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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아래 Nov 09. 2024

보호자

남편이라는 세계




나는 결혼을 통해 남편이라는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누군가와 함께 먹고, 자고, 뒹구는 일은 한 세계를 깊이 경험하는 일이므로 나는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그 인간'의 세계에 초대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의 안전하고 튼튼한 울타리 '안'에 들어갔다는 의미이다.  


부부가 되면서 남편은 나의 법적 보호자가 되었다. 그 후 첫 건강검진에서 남편이 나의 보호자란에 능숙하게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그 이름이 적히는  것을 보는 동안 깊은 안정감과 묘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남편은 성장 후 홀어머니의 실질적인 보호자로서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 '보호자'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린다.


결혼 전과 초반에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고, 최근 여러 성격유형이론을 배우면서 그에 대한 논리적 이해도 뒤따랐다.


물론 한 사람이라는 세계는 정말 넓고 깊어서 보이는 부분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탐험한 부분만 두고 봐도 그는 좋은 '어른 보호자'이다.


그는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에서 실질적인 '안전'을 담당한다.


세상이 아이들에게 창의성을 이야기하고 꿈을 이야기하지만, 실은 인간의 발달 단계나 욕구 이론면에서 생각해 봐도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일단 안전이다.


이것은 의, 식, 주 같은 기본적인 안전 외에 심리적 안전감을 포함하고 실은 후자가 더욱 중요하다. 심리적 안감이란, 보호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받는 일이다.


남편의 자기 사람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다. 그에게 내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이해를 필요치 않으며 불가항력적인 일로 보인다.


내가 '어두운 터널 시절' 내 가족들을 사랑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던 것과 대조적이다.


나는 사랑하기 위해서 이해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래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했고, 이해하고 싶었다.


이해되지 않고 내 안에서 거부하려고 하면 두려웠다. 그렇게 결국 나 자신도 버려질까 봐. 어쩌면 내가 나를 버리게 될까 봐.


어쩌면 난 이 사람과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어린 시절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안전을 담보받고 성장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나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절대적인 사랑을 지켜보며, 사랑하는 데는 이해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그의 세계로 인해 어둡던 내 세계의 한편이 환하게 밝혀지고 색을 입는 기분이다.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내면을, 깊은 슬픔을, 나의 욕망을. 하지만 그는 나를 사랑한다. 그의 방식으로.


하마터면 나는 오해할 뻔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가 오래전 내게 한 이야기를 나는 이제야 정말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너와 같이 숲길을 걸으며 함께 감탄하고 느낌을 나눌 수는 없어. 하지만 니가 그 숲길을 걸으며 마음껏 감탄하고 느낄 수 있도록 난 옆에서 길에 놓인 위험한 것들을 한 발 앞서 치워둘 거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사실 슬펐고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하지만 완전히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앉아있는 내게 이제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 사랑이었는지, 그의 사랑을 오해하고 진심으로 받아주지 않았던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깨닫는다.


그랬건 말건 그는 크게 개의치 않고 자기가 할 몫을 묵묵히 해나간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핸드폰을 손에 쥐고 옆으로 돌아 누워 쇼츠를 넘기는 무심한 남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저 사람의 단순하고 단단한 세계에선 자살 같은 건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늘 그렇듯 일어나 쓰레기를 정리해서 버리러 나갈 것이다.



"뭐 필요한 거 없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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