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
"왕이시여! 나라 밖으로는 적들이 우글거리고, 나라 안으로는 굶주림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지 않는다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사태가 일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분명 망국의 병에 걸린 이 나라를 위해 칼을 드셔야 합니다!"
왕은 왕좌에 앉은 채 이마를 짚으며 신하가 열을 내며 올리는 간언을 들고 있다. 젊은 왕은 어제는 없었던 주름이 하나씩 느는 기분이 들었다. '저녁엔 조금 일찍 자고 싶군.' 이런 생각만 들었다. 신하는 이 젊은 왕의 행동이 자신의 말을 듣고 고뇌에 빠진 상태가 아니라, 그저 고뇌에 빠져 보여야 하는 상황이라 저렇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는 고개를 떨구고 아무도 듣지 못할 한숨을 내뱉고 뒤로 물러났다. 대전은 싸늘할 정도로 조용했다.
다.
다.
다.
영수는 담배를 꼬나물고는 탁탁탁 엔터만 치고 있다. 더는 그 뒤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다. 만 적고 있다. 에어컨을 틀은 탓에 창문도 열지 않고 뻑뻑 펴댄 담배에 방 안이 연기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몇 번이나 소설을 쓰려다가 껐고, 결국 마감 기일까지 다가와 허겁지겁 노트북을 열었다. 하지만 8 일 전까지만 해도 결말까지 주르륵 생각났던 자신의 소설이, 지금은 전반부 이후로 넘어가질 못하는 상황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엔터만 쳐대고 있는 것이다.
'판타지 소설이 나랑은 안 맞는 걸까?'
어렸을 적에 날밤을 새워가며 읽었던 그 수많은 판타지 소설들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노트북 옆에 잔뜩 쌓인 '실전 웹소설 쓰기!' 등의 작법서들이 가득하다. 한 번씩은 다 읽어 봤지만,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작법서도 중간까지는 열심히 읽은 탓에 너덜너덜하지만, 그 뒤로는 빳빳한 새 종이이다. 완독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책을 짚었다가도, 마음은 영 못 미더웠다.
'저 책을 다 읽는다 하여도,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은데......."
-꺼억
아까 마신 콜라 때문에 트림이 나온다. 영수는 아무도 없는 집이지만, 시원한 소리에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 그가 찌뿌둥한 몸을 풀려 스트레칭을 하자 이제야 코끝을 찌르는 담배 냄새에 정신을 차리고 팔로 휘휘 저으면서 창문을 연다. 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로 회색의 연기가 에어컨 바람을 타고 빠져나간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난다.
"아씨, 담배 냄새. 내가 나가서 피랬지."
영수의 애인인 나은이 들어오면서 꽥 소리를 냈다. 그리곤 방바닥에 잔뜩 어질러진 쓰레기들을 툭툭 차면서 들어온다. 그녀의 기분이 팍 상한 얼굴에 영수는 살짝 움츠려 들었다.
"아니 조금만 폈다고."
"조금이든 많이 든 그냥 피지를 말라고!"
영수는 말없이 뒤통수를 긁는다. 나은은 저 모습이 연애 기간 동안 보았던, 속으로는 다른 사람 말대로 하기 싫어 죽겠는데 차마 싫다고 말은 못 하는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더니 쭈그려 앉아 퍽퍽 쓰레기들을 집는다. 영수도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쓰레기를 집는다.
“뭔 이렇게 배달 비닐이 많냐!”
“아니, 그 우리가 맨날 먹은 것이지 뭐..!
머리를 긁적이며 영수는 휙 하고 비닐들을 낚아채간다.
"하, 이런 사람도 남자 친구이라고 사귄 내가 바보지. 병신이다, 병신!"
