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간의 불화, 직장에서의 업무 스트레스, 인간관계에서 오는 허탈감. 이 모든 것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즐겨 읽던 책에서도 더 이상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직장 내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격증 책을 손에서 놓지도 못했다. 하루하루가 무기력했다. 퇴근 후에도,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공부 어플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어느 날,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야, 이번 주에 당일치기로 자전거 여행 갈래? 괜찮을 거야. 기분 전환도 되고.”
나는 바로 거절했다.
“나 요즘 너무 힘들어서 여행 같은 건 생각도 못 할 것 같아.”
단순히 지쳐서만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여행에서 얻을 느긋함과 여유가 지금 내 삶에 균열을 일으킬까 두려웠다. 여행을 통해 얻는 에너지가 아니라,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더 심하게 찾아올 고단함이 무서웠다.
하지만 친구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 자전거 여행 가본 적 없잖아? 한 번쯤 해보는 거지. 재미있을 거야.”
이 한마디가 나를 움직였다. 정말 친한 친구였고, 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친구였다. 오랜 시간 서로에게 의지하며 힘들 때마다 서로를 도왔던 그런 친구. 그의 말을 믿고 용기를 냈다.
우리는 목적지를 군산으로 정했다. 달리 큰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자전거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충족하면서 도착 후 맛난 음식들을 실컷 먹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전에서 군산까지 약 120km 거리였다. 평소 가벼운 운동으로만 자전거를 타던 우리에겐 너무 먼 거리였지만, 생각보다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초보자다운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다.
막상 여행을 결심하니 나도 모르게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허무맹랑한 상상까지 하며 즐거움을 느꼈다.
새벽부터 서둘렀다. 성일의 아버지가 자전거를 대청댐까지 차로 옮겨주셨고, 우리는 거기서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 성일이와 함께 온 또 다른 친구 현철은 자전거 동호회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라, 그에게 많이 의지할 수 있었다.
대청호를 따라 달리면서, 시원한 새벽 공기에 오랫동안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감정들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여행을 가는구나.”
여행의 시작은 역시 신나는 법이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고즈넉한 풍경들이 나의 마음을 조금씩 끌어올려 주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갈 때 데크 길을 좋아한다. 인공 구조물이긴 하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그 느낌이 좋다. 바퀴가 굴러가는 일정한 소리도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하지만 인생이 늘 순탄할 수 없는 것처럼 여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의 설렘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라졌다. 몇 시간씩 자전거를 타다 보니 뜨거운 태양 아래 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내 몸은 점점 지쳐갔다. 무엇보다 내 자전거는 산악용 MTB에 가까운 ‘철티비’였다. 친구들이 한 번 페달을 밟을 때 나는 두 번, 세 번을 밟아야 했으니, 당연히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이 자전거로는 못하겠다···.”
속으로 몇 번을 외쳤는지 모른다. 친구들은 점점 멀어졌고, 나는 필사적으로 그들을 따라잡으려 애썼다. 이때부터 ‘다음엔 꼭 로드용 자전거를 사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시간이 흐르면서, 드디어 첫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다리는 무거웠다. 포기하고 싶었다.
'나 그냥 그만할까?'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여행을 완주해야만 나를 다시 일으킬 성취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절박한 마음으로 페달을 밟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정신없이 자전거를 타던 중, 도로 차단봉을 보지 못하고 그만 넘어졌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자전거 페달이 휘어져 근처 시내로 가 수리를 맡겨야 했다. 우리는 잠시 쉬며 음식을 먹었다. 메뉴는 맛있었다. 만두와 냉면이었다.
30분 정도 휴식 후 다시 출발했지만, 길은 여전히 멀었다. 끝없이 펼쳐진 도로와 오르막길은 내 다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다리야, 조금만 더 힘내. 아직 많이 남았어.'
우리는 중간에 마트에서 수박을 하나 사서 그 자리에서 쪼개 먹었다. 손으로 수박을 격파하듯 찢어, 더위에 지친 몸을 달랬다. 수박의 단맛과 짠맛이 섞인 그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세상에, 그토록 단 맛이 존재할 수 있을까.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자 마지막 고비가 찾아왔다. 둔부가 자전거 안장에 닿기만 해도 벌침에 쏘인 것처럼 따끔거렸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타기를 반복했지만, 속도는 나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우리는 친구 현철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현철이 끊임없이 우리를 격려하며 자신의 자전거를 나에게 빌려주기도 했다.
마침내 우리는 군산역에 도착했다. 기차 시간 15분 전이었다. 초보자답게 무턱대고 도전했지만, 12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순간, 나는 무엇인가 해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을 느꼈다.
이 자전거 여행은 나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었다. 그리고 그 성취감으로 나는 이직 준비에 도전할 수 있었다. 비록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괜찮다. 이 기억은 앞으로도 나에게 필요한 순간마다 다시금 나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어줄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작은 것이라도, 타인과 엮여 살아가고 있다. 자전거 여행 때 나와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그처럼. 때로는 현실의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 숨을 돌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럼 내게 손을 내밀어 줄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