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비 그친 선로 위를 구부정한 등으로 걸어가는 당신의 뒷모습이 뿌리쳐도 뿌리쳐도 마음 한 구석에서 떠오릅니다. 유이치를 데리고 이곳 세키구치 다미오의 집으로 시집와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 저는 당신이 죽은 그날부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해 온 혼잣말을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12쪽)
이 글은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집 '환상의 빛'의 일부분이다. 이 책은 환상의 빛, 밤 벚꽃, 박쥐, 침대차 이렇게 4편의 중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 나의 마음이 가는 것은 '환상의 빛'이다. 잿빛 하늘과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서른두 살의 여인 유미코는 갑자기 죽어버린 남편에게 '~습니다'로 적는 편지글의 형식으로 나지막하게 이야기한다. 책 보다 영화를 먼저 접한 나는 영화 내내 깔린 흑백의 어두우면서 차가운 느낌이 소설을 읽을 때에도 느껴졌다.
서른두 살의 여인이 있다. 남편과 사별한 지 칠 년째이며, 해변 마을로 시집온 지 삼 년째이다. 새로운 남편과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지만, 아내와 젖먹이를 버리고 멋대로 죽어버린 남편에게 아무도 모르게 말을 걸고 있다. 습관 같은 것이 되어버린 혼잣말은 어느새 죽은 당신에게가 아니라, 그렇다고 자신의 마음에도 아닌,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가깝고 정겨운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해서 황홀해질 때도 있다.
저의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마음에, 비 그친 선로 위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당신의 뒷모습이 이제 또렷이 비쳤습니다. 하늘색 와이셔츠 위에 회색 블레이저코트를 입고 약간 등을 구부린 특유의 모습으로 혼자 묵묵히 이슥한 밤의 선로 위를 걷고 있는 당신의 뒤를 쫓으면서 저는 열심히 그 마음속을 알려고 기를 썼습니다.(23쪽)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질 때면 유미코는 선로 위를 걷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묻는다. 왜 그래야만 했냐고 묻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 답을 기다리며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묻는 것뿐이다.
당신이면서도 당신이 아닌 다른 얼굴이 언제까지고 마음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그렇게 이상한 발작을 일으키는 눈이 사실은 당신의 본성일 거라고,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나서 열흘 후에 갑자기 자살해 버릴 낌새를, 왜 저는 바깥으로 쏠린 왼쪽 눈에서 알아채지 못했을까요(19쪽)
후미진 동네에 사는 유미코는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근처에 사는 남학생을 혼자 좋아한다. 다른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일을 해야 하는 그 둘은 친해지게 되고 결혼을 한다. 유미코는 결혼하고 나서 예전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무심코 뱉어내는 남편의 말들과 행동을 유미코는 흘려듣고,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가 간직한 그늘이었음을 알게 된다.
해가 뜨기 시작하고 급격하게 붉은 기가 엷어져가는 해면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하얀 파도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바람이 없는 잔잔한 바다 한가운데에 금색 가루와 같은 빛이 떠있었습니다.(70쪽)
가만히 시선을 주고 있으니 잔물결의 빛과 함께 상쾌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곳은 바다가 아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생각되어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미쳐 날뛰는 소소기 바다의 본성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잔물결이 바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릴 것임이 틀림없습니다.(82쪽)
소소기 마을 앞의 바다는 반짝반짝 빛을 내며 물고기를 잡으려는 사람들을 이끌지만, 정작 물고기는 없고 사람들의 목숨을 삼키는 잔인한 바다이다. 어두운 밤 홀로 선로 위를 걷는 그는 그 환상의 빛을 보았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고자 하는 일은 결국 나를 위한 일이다. 처음에는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궁금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위해서라도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지난 그의 행동을 생각하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어떤 것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내 곁에 없기 때문이다.
환상의 빛은, 영화도 책도 나를 어두운 심해 저 아래로 끌어내린다. 내가 만들어내는 숨소리마저 나를 방해할까 걱정이 된다. 그렇게 숨 죽이며 보게 된다.
정신없이 시간에 쫓기면서 지내는 어느 날, 나는 나를 강제로 차분하게 만들고 싶을 때 책장에 꽂힌 이 책을 꺼내든다. 갑자기 죽어버린 남편을 향한 그리움은 책을 읽는 내내 검은 그리움이 되어 나를 지배하고, 어느 순간 빛이 반짝하지만 이내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는 보았고 누군가는 보지 못했을 그 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