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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지 Apr 16. 2024

흐림 뒤 맑음과 달리기 트랙

 1인 가구로 살아가다 보면 자주 외로워질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우산도 없이 소나기를 맞닥뜨렸을 때처럼. 종일 맑을 거라고 말하던 일기예보를 과신한 게 잘못이었을까? 창밖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내가 건물 밖을 나설 때가 되자 금세 비가 후드득 쏟아졌다. 이 비가 언제 그칠 거란 기약 따위 없으니, 내게는 겉옷을 뒤집어쓰고 빗속을 내달리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쏟아지는 비를 추적추적 맞다 보니 여러 생각이 부유했다. 날씨를 탓하다, 진작 우산을 챙기지 못한 나의 안일함을 아쉬워하다, 우산을 쓰고 지나가던 행인의 시선이 느껴져 절로 몸을 움츠렸다. 마음이 복잡한 날에는 평소 아무렇지 않던 것들조차 괜히 날카롭게 다가오곤 한다. 점차 비에 젖는 나와 함께 내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런 날이면 나를 향하던 이유 없는 악의를 곱씹게 된다. 그날의 기억은 이를테면 옷에 배서 빠지지 않는 꿉꿉한 빗물 냄새와도 같았다. 즐거움이 가득한 공간에서 느끼리라 생각하지 못한 당혹스러움이 오래간만에 떠올랐다.


 당시 하던 게임은 ‘테일즈런너’라는 게임으로, 동화를 주제로 한 여러 달리기 트랙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게 목표인 달리기 게임이었다. 캐릭터 조형이 귀여운 데다 채팅을 주로 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된 게임이기에, 이 안에서 친목을 다지는 사람도 많았다. 이처럼 타인과의 거리가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어렴풋한 경계 때문일까? 이 게임에는 분명 좋은 사람이 많았지만, 그만큼 이상한 사람도 많았다.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만 소소하게 게임을 즐기던 나는 어느 날 어떤 상대로부터 의문의 친구 요청을 받았다. 그 상대는 나와 게임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않은 생면부지의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가 나에게 친구 요청을 하게 된 계기는 무척 단순했다. 내 캐릭터의 코디가 마음에 든다는, 실제 모습과는 전혀 관련 없는 덧없는 이유. 겨우 그것만으로 그는 내게 부담스러운 말을 거듭해서 건네왔다.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적당히 그의 답에 대꾸하고는 며칠 지나지 않아 그를 친구 목록에서 삭제해 버렸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는 부담스러운 호의가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든 상처 주겠다는 의도가 담긴 악의와 함께. 닉네임은 달랐지만 분명 나에게 친구 요청을 했던 그 사람이었다. 본인이 멋대로 마음을 밀어붙여 놓고, 잘되지 않으니까 다른 닉네임으로 와서 나에게 괜히 시비를 거는 모습이 실로 같잖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 사람의 본래 닉네임을 부르자 그는 금방 모습을 감췄지만, 그가 했던 말은 사라지지 않고 내 마음에 자리하고 말았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그런 비하적인 말을 들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다가도, 조금 마음이 진정되고 나자 서글퍼졌다.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 게임을 플레이하며 지내리라 생각하니 속상한 마음에 침울해 있던 그때, 함께 게임을 플레이하던 친구가 말했다. 


“네가 처져 있기만 하면 그 사람 좋은 일만 시켜 주는 거야.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고 즐겁게 지내는 게 너를 위한 일이 아닐까?”


 그 말을 곱씹는 것은 상대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친구가 해준 말을 긍정하며 나는 그 길로 바로 친구와 함께 게임의 트랙을 달리러 갔다. 즐거운 추억이 담긴 나날. 그런 날이 하루, 또 하루 쌓여가는 것을 지켜보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내 안에 그가 했던 말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내 손에 우산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젖은 옷은 언젠가 마르고, 흐린 하늘에는 곧 밝은 해가 떠올라 나를 반겨줄 것이다. 비에 젖어 추레한 몰골이더라도, 모든 것에는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탄성이 있다. 그러니 이 우울도, 결국에는 한순간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이미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나는 움츠렸던 어깨를 펼치고 다시 힘차게 달려나갔다. 비가 쏟아지는 길거리가 마치 달리기 트랙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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