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쓰고 부자 되세요

by 박성열

김혜리 평론가의 인터뷰를 보다가 메모해두었던 '글쓰기는 소유'라는 말. 한 영화를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선 블루레이를 사는 것도, 여러차례 반복해서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닌 그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라는 그녀의 말. 동의한다. 글쓰기는 (글감에 대한)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깊은 이해가 가능해질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니까.

또한 글쓰기에 대해서 평론가 신형철 씨는,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이야기는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라는 그의 또 다른 문장과 궤를 같이 한다. 시나리오 작가가 결말을 구상할 때, 관객들이 이야기를 쫓아오다가 결말에 다다랐을 때 이것이 아닌 다른 결말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치밀하게 구성해야 한다는 것처럼.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단 하나의 길을 찾듯 모든 표현에는 그것을 온전히 담은 단 하나의 정확한 문장만이 있을 것이라는 것.

글쓰기가 어려운 것은(혹은 오래 걸리는 것은) 단 하나를 찾기까지의 과정이 지난하기 때문에. 지금 가진 것으로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어서 알쏭달쏭한, 그래서 뭉뚱그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비참해서 계속 쓸 수 밖에 없다. 더 많이 의미를 수집하고 더 많이 지면을 채워야 닿을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 비참함으로부터 배웠으니까.


글쓰기가 어렵다는 생각은 수없이 많이 했지만, 글쓰기가 싫다고 생각한 적은(적어도 성인이 되고부터는) 없다. 인스타그램에 영화에 대한 단상을 남기기 시작한 때부터 나는 글쓰기를 사랑하게 됐다. 상영관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순간부터 휘발되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시작된 작은 습관 덕분에 조금 더 많이 소유하게 됐다. 사랑의 모양이라든가, 복수의 유독함이라든가, 보이지도 만질수도 없는 것이 현현했을 때 체험하는 강렬한 자극 같은 것.

졸업을 하고 부모님과 미래를 이야기할 때 이따금씩 슬퍼질 때가 있었는데, 지난 대학생활 동안 조금 더 실용적인 것을 해보지 그랬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때. 보이지 않는 것의 위대함에 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가 그런 말을 한 것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물론 엄마니까 더더욱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비록 수 백편의 영화를 보고 몇십 편의 글을 쓴 것이 혹자에겐 취미생활로 가볍게 소비되더라도, 인사담당자들에게 구미가 당기지 않는 허황된 이력이더라도 후회가 없다. 더 많이 가지게 되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금 더 따뜻한 편지를 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최근 얼마간 영화에 대한 단상이 아포리즘 따위에 불과한 것인가 회의를 느끼며 약간의 자괴감을 느끼고, 심지어는 주기를 잃고 산발적으로 올리면서 꾸준함이라는 얼마 없는 장점까지 희미해져서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그래도 좋다. 글쓰기를 그만두면 내 세상은 점점 더 좁아질지도 몰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겉치레의 물질 뿐, 마음에는 공허만 남겠지. 더 이상 편지를 쓸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 나의 문장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도 계속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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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군데에 지원서를 넣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지금의 나는 아무래도 팔릴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글을 다시 쓰기로 했다. 물론 조금 다른 종류의 글. 팔릴법한 글? 최소한 유용한 글? 이라고 해야할까. 디지털 매거진이 유행이니까 영화에 대한 주간 매거진을 만들어보자. 할리우드 소식과 개봉 예정 영화에 대한 진행상황, 박스오피스 수익 같은 것들. 열흘 정도는 행복했다. 몰입하는 내 모습이 대견해서. 얼마 못 가서 싫증을 느낀 것은 너무 느리고 재미도 감동도 없는 그런 글이어서. 소스를 발견했을 때 이미 다른 매거진에서는 업로드까지 끝나 있었고, 나는 그 매거진의 기사를 읽고 다시 재가공해서 뒷북을 치는 꼴이었다. 제기랄.

아무래도 속도에서는 경쟁이 되지 않겠다싶어서 무겁더라도 깊이있는 글을 써야지 싶었다. 브런치는 문장친화적인 플랫폼이니까, 곧바로 작가 신청을 해서 또 썼다. 달고도 쓴 아이러니를 담은 영화를 주제로. 시리즈를 여는 첫 글은 마음에 들었다. 내 이야기가 많이 들어간 말그대로 내 글이어서.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해석하기 위해서 유수 평론가들의 생각을 찾았다. 무의식 중에 정답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준으로 글을 썼다. 정보를 큐레이팅하고 표현을 나의 언어로 변환하여 재생산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선택하는 것과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 편집하는 일은 너무나 소중한 작업이지만. 독창적인 것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여전히 큰 것은 어쩔 수 없다.

안타깝지만 내가 바라는 모습과 내가 잘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 것 같다. 내키지 않은 회사의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내가 남들과 구별되는 점이 뭘까 고민하다가, 하물며 게임 속 캐릭터들도 자신만의 스킬을 가지고 있는데 나라는 인간은 뭐가 잘난 것일까 좌절하다가 내린 결론.

지금껏 내가 이뤄온(실체가 없는 무형의 자산과 가치를 제외한) '성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들은 말하자면 명백히 타의에 의한 결과. 제도권에 충실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어진 인내의 성취.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선생님과 학교의 실적을 위해, (뭐가 좋은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른들이 좋다고 하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기대를 동력삼아 열심히 잘 참아낸 것에 대한 보상. 뻣뻣함(달리 말하면 성실한 순응성)이 장점인 내가 변화가 일상인 직업세계로의 편입을 바랄 때 마주하는 고통이란 당연한 것이겠지만...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하는 씬에서 유연함은 변덕이 아닌 미덕이므로 20여 년 간 훈련된 천성을 바꾸는 일은 몹시 힘든 것이겠지. 숫자만 놓고 생각해봐도 20년 정도는 그 고통을 겪어내야 공평한 것이 되니까.

너무 쉽게 영달을 바란 것 같아서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글을 쓰면서 고통을 만끽하려는데 갑자기 일을 하게 됐다. 일전에 탈락했던 곳에서 결원이 생겼다는데. 디지털 뉴스를 만드는 일. 외신을 읽고 번역하고 다듬어서 전하는 일. 때때로 정치부에 외근을 나가 현장을 마주하고 취재를 하는 일. 면담을 하면서 부국장님은 빠르고 정확하며 넓으면서도 (가능하다면)깊기도 한 기사를 원하는 것 같다고 느겼다. 시나리오 작가의 마음가짐과는 정반대의 것. 세계를 만들어내고 어쩔 땐 그 세계 속에서 길을 잃고 유영하기도 해야하는 작가의 숙명과 반대되는 디지털 기자의 일. 고통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어떻게 했는데. 그토록 바랄 땐 다가오지 않던 것이 왜 하필 지금에서야. 야속하다.

이제는 영화가 아닌 다른 일을 하면 나는 나를 배신한 것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에까지 미치지는 않는다. 삶의 어느 순간에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했으니까. 기자의 일도 걱정이 앞서지만 두렵지는 않다. 글을 쓰는 일이니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겠지. 일부는 가질 수 있게도 해주겠지. 돈을 차곡하게 모아서 겨울엔 멀리 떠날수도 있겠다. 솔과 이탈리아에 가자고 약속했는데. 어디든 아무렴 좋겠다. 다른 세상이 있는 곳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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