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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롱불 Jul 29. 2024

탈골된 팔에 남은 도움의 흔적

어릴 적 토끼(친칠라)를 5마리 키웠는데 너무 예뻤다. 그래서 토끼에게 줄 풀을 뜯기 위해 매일 자전거를 타고 동네 강둑 근처로 갔다. 그곳에서 동섭을 만났다. 동섭은 학교에서 10km가량 떨어진 '느러지' 라는 마을에 사는 친구로, 가끔 제일 멀리서 산다고 고무줄이나 엿처럼 길게 늘어져 멀다고 놀린 적이 있었다. 몽탄초등학교를 기준으로 느러지, 몽강리, 명산(파군다리), 대치리, 사창이 먼 동네인데 이 중에서도 느러지가 제일 먼 곳이다. 동섭은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중에 풀를 뜯는 곳에서 나를 만난 것이었다.


동섭이 집이 멀다고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집에서 맛있게 풀을 먹어줄 토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친구가 걸어가면 저녁이 되야 집에 도착할 것 같아 걱정되어 수락하였다. 그래서 낫과 마데를 놔두고 자전거 뒷자리에 동섭을 태우고 같이 가게 되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혼자 돌아오는 중 휘어지는 길에서 강 아래로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자전거 타다 넘어지며 왼쪽 팔의 땅을 짚었는데 팔꿈치가 반대 방향으로 꺾이면서 부러지고 말았다. 팔꿈치가 부러져 나도 모르게“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외치니 하교하던 중학생 누나가 언덕 아래에서 길로 올려주며 빼주었다. 너무 아파 정신이 없어 고맙단 말도 못 했다. 팔이 일반적으로 안쪽으로 구부러져야 하는데 반대로 구부러져 있어 놀라고 무서웠다. 너무 당황하여 울면서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갔다.


탈골된 팔로 울며 오는 내 모습에 아버지는 너무 놀라 얼굴이 하얘지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셨다. 내 인생에서 처음 보는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다급하게 뼈를 잘 맞춘다는 근처 이웃에게 부랴부랴 갔다. 그 아저씨는 내 팔을 강제로 맞추는 시도를 여러 차례 하였으나 팔이 맞춰졌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밤새 통증으로 잠을 못 자고 있는데 텔레비전에서 장송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대통령을 수행해 그곳에 갔던 많은 정부 요인이 사고를 당해 유명을 달리했다. 내 팔이 부러져 아픈 것처럼 우리나라에도 큰 아픔이 있었다.


팔이 너무 붓고 통증이 가라앉지 않자,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기차를 타고 목포의 차남수 외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엑스레이 사진을 보니 왼쪽 팔꿈치 뼈가 탈골되어 뼈가 5cm 정도 떨어져 있어서 겁이 났다. 원장님은 물리치료를 받으면 괜찮다고 했다. 뼈가 잘 붙도록 탈골된 뼈를 최대한 가까이 붙여 최대한 구부리고 깁스해고, 깁스한 아래팔 중간에 붕대줄을 고리로 만들어 목에 걸었다. 완전 환자가 되었다.


깁스 후에는 안쪽 피부에 물집과 때가 끼어서 엄청 가려워 젓가락으로 긁곤 했다. 2주 후 깁스를 푸니 이제 팔이 굳어서 펴지지 않았다. 장애인이 되었다. 보통 사람도 깁스 후 1주일만 지나면 근육이 굳어 펼 수 없다고 한다.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면 처음엔 수건을 두장감싼 핫팩으로 굳은 팔꿈치를 감싸고 있으면 따뜻해 지고 20분 후 근육이 이완된다. 이후 건장한 물리치료사 선생님이 오셔서 강제로 팔을 구부렸다 폈다하면 정말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아았다. 이러한 진료가 너무 아파 이대로 중단하고 싶은 정도였다. 물리치료 아픔(트라우마)으로 병원에 가기 싫었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중단해야만 했다. 그 결과 팔이 완전히 펴지지 않는 지체 부자유자가 되고 말았다. 그때 동섭을 데려다주지 않았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인데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부탁하여 내가 승낙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사실(왼쪽 팔이 구부러져 있어)에 괴로웠다. 꿈속에서조차 팔이 멀쩡한 나를 상상하며 돌아다니는 상황에 안타까워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학교체육 활동할 때 왼쪽 팔이 구부러져 테가나니 부끄럽고 나서기가 쉽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예외가 없다며 기계체조와 태권도를 해야 했다. 선생님들도 나를 평범한 보통 학생으로 받아들이며 가르친 것이다.


장애가 있으니 결혼도 못하고 일도 못하고 이대로 어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한 마음뿐이었다. 난 친구들과 활동이 줄어드니 소심해지고 한참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도 내려놓게 되었다. 하필 그때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 일어나 세상은 더욱 어수선해졌다. 마치 내 인생에도 먹구름이 드리운 듯했다.


하지만 학교 친구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 특히 짝꿍 철수는 내 책가방을 들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학교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위 머리숱이 적은 덕오라는 친구는 힘이 세고 태권도를 잘해서 따르는 친구들도 많았고, 덕 오와 어울리게 되고 덕오도 나를 이해해 주고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비슷한 일을 겪는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처한 상황이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재현이라는 친구도 나와 비슷하게 팔이 부러져서 대나무와 천을 이용해 깁스하였는데 장애가 남지 않았다. 알아보니 근육이 굳는 1주일 동안 매일 깁스를 풀고 팔운동을 꾸준하고 다시 깁스하는 일을 반복했다고 한다. 매일 근육이 찢어지는 아픔을 참으며 이겨낸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먼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도랑에 빠진 나를 구해준 중학생 누나, 철수나 덕오처럼 나를 돕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또한,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사건은 나에게 큰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도움의 손길이 숭고함을 마음속에 남겼다. 비록 불편한 팔이지만 남을 도울 때는 그 누구보다 건강한 팔이 되기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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