아니 왜 또 말을 그렇게 해, 중얼거리며 그는 축 처진 채 쓰레기들을 치운다. 그의 양손에 쓰레기통이 꽉 차 있는 걸 보고 슬쩍 통 뒤에 감추려 비닐들을 구겨 넣는다. 그 모습을 본 나은이 꺄아악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팔짝팔짝 뛰어 달려오더니 칵 소리를 지른다.
"아니! 쓰레기통을 비우고 넣으라고! 왜 숨기는데 언제 버릴 건데! 아니 그걸 왜! 아니 아니 아니이!"
쏟아지는 말에 영수도 발끈하려 했지만, 그냥 아무 말 않고 입술을 삐죽 내민 채 가만히 앉아있는다. 그 모습에 나은은 한숨을 길게 푹 쉬더니 차라리 방에 처 박혀 있어 하면서 영수의 엉덩이를 툭툭 찬다.
"아주 애를 키우는 기분이야 진짜."
영수는 말없이 일어서면 응애하고 들리게 중얼거린다. 그걸 들은 나은도 화가 팍 식어버려 피식하고 웃는다. 그는 자연스럽게 발을 서로 문대어 먼지를 툭툭 털고는 침대에 눕는다.
자취방의 싱글 침대, 여러 사람이 거쳐가 이제는 스프링이 맛이 가버려 이리저리 뒤척이면 터덕 소리가 나면서 튕겨 오르고, 도대체 어떻게 잤는지, 언덕길 마냥 한쪽으로 푹 꺼진, 저번에 흘린 라면 국물이 말라 시커먼 얼룩이 된 침대에 영수는 끄응 소리를 내며 기어들어간다. 그가 집에서 가져온 몇 안 되는 물건인 이불의 섬유유연제 향을 맡고는 덮는다. 아마 섬유 유연제가 없으면 아마 이 집은 쓰레기장 냄새가 나겠지. 그리고 좁아터진 거실에는 다이소에서 산 천 원짜리 방향제도 톡톡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는 가끔 저렇게 폭발한 나은이 금방 화를 식히는 데에는 인공적인 라벤더 향이 아주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프습--
전자담배의 연기가 뭉게뭉게 퍼진다. 영수는 와불처럼 누워, 한 손으로는 전자담배를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튼다. 계속해서 바뀌는 큰 영상 소리에 청소하던 나은이 욕을 하면서 들어온다.
"이 개 같은 놈아! 네 집이야 네가 청소해야지!"
"아니, 아깐 들어가라며!"
그녀가 불경스러운 와불을 부수러 발길질을 하자, 영수는 재빨리 발을 낚아 채 휙 하고 그녀를 끌어당긴다. 그녀는 살짝 발버둥 치다, 그대로 그냥 그의 품에 푹 안긴다. 영수는 킁킁거리며 그녀의 머리 냄새를 맡는다.
"안 감았어."
우엑-
"미친놈이, 지가 맡고는 왜 그래."
그는 후후 정수리에 바람을 분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입냄새 난다며 그의 주둥이를 꽉 잡고는 말한다.
"야, 저녁 뭐 먹을 거야."
"우리 그 저번에 산 삼겹살 먹을까."
"그거 아직도 안 먹었어?"
"엉, 그때 조금 남긴 거 다 얼려놨지."
"미친, 썩은 거 아냐?"
"냉동했다니까?"
"그거는 그냥 굉장히 천천히 썩는 거잖아."
영수는 먹고 안 죽으면 되는 거야 이러고 벌러덩 눕는다. 누워서 보이는 창문 밖에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예전에는 이 시간이면, 학원도 가고 피시방도 가고 했는데- 혼잣말을 하고 전자담배를 스으읍하면서 빤다.
"야, 나 배고파 뒤질 것 같아. 썩은 고기라도 먹자."
"안 썩었다니까."
"여하튼, 내가 니 방 청소했으니까. 고기는 너가 구워와라 알겠냐?"
