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7일 친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이른 새벽 아버지로부터 3통, 엄마로부터 1통의 부재중 전화가 수신된 것을 확인했을 때 부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화를 되거는 게 크게 두렵지 않았다. 소식이 예상과 다르지 않음을 전달받았을 때 놀라지도 않았다. 예상이 빗나가길 바라면서도, 너무 놀라지 않기 위해 소식을 듣기도 전에 단념하려는 스스로의 모습이 기이했다.
장례식장을 마련하지 못해서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더 놀라웠다. 상을 치르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붕 떠 있는 시간이 생겨서 매트리스에 잠자코 누웠다. 무슨 생각을 해야하는지 고민했다. 아침을 챙겨먹어야 하나, 우스운 영상을 볼까. 은솔에게 언제 그리고 어떻게 말해야할까. 엄마아빠는 어떤 마음일까. 죽음 자체보다도, 그것을 둘러싼 주변의 모습을 헤아리느라 크게 슬프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사고'가 아니라 예측된 '현상'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런 점이 밉고도 싫었다.
가장 마음이 괴로운 것은 친할머니 때와 마찬가지로 부고 전화를 단 번에 받지 못했다는 점. 할머니 소식을 들었을 때는 23시 경 정도. 친구와 풋살을 하고 회식을 한 뒤에 샤워를 하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로부터 짧은 간격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고 확인하자마자 콜백했다. 아버지는 담담하게 소식을 전했고 근태 양해를 위해 당시 근무하던 아르바이트 매니저께 알릴 것을 당부했다.
그 때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몹시 슬프지도 않았다. 잠시 어안이 벙벙하다가 까무룩 잠에 들었다. 단 번에 전화를 받고 가슴 철렁하게 놀라서 깊은 애도의 마음이 들었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충분히 슬퍼하고 난 뒤에 보내드리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서. 전화를 받지 못함으로써 진정할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 속상하다. 내가 다치지 않기 위해 멋대로 상황을 종합해 미리 선고를 내린 것이 죄스럽다. 모든 이별은 이기적이기니까, 통보받는 것이 두려워서 그랬을까. 겁쟁이를 용서해주세요. 그렇지만 준비도 없이 한 번에 아주 잃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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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에 뵌 할아버지는 식사를 잘 하지 못해 너무나 말랐었고, 얼굴에서 총기는 고사하고 생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습관처럼하던 TV 모니터 속 자막을 돌림노래처럼 따라 읽는 타령을 할 기운조차 없어 보이셨다. 아버지께 앙상한 넙다리뼈 옆으로 늘어진 살가죽을 흔들면서 '이것 좀 봐, 이게 정녕 산 사람 몸이냐?' 라며 호통을 치신 모습은 내 기억 속 최초의 분노였다. 할머니의 치매가 깊어지면서 요양병원으로 모실지 말지 고민하던 때부터 종종 부자간 갈등이 있긴 했지만 손주들 앞에서 언성을 높이신 적은 없었다.
요양병원을 고려장이라고 생각하실만큼 완고했던 할아버지는, 그 고집이 좌절되고부터 더욱 고립된 것 같다. 팬데믹으로 면회도 가지 못한 채 외로이 집에 머무르시며 삶을 천천히 놓으셨을까.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이후로는 서둘러 그녀를 따라가겠다는 검은농의 빈도가 잦았다. 할아버지의 그 호통은 살고 싶다는 아우성이었을까, 속상한 원망이었을까. 올해 설에도 어김없이 할아버지는 검은농을 히셨고, 가족들은 흘렸다. 농담이 이번에는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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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유독 우리집을 아끼셨다. 삼형제 중 가장 멀리 떨어져 살거니와, 이 때문에 가장 가난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자주 찾아 뵙지 못하는 만큼 명절 때 하루 이틀 더 머문다던가, 서울에 사는 나와 누나가 이따금씩 방문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 정성을 갸륵히 여기셨는지 큰집들 몰래 용돈을 챙겨주시기도 했다. 나이 90먹은 할아버지가 용돈 주는 집은 드물다. 라고 말씀하시니 마음을 받기가 황송했다. 그래도 속없이 좋아서... 또 죄송스러워서 더 자주 찾아와 함께 수다를 떨고 식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귀가 어두워지시고 나서부터는 대화가 어려웠기에 어울린다기보다 모시는 것에 가까웠다. 거실 쇼파에 앉아 과일을 먹으면서 말 없이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고는 졸업이 언제인지, 사는 집은 춥거나 덥지는 않은지 물으시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입모양으로 대답을 유추하듯 알아들으시는 것이 최선이었기에 질문을 할 엄두는 나지도 않았다. 손짓발짓을 동원해서 어렵게 소통을 마치고 나면 배달음식이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물고 핸드폰을 봤다. 누나랑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궁리하거나 괜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시간이 지루하다고 느껴질 때면 할아버지댁에 찾아뵈라고 주문한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멀리 있어 자식 도리를 다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손주에게 떠넘기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속없이 용돈을 받아들면서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곱지 않은 마음을 먹은 게다. 어쩌면 내 생각이 아주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아버지가 입관 전 할아버지 얼굴을 매만지며 죄송하다고 하신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할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만들어주려고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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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명절 때마다 상계동을 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친척들과 아주 모이지 않을 수도 있다.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고, 가까이 살지도 않는다. 할아버지가 지내시던 집까지 팔리고 나면 정말 갈 일이 없을 것이다. 문득 아버지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고향에 갈 일이 없어진다는 것. 고향에서 찾을 사람이 없다는 것. 어떤 마음일까. 몸이 떠난 지는 오래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곳에 있을텐데. 상계동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가장 신나보이는 아빠인데.
할아버지는 전북 고창에 모셔졌다. 당연하게도, 나고 자란 곳이기 때문이다.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며 장지로 내려가는 길에 나는 삶의 끝에 어디로 돌아가야할까 생각했다. 태어난 부산? 자라난 김해? 배운 김천? 살아간 서울? 답을 내릴 수 없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기 때문일까. 내 친구 아저씨를 인터뷰하며 발견한 고향의 충분조건을 다시 떠올린다. 시간보다는 밀도, 인식과 시간의 일치 그리고 약간의 그리움. 늘 갈 수 없기 때문에 애틋한 유토피아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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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이 많기에 글을 쓰니까. 늘어내고나니 많은 것이 바로잡힌다. 마음을 내려놓는다. 이제서야 할아버지 할머니를 고이 보내드린다. 할아버지 할머니, 입관 때 마주보며 드리지 못한 회포를 이제야 전해드려요. 저를 당신네 삶의 자부심으로 여기며 품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영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