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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 곰님 Oct 27. 2024

감히 기대해도 되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10월에 나무가 누레지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벗긴다. 매서운 날이 지속되고 밤이 오고 다시 서리가 내렸고 한기가 칼날처럼 문 아래 틈으로 스며든다. 야적장에서는 석탄 목재상 빌 펄롱은 석탄, 토탄, 무연탄, 분탄, 장작을 부지런히 배달한다.



펄롱의 엄마는 열여섯 살에 미시즈 윌슨댁에서 가사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했고, 가족들마저 외면한 그녀를 미시즈윌슨은 돌봐준다. 펄롱은 그 집 부엌에 있는 요람에서 유아기를 보내고, 다음에는 커다란 유아차의 안전띠에 매인 채 수납장 안 쪽 길쭉한 파란 주전자에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지냈다. 성실한 그는 개신교도 특유의 습관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며 술을 즐기지 않는다. 반짝이는 검은 머리의 아일린과 결혼하여 다섯 딸을 두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가끔 한밤중에 깨어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들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대로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은 언제 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29쪽)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배달이 밀린 펄롱은 수녀원으로 석탄 배달을 간다. 그리고 창고에 갇혀 있는 한 소녀를 보게 된다. 수녀는 숨바꼭질을 하다가 갇힌 거라고 둘러대지만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수녀원은 동네에서 빨랫감을 모아 세탁업을 하고 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일을 하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것도 같지만 굳게 닫혀 있는 문처럼 마을 사람들은 침묵한다.


수녀를 따라 예배당에서 나올 때 과수원에서 현관으로 이어지는 문이 안쪽에서 자물쇠로 잠겨있었다는 사실, 수녀원과 그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 조각이 죽 박혀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 수녀가 석탄 대금을 치르러 잠깐 나오면서도 현관문을 열쇠로 잠그던 것도.(53쪽)


수녀원에서의 이상한 느낌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나온 펄롱은 안개 낀 샛길에서 길을 잃는다. 그곳에서 한 노인을 만나는데 길의 방향을 묻는 펄롱의 질문에 이상한 답을 한다.


"이 길?" 노인은 낫으로 땅을 짚고 손잡이에 기댄 채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54쪽)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라고 펄롱에게 아일린은 이야기하지만 펄롱의 마음속에 수녀원에서 보았던 소녀가 계속 생각난다.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처음으로 혹은 오랜만에 친절을 마주한 것처럼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음을 터트리는 소녀를 생각한다. 그 소녀의 원래 이름이 펄롱의 엄마 이름인 세라와 같다는 것을 알았을 때 펄롱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리라는 것이 결정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문이 잠겨 있을 거라고, 아니면 다행히도 아이가 그 안에 없을 거라고, 아니면, 만약 자기가 그렇게 한다면 아이를 업고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가능할지, 아니면 어떻게 할지, 정말 뭔가를 할 것인지, 진짜로 거기 갈 것인지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게 펄롱이 두려워하며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다만 아이가 이번에는 펄롱의 외투를 순순히 받아 들었고 기꺼이 부축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116쪽)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121쪽)


펄롱이 용기를 내어 세라의 손을 잡고 눈 덮인 길을 걷는다.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그 일을 마친 펄롱은 발걸음 마저 당당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두려움이 크지만, 그럼에도 펄롱은 자기가 어린 시절 받은 관심과 사랑을 기억하며 어떻게든 헤쳐나가리라 생각한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120쪽)


모두들 지나치고 애써 외면하는 사소한 것들을 지나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면, 세상은 조금은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예기치 않은 일이 아니라, 감히 기대해도 될까 싶은 일이 일어나는 것. 소설에서 뿐 아니라 내 주위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추천사를 썼다.

'키거니언 엔딩'이라고 부르고 싶은 그것의 본질은 무슨 반전 같은 게 아니다.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감히 기대해도 될까 싶은 일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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