그리고는 엎드려서 아까의 영수처럼 능숙하게 비틀린 자세로 유튜브를 켠다. 영수는 에휴 하고는 거실로 나갔다. 아까와는 다르게 말끔해진 거실 모습에 오 하고 감탄하고는 냉동고에서 얼린 고기를 꺼낸다. 그리고 돌덩이 같은 고기를 이리저리 툭툭 털면서 이대로 구우면 되나 안 되나 기웃거린다.
"야, 이거 그냥 구우면 되냐?"
"아니 상식적으로 그걸 그냥 구우면 되겠냐? 해동을 해야지 빙신아!"
방에서 으아아악 하는 꽥 소리가 터져 나온다. 영수는 도대체 처음에 어떻게 사귀었지 하면서 프라이팬에 불을 올린다. 그러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는지, 좁아터진 거실의 좁아터진 베란다를 열어 쌓아 놓은 짐덩이에서 부루스타를 찾는다. 한껏 신난 목소리로 나은을 부른다.
"나은아, 우리 옥상 가서 구워 먹을래?"
"아니, 그냥 나 배고프다고, 배고프다고! 그냥 먹으면 안 돼? 이거 들도 옥상에 줄줄이 들고 올라가서 언제 먹고 언제 치우냐고, 나 이따가 주리 만나러 간다고."
"그래도 분위기도 좋고 엉? 해도 지고 엉? 얼마나 좋아!"
어두운 방에서 밝은 거실로 귀신처럼 스윽 차가운 표정의 나은이 튀어나온다. 딱 봐도 고집부리지 마라 하는 표정인데, 영수는 그냥 생각이 없다.
"아이, 올라가서 먹자. 나 그러고 싶어."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자 나은이는 어휴 씨발 진짜 애잖아 하고 한숨을 내쉰다.
"그럼 니가 다 차리고 니가 다 하면 올라감."
영수는 신난 목소리로 오케이! 하고 부루스타를 들고뛰어 올라간다. 나은은 그 뒷모습 보고 끝없는 인내를 했지만 안 끄고 올라간 가스레인지를 보고 다시 스트레스 지수가 터져버렸다. 열린 문 밖에선 신난 영수의 파닥파닥거리는 슬리퍼 소리만 들린다. 그녀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 불을 내린다. 불 옆에는 마구잡이로 넣어서 얼린 탓에 리본 마냥 꼬인 삼겹살이 굴러다닌다. 설마 이게 해동? 그녀는 이제 두통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싸울 힘이 없어 고기를 툭 집어 들고는 전자레인지에 던져 넣고 해동을 돌린다. 어느새 내려온 영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조용히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이것저것 집어 몰래 옥상으로 튄다.
옥상에는 누군가 가져다 놓은 반짝이 돗자리가 있어, 그것을 펼쳐놓고 가운데엔 부루스타를 놓고 주섬주섬 바지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컵을 꺼내 기름이 내려오는 자리에 놓는다. 언제 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친구랑 같이 옥탑에서 고기를 구워 먹겠다 산 부루스타를 알차게 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배달을 시키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또, 약간의 부지런한 모습에 뿌듯함을 영수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제 해는 거의 다 저물었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그때, 탁탁거리는 슬리퍼 소리가 들리고 나은이 해동된 고기를 들고 올라온다. 표정에는 짜증과 귀찮음이 가득하긴 했지만, 돗자리에서 파닥거리며 준비하는 영수의 모습에 또 화를 한 번 삼키게 된다, 자신도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올라온 것을 본 영수는 능청스럽게 내가 다 준비하려고 했는데, 하고 고기를 받아 내려놓는다. 아 잠깐만, 하더니 그는 후다닥 방에서 맥주를 가지고 올라온다.
"아니 술도 마시게?"
"이게 옥탑낭만이지."
"하, 그걸 좀 왜 지금인지 설명해 줘."
"그냥 이러고 싶어서?"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나은이 차가운 맥주를 탁 까고는 마신다. 영수는 그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고 달궈진 팬 위에 고기를 올린다.
