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울고 꽃이 피는 봄입니다.
꽃들은 서로 다투지 않고 조용히 제 차례를 기다립니다.
벚꽃이 폭죽처럼 피고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더니, 어느새 꽃은 지고 연둣빛 새순이 올라오더군요. 여린 잎사귀로 햇살이 투과되어 영롱한 것이 사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요. 어젯밤 산책길에 보니 그사이 나뭇잎들은 초록을 띈 채 훌쩍 커있더군요.
언젠가 세월이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고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걸 두고 한 말입니다.
꽃이 있더니 꽃은 사라지고 연두색 새순이 나있고, 작고 여린 잎사귀다 싶더니 이제는 제 모습을 갖춘 초록으로 변해있네요. 이런 나무의 변화를 보고 있으면 시시각각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 거죠.
"꽃 피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세월이로구나."
식물은 한 자리에서 붙박여 정적인 것 같아도, 안으로는 조용하지만 부지런하게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자연에 순응하며 그 에너지의 흐름에 가만히 제 몸을 맡기고 있는 걸까요.
오십을 넘어서자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전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생명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소멸을 향해 하루하루 늙어가는 건 아쉽지만 이런 시선을 갖게 된 것은 좋습니다.
차분히 변해가는 나무를 보며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에 더 익숙해지자고 고개를 끄덕여봅니다.
몇 주 전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몇몇 수치가 정상범위를 벗어나 있더군요. 건강을 유지하려고 꽤 신경을 쓰고 있는데도, 역시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이더군요.
역류성 식도염이 있어 2주 전부터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무릎이 예전처럼 짱짱하지 않습니다. 시력 청력이 서서히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걸 생각하면 잠시 씁쓸함과 아쉬움이 스쳐가지만, 그래도 이 정도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늙어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싫든 좋든, 우리는 섭리를 따르게 됩니다. 늙고 죽는 것이 어쩔 수 없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면, well ageing & dying 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죽음을 향해 잘 늙어가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그리고 더는 거창한 깨달음 같은 것들은 찾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십을 넘기고부터는 나이를 먹을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겸손을 알게 되더군요.
어쩌면 나이 들어서도 겸손을 모르는 것은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슬렁슬렁 봄밤을 걸었습니다.
문득 밤하늘을 보니 깎여나간 손톱같이 희고 가녀린 초승달이 걸려있고요. 그 아래로 더 하얀 이팝나무꽃이 팝콘처럼 화들짝 피어있고요. 산비탈로부터 달콤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달려드네요.
바야흐로 세월은 5월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