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작은 섬마을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부모님은 젊으셨을 때 크게 장사를 하셨지만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서 소일거리로 섬마을에서 해조류를 사다가 도시로 파는 중간 유통업으로 그 해 벌이를 하셨다. 섬 이곳저곳을 저 트럭 한 대로 하루종일 돌아다니다 해가 뉘엿뉘엿 산허리에 걸치고 어스름이 서서히 밀려올 때쯤 정적을 깨며 저 멀리서부터 "달달달달" 소리와 함께 부모님 목소리가 창문너머 내 귓가에 닿았다. 어떤 날은 생각보다 많이 샀다고 좋아하셨고 어떤 날은 그래도 오늘 고생한 만큼은 샀다고 만족해하셨고 또 어떤 날은 괜히 나갔나 하셨던 날도 있었다. 나는 트럭에서 내려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시는 엄마의 목소리 톤으로 그날의 수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때론 기쁨으로 충만한 목소리, 때론 한숨이 뒤섞인 목소리로 하루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트럭은 부모님의 삶과 희망을 담고 소금기 머금은 바다내음을 담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쉬지 않고 달려가는 우리 집 보물 1호였다. 시골은 버스나 택시가 많이 다니지 않기 때문에 집에 차 한 대라도 가지고 있으면 정말 도움이 많이 된다. 부모님의 트럭은 생계 때문에 꼭 필요했고 여객선을 타러 선착장을 갈 때나 밭에서 기른 작물을 실어 옮길 때나 이웃 주민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도 손과 발이 되어 주어 주는 소중한 존재였다.
트럭을 처음 샀던 날,
엄마는 고사를 지내야 한다며 정성스레 상을 차려 트럭에 올려놓고 절을 올리셨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떠들썩하게 치른 의식은 아니었지만 사고 없이 무탈하게 다니기를 바라는그 마음이 나에게는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마음을 헤아려 나도 트럭을 살피며 부모님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잘 지켜주기를 기도했다. 트럭은 나에게 부모님의 안부를 전해주는 존재였다. 집에 혼자 남아있을 때 저녁이 깊어가는데 트럭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부모님께서 왜 안 오시나 걱정이 들었다. 달달달 거리는 소리는 공부에 방해될 정도로 시끄럽긴 했지만 어서 빨리 들렸으면 하고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 소리가 나에겐 안전하게 다녀왔다는 부모님의 인사와 같았다. 내 방 창문을 열면 바로 앞이 대문이기 때문에 우리 집 트럭은 항상 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비싼 차도 아니고 멋진 차도 아니었지만 폭우가 쏟아지던 여름날에는 젖지 않게 학교에 데려다주었고 멀리 떨어진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나 선착장에 여객선을 타러 갈 때도 트럭이 있어 나도 편했다. 아버지께 전화하면 어김없이 "달달달"~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든지 부르면 달려오는 슈퍼맨처럼 말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이제 더 이상 장사도 할 수 없고 몸도 많이 허약해지신 부모님은 트럭을 거의 타지 않으셨다. 꼭 필요할 때 한 번씩만 운전하셨을 뿐이다. 도시에 살다 명절 때 집에 내려가면 그래도 아버지는 나를 태우러 선착장으로 트럭을 몰고 나오셨다. 여객선이 거의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차보다 먼저 내리기 위해 뱃머리 끝에 서서 선착장을 바라보면 한편에 세워진 파란색 트럭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마중 나오신 모습 같았다. 이제는 더 낡아서 새 트럭으로 바꿨으면 했지만 별로 타지 않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타겠냐며 그냥 끝까지 같이 가련다고만 하셨다. 달달거리는 소리는 더 심해지고 의자 가죽은 갈라지고 벗겨졌으며 여기저기 녹이 슬어 있는 게 쇠약해지고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하고 주름이 깊게 패인 부모님의 모습 같았다. 명절을 보내고 도시로 돌아갈 때도 어김없이 선착장까지 아버지는 나를 태워줬고 배의 기적소리가 출발을 알리면 아쉬움을 뒤로하고배에 올라탔다. 헤어짐은 힘들다는 걸 항상 느끼는 순간이었다. 뱃머리에서 멀어져 가는 선착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버지의 트럭은 아직 출발하지 않고 덩그러니 혼자 남아있었다. 점처럼 희미해져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말이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사고가 생겼다.