-치이이익
고기가 익는 소리만 나고, 적막한 분위기에 나은이 노래를 좀 켤까, 하며 핸드폰으로 노래를 튼다. 고기가 익자 고추장과 쌈장에 푹 찍어 햇반을 앞접시 삼아 올려놓고 밥이랑 후딱 삼킨다. 둘 다 배가 고파 수저를 놀리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 상추가 없네."
"상추는 사치품이야, 사치품."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뉴스에 맨날 나오니까 알지."
"그걸 아는 새끼의 냉장고에 상추가 시커멓게 썩어있네?"
"아 그래? 난 그거 깻잎 장아찌인 줄."
천연덕스러운 변명에 나은이 피식피식 웃는다.
그때였다.
투둑투둑 소리가 나더니 물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뭐야 씨바?"
"아, 비 오는 거 아냐?"
"왜? 갑자기?"
"몰라, 아 온다 제대로 온다."
이제 막 고기를 집어 먹을 찰나에 비가 오다니, 오늘은 진짜 제대로 꼬였다는 생각만 드는 영수였다. 나은은 손으로 고기를 최대한 지켜보지만, 가는 두 팔로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었다. 영수는 순간 이 기분이 다 거지 같아졌다. 세상이 자신을 그냥 이리저리 발로 차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그 와중에 나은이 꽥 소리를 친다.
"이 씨발! 이럴 줄 알았어! 아니 내가 그냥 먹자 했지 진짜 아오, 영수야 나 진짜 존나 힘들다 진짜. 빨리 치워 왜 멍 때리고 있어!"
그 말에 영수는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그리고 부루스타를 끄고 부랴부랴 반찬을 챙기고 내려간다. 먼저 계단으로 뛰어들어간 나은이 말한다.
"야, 돗자리는?"
"그거 원래 여기 있었어."
"그래? 아씨, 아 다 젖었어."
서로 짜증이 터졌지만 킥킥거린다. 개 어이없어 근데 웃긴 것 같기도-아니야, 개 어이없어하며 두 사람은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온다. 밖에 내리는 빗소리가 제법 거세졌다. 영수는 미안한 마음에 나은을 툭툭 친다.
"야, 배달이라도 먹을래?"
그 말에 나은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냥 주리랑 저녁 먹을래. 시간 없어."
머쓱해진 영수는 알겠어 그럼 내 것만 시킨다 하고 옷을 훌러덩훌러덩 화장실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 일단 섬유 유연제를 가득 넣고 싶다.
화장실 밖에선 나은이 젖은 머리를 말린다. 다행히 많이 젖진 않아 금방 말리고, 영수의 옷걸이를 뒤적거린다. 문득 나은은 신기했다. 맨날 거지처럼 하고 사는 영수지만, 항상 옷에선 은은한 담배냄새가 나긴 해도 섬유 유연제 향기는 끝내줬다. 예전에 듣기론 처음엔 향수를 뭐 쓰냐고 물어본 친구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피죤-이라고 답했다고.
그녀가 옷걸이에서 괜찮은 옷을 들고 화장실로 가 영수에게 괜찮은지 물어보려다 또 소리를 지른다. 영수가 콸콸 섬유 유연제를 붓고 있었다.
"아니, 왜 유연제를 그만큼 부어."
"향기나라고."
"그러면 니 피부병 걸려. 유연제 많이 넣으면 안 좋은 거 모르냐."
그러자 알긴 아는데 하며 긁적거리는 영수의 모습이 팍 짜증이나 이거 입고 간다. 하고 후딱 갈아입고는 나은이 나가버렸다. 영수는 아무 말도 않고 물이 다 채워진 세탁기를 본다. 이제 웅웅 거리면서 세탁기가 돌아간다.
웅-
웅-
영수는 문득 자신도 누가 저렇게 향기 나게 빨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