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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냥해지고싶다 May 02. 2024

30대 외벌이 가장의 일상이야기(8)

종이컵

   비가 오는 날이면 평소에는 찾지 않는 따뜻한 믹스 커피 한잔을 하곤 한다. 건물 옥상 간이 지붕 위로 가느다란 빗줄기가 똑똑 떨어지고, 달콤 쌉싸름한 믹스 커피 한 모금을 홀짝인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종이컵은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 아래에서 다 쓴 종이컵을 보고 있으면, 종이컵이나 내 신세나 비슷하게 느껴져 한탄스러울 때가 있다. 5분 남짓만에 효용을 다하고 구겨져 쓰레기통에 던져지는 종이컵처럼 나 또한 금방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게 아닐까라는 걱정을 한다.


  수많은 직장 선배들이 있었고, 어느샌가 하나 둘 퇴직을 했다. 어떤 분은 정년을 맞이해서, 또 어떤 분은 계약기간이 끝나서. 어떤 이유던지 퇴직자들은 어지간해서는 본인이 일하던 곳으로 얼굴을 다시 비추지 않는다. 처음 한 두 번은 반가워하지만 그 이상 보게 된다면 민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후배들도 또한 이런 선배들에게 잘 연락하지 않는다. 연락할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에서의 효용이 다 끝나고 난 선배들은 어떻게 지낼까? 직장이라는 방패막이 사라지고 가정으로 또는 다른 직장으로 나가게 된 선배들의 운명은 다 쓴 종이컵일까? 


  난 한번 쓰고 버려질 종이컵이 되기 싫다. 일회용이 아닌 단단하고 어디서든 재사용 가능한 텀블러가 되고 싶다. 그렇기에 이제는 직장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직장 업무 외에도 어떤 것이든 담아낼 수 있는 튼튼한 텀블러가 되기 위해서. 


  그래서 요즘은 직장과는 관계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보는 중이다. 온라인 독서모임도 참여해 보고, 퇴직 이후에 할 수 있는 직업과 관련된 자격증 공부도 시작한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기에 힘들지만 퇴직 이후에 쓸모없어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에 더 열심히 도전한다.


  꾸깃꾸깃 접은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사무실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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