그 해 여름처럼 더웠던 날이 없었을 정도로 햇빛 속에 녹아내릴 것 같은 열기가 가득한 너무나도 더운 날이었다. 아버지는 트럭을 몰고 집으로 향하던 중 후진을 하다 길가의 담벼락을 허물어뜨리며 비탈길로 미끄러져 추락했다. 몸에 여기저기 멍이 들긴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으셨다고 했다. 트럭은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부품이 망가져서 수리가 필요했다. 부모님은 사고 소식을 자식들에게 전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상태가 심각한 것도 아니고 평소 신장이 좋지 않아 이틀 후에 광주의 한 대학 병원에 예약을 해둬서 내가 모시러 가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틀만 참자고 하셨던 것 같다. 그래도 교통사고인데 그날 바로 병원에 가셨어야 했었는데 말이다. 엄마에게 나중에 전해 들으니 사고가 있었던 날 밤 아버지는 혈뇨를 보셨다고 했다. 잘 드시지도 못하고 계속 누워계셨다고 했다. 그런데도 하루만 참으면 큰 병원에 가니 다음날까지 참으시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사고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우리 곁을 허무하게 떠나셨다. 심장마비였다고는 하지만 교통사고 후유증과 겹치지 않았나 싶었다. 나는 날벼락같은 소리에 앞이 캄캄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한숨이 뒤섞인 "말도 안 돼"라는 소리만 되풀이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너무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는 것이 정말 믿기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병원 예약 때문에 통화를 나누었는데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혼자 눈을 감으셨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고 죄송스러웠다. 마음 한켠이 세차게 후벼 파는 듯 아프게 아려왔다.
트럭은 유산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트럭은 보험 처리로 말끔히 수리를 마쳤다. 더 이상 주인은 없지만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려는 듯 너무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인생 역경을 담고 있는 이 트럭을 아무에게나 팔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형부가 맡기로 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당분간 자식들 집에 머무르기로 한 엄마는 그 트럭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그 더운 여름날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인데도 날이면 날마다 트럭이 세워진 곳으로 가셨다. 그리고는 트럭을 붙들며 아버지 이름을 부르시면서 울음을 그치지 않으셨다. 짠내와 쉰내가 풍길 정도로 몸이 축축이 젖어서 트럭 옆에 한참을 앉아있다가 집으로 돌아오시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말려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트럭을 붙잡고 울며 혼자말을 하는 모습에지나가는 사람들도 엄마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엄마에게 트럭은 아버지의 분신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긴 세월 두분이 저 트럭을 타고 다니며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나누셨을 터이고 운전석을 보면 아버지 모습이 그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트럭은 부모님 인생의 모든 조각들을 실어 담고 있었다. 소박하지만 찬란했던 조각들, 서글프기도 했지만 행복했던 조각들 말이다. 아버지도 수리가 완료된 저 트럭처럼 건강을 회복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이대로계속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엄마는 저 트럭을 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으로 힘이 드실 텐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없애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시간은 자꾸 가고 엄마는 더욱더 쇠약해지셨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트럭을 보내기로 했다. 평생 같이 산 가족을 보내는 것 같은 아픈 선택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마까지 우리 곁을 떠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트럭을 보내고 난 후 도로를 다니다가도 아버지 트럭과 비슷한 파란 트럭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쳐다보게 된다. 지금쯤 그 트럭은 어디에 있을까? 평생 작은 섬마을에서 부모님과 동고동락하던 그 세월을 담고 또 다른 누군가의 인생에 동반자가 되어있을까? 아니면 긴 세월 동안 달려온 다리가 다해 이제는 조용한 휴식에 들어갔을까? 그 어느 쪽이든 파란 추억 상자는 내 기억 속에 평생 남아있을 것이다. 고요한 바닷속 깊은 곳에 숨겨진 보물 같은 추억은 마법처럼 그 시절로 다시 나를 데려갈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있는 법이니까... 지금의 기록이 다시금 그때의 향수와 감정을 불러온다. 한 줄 한 줄 내 마음을 감싸 안아준다. 지나온 시간들 다 괜찮다고..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토닥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