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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자 Apr 05. 2024

45년 지기 친구에게 쓰는 편지


내 혈육 같은 친구 봉수엄마에게



내가 자네를 만난 건 반세기가 지난 1970년 초였지. 아마? 그때 마산자유무역 지역이 조성되면서 한라건설이 큰 공장을 지을 때였어. 봉수 아버지가 현장 소장으로 내려오시면서 자네 가족이 우리집 이웃으로 살게 되었지. 그때 처음 본 봉수 엄마의 자그마하고 뽀얀 얼굴이 지금도 기억이 나. 4살, 2살 남매를 둔 완전 서울내기 사람이었어. 그에 반해 나는 체격도 크고 한창 고된 시집살이를 겪던 때라 볼품이 없었지. 나를 처음 보곤 속으로 ‘경상도 사람들은 다 거칠다던데...’라고 생각했다고, 먼훗날 봉수 엄마가 웃으며 이야기 했었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 잘 맞는 구석이 많았어. 우리집 애들은 5살, 3살이라 봉수 엄마 두 아이와 같이 세워두면 5살, 4살, 3살, 2살 쪼르르 서 있는 게 한집 식구처럼 어찌나 보기 좋던지. 나는 집안 식구가 많고 원체 바쁜 일상이니 봉수 엄마가 우리 애들 밥도 챙겨주고 늦게까지 놀다가 잠이 든 아이들을 데리러 가던 날도 많았어. 그 기억도 나네. 봉수 아버지가 아이들을 자주 목에 태우고 동네를 돌곤 하셨잖아. 그럼 남은 아이들이 “나도, 나도요!” 하면서 봉수 아버지를 조르곤 했었지. 이젠 아주 먼 일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네.



마음속으로 워낙 의지를 많이 했어서일까. 3-4년이 지나 봉수 아버지 일이 끝나고 자네가 서울로 돌아간다는 걸 알았을 때 참 많이 섭섭하고 허전했다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봉수 엄마는 마산을 떠나서도 우리 가족을 자주 서울로 초대해주었지. 처음 서울 나들이 가던 때가 떠올라. 지금은 없어진 북마산 역에서 새마을 열차를 타고 가면 나도 아이들도 서울 구경을 간다고 들뜨곤 했었지. 기차 칸에 수레를 끌며 장사하시던 아저씨에게 계란과 밀감을 사먹으며 천리길을 달려 서울역에서 내리면 파김치가 된 우리 식구들을 마중나온 봉수와 빙글이의 웃는 얼굴. 그 얼굴이 눈에 선하네.


이름만 들어본 서울 강남구에 있던 자네 집에 갔을 때, 내가 생선을 좋아하던 걸 기억해 손바닥보다 더 큰 갈치를 구워주던 봉수 엄마의 마음도 잊지 않고 있어. 덕분에 해마다 아이들 방학 때면 친척집 방문하듯이 서울 나들이를 가선 큰 놀이공원, 남산전망대, 높이에 깜짝 놀랐던 63빌딩도 구경할 수 있었지. 그런 나를 보며 서울에 살던 언니가 “윤자야, 너거 식구들은 서울 사는 나보다 더 서울을 많이 아네.”하며 부러워했었어. 참 고마워. 봉수 엄마.



사실 봉수 엄마에게는 고마운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지. 내가 시어머니 시동생 문제로 힘들고 마음 아파할 때 언제든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힘을 주던 사람. 말없이 기도해주던 당신은 나의 버팀목이었어. 그래서 남편 사업이 힘들고 기울 때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도 자네였어. “봉수야 너희 집에 짐 좀 맡겨도 될까?” 해놓고는 정신이 없어 잊어버리고 마산을 떠났는데...봉수 아버지가 천리길을 마다 않고 마산 우리 아파트를 찾아와 경비 아저씨를 만나보고는 안심하고 올라가셨다지. 어쩜 그럴 수 있었을까...



며느리가 “어머니 준석이 크는 것도 보시고 이번 겨울은 저희 곁에 계세요.”하는 말에 일산에 보따리를 풀고 잠시 동안 머물 때 자네 집에 찾아갔었잖나. 따뜻한 저녁밥을 차려주곤 내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울어주었지. 자고 가라는 손을 뿌리치고 늦은 밤 버스에 올라탔을 때, 자네는 정류장에서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 뒤늦게 버스 안에서 지갑 속 하얀 봉투를 보고 놀라 전화했을 때 점심이라도 맛난 거 잡수라고 많이 넣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던 목소리를 내가 어떻게 잊어버리겠나. 15년 전 30만원이라는 큰 돈을 스스럼없이 내게 주었던 봉수 엄마. 나의 속 깊은 친구여. 그때 받은 마음은 내 평생 마음의 빚이자 빛으로 남을 거야.



그 일도 기억하는가? 내가 처음 새벽에 상가 청소를 다닐 때 자네는 손주 하준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그 사이 KTX를 타고 나를 찾아왔었지. 근처 식당에서 만난 우리는 밥 한 끼를 같이 먹고선, 손주가 돌아오기 전 서울에 도착해야 하는 자네와 아쉽게 헤어졌었지. 나를 보니 걱정했던 것보다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며 마음이 놓인다던 자네의 따뜻한 마음. 그 마음이 있어 내 마음도 덜 추울 수 있었다네.



언제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세월은 너무 빠르고,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란 언제나 알 수 없는 것이지. 50대 후반에 어린 손주 하준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나의 친구. 아토피가 심한 손주를 극진히 키웠지만 적응 부족으로 학교 생활에 힘들었던 날들… 대안 학교 보내라는 선생님 말씀에 눈물로 호소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참 가슴이 아팠다네. 대학에 가기 싫다고 집에만 있을 때는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럼에도 한 번도 내색 않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준이를 키워낸 20여년의 세월. 너무 수고했고 너무 대단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얼마 전 자네가 연락했었지. “하준이 논산 훈련소에 보내고 조금 전에 왔어요. 여러가지 부족한 점이 많아 걱정이에요. 기도 부탁해요”라며. 이전에도 하준이 기도는 가끔 했지만, 내 기도만으로는 힘이 부족할까봐 신심이 좋은 친구에게 부탁을 했어. 내 친구의 손주를 위해 같이 기도를 해달라고. 몇 달 후 하준이가 배치를 잘 받고 휴가를 올 것 같다고, 기도 덕분이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어찌나 내 일처럼 기쁘던지. 기도는 그냥 받으면 안 된다고, 기도값이라며 보내준 완도 최상급 전복을 보면서도 나는 생각했다네. 당신은 언제나 마음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언젠가 서울에서 우연히 봉수 유치원 친구들을 만났던 날. “우리 참 오래된 친구이지!”라는 이야기를 듣곤 내 생각이 났다지. 나에겐 더 오래된 친구가 있다고. 나도 같은 마음이야. 고향도 학연도 아무런 연관도 없는 우리는 과연 어떤 인연일까? 그 인연에 깊이 감사해. 그냥 좋은 게 좋다고 대충 대충 살아가는 나에게 자네는 비타민 같은 존재야. 작지만 큰 그릇이고, 베풀고 나눌 줄 알고, 신심이 깊은 사람. 그래서 늘 당신을 존경해.  



이 편지로 고마운 마음을 다 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써보고 싶었어. 봉수 엄마, 하준이 할머니, 그리고 나의 버팀목이자 친구. 안명숙. 보고싶어. 사랑해.



2024년 봄을 기다리며, 친구 윤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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