업이라는 것은 대학 졸업하고 딱 한번 막연히 기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봤던 시험이 전부였다.  물론 결과는 불합격, 그때 당시 언론고시였던 시험에 공부를 안 하고 도전했으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운명이 되어버린 노동부 첫 직업상담원


그러니 무엇을 알았겠는가?

합격할 거라는 기대는 1도 없었다. 그런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온 거다. 그때부터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실력 테스트도 한다는데 컴퓨터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도대체 무얼 할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면접 보러 가기 일주일 전에 복지관에서 문서작성 교육을 받았던 것이 전부였던 그것으로 테스트에 통과를 하게 되었다.


청삼환을 먹고도 떨린다는 나에게 친정아버지는 "우리 딸, 절대 기죽지 말고 혹시라도 아이들이 어려서 직장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보면 딱 이렇게 말해라. 우리 부모님은 2남 2녀를 그 누구 못지않게 사회에서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훌륭하게 키워주셨습니다. 그 부모님이 오늘 제 손을 잡고 딸아 걱정 말아라. 우리 손자들은 네가 일하는 동안 우리가 잘 키워줄 자신이 있으니 너는 일하는 여성으로 당당하게 나가서 사회의 일원이 되어라'라고.


나는 그날 족집게처럼 나온 그 질문에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던 그대로 답변을 했다.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꼭 합격할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사람처럼, 그건 운명이었다. 들어보지도, 본 적도 없었던 직업이. 


그렇게 나는 우리 나라 최초 고용노동부 직업상담원이 되었다.


추신)글 발행은 매주 화, 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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