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로 영상 자기소개 찍기
2024.11.04. (월)
알람도 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그놈의 비데오꾸리꿀룸 찍으려고.. 어제 그제 대본은 적어뒀으니 자연스럽게 읽으려고 했는데 영상을 돌려보니 생각보다 눈알 굴리는 모습이 거슬렸다. 프레젠테이션이면 모르겠는데 나에 대해 소개하는데 대본을 보고 읽는 게 어색해 보였다. 그래서 결국 외웠다. 덕분에 입사 두 달 반 만에 은행 이름과 팀 이름을 정확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핸드폰 사용해서 다양한 화면으로 찍으려다가 정말 쉽지 않아서 결국 팀즈 미팅으로 녹화하기로 했다. 편집을 최소한으로 하려고 화면 공유를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하다 보니 한 스무 번은 찍은 것 같다. 10시가 다 되어서야 영상을 완성했다. 덕분에 수업 시작 전에 잠깐 잘 수 있었다.
과제는 어땠냐는 선생님 말에 괜히 또 쫄아서 나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하시고 화면을 공유했더니 생각보다 격한 리액션을 해주셨다. 그리고 선생님 본인의 영상 이력서도 보여주시면서 나의 영상을 끝나고 메일로 보내달라고 하셨다. 이런 날이 오다니..! (는 잠깐 hace llueve 했다가 바로 고개를 흔들며 이마 짚는 선생님을 봤다.) 새 책으로 하는 첫 수업날이었다. 다양한 감정 표현에 대하여 배웠다. 항상 feliz나 no feliz.. 만 하다가 세상이 좀 더 넓어졌다. (심지어 이것도 ¡Feliz cumpleaños! 하다가 happy가 feliz군.. 하게 된 것) 수업이 끝나고 괜히 뿌듯해서 아빠에게 영상을 보냈다.
요가원에 가기 전에 cerrajería에 들렀다. 사실 금, 토, 일 세 번 왔는데 계속 문이 닫혀있었다. 한국에 한평생 지내면서도 단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는 열쇠집에 오게 되다니.. 열쇠 복사를 맡기고 언제까지 오면 될까요? 하려 했는데 뚝딱 복사해 주셨다. (나는 무슨 몰드를 따서 거기에 만들 줄 알았는데 나중에 영상을 찾아보니 열쇠 복사 기계가 있다..!) 코스타리카에서 뭐하녜서 그냥 스페인어 공부한다고 했더니 스페인어 잘한다고 칭찬도 해주셨다. 예전엔 은행에서 일하는데..로 구구절절 시작했는데 그럼 다들 까따이?해서(Banco Cathay라고 미국에 중국인이 만든 은행 같은데 또 그 코스타리카 지사가 우연히 집 근처에 있다.) 그 뒤로는 그냥 스페인어 공부하러 왔다고 한다. 한 세, 네 개 복사할까 하다가 여기저기 흘리고 다닐 것 같아서 친구에게 맡길 하나만 복사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가방에 달고 다니던 ESTHER 키링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전 회사에서 가장 오래 함께한 팀원분이 마지막 날에 안전하게 다녀오라고 호루라기랑 같이 선물해 주신 건데.. 지지난 주말의 무시무시한 산행까지 이겨낸 전우였는데.. 열심히 빨았더니 또 깨끗해졌길래 잘 말려서 오늘 처음 다시 달고 나온 건데.. 그러나 이미 밖은 어두웠고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속상했지만 간단하게 챙겨 온 저녁 도시락을 먹고 요가원에 왔다.
요가원은 제주도에서 지내던 취다선을 떠오르게 했다. 수업 시작 전 어두운 공간에서 누워서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거기에 더해 언니가 방에서 매일 태우던 팔로산토 향이 났다. 팔로산토 이름이 가물가물해 찾아보다 보니 남미 열대림에서 나는 것이었다! 여러 걱정을 안고 수업에 갔는데 생각보다 수월했다. 원래 월요일 저녁 수업은 초보자는 들을 수 없는 수업이지만 대장님이 해외 출장 가셔서 다른 선생님이 들어오신다길래 와본 것이었는데 앞으로 11월은 가끔 뛰고, 이렇게 요가원만 다니려고 했는데 운동이 정말 되려나? 걱정될 정도였다.
스페인어는 안 수월했다. 그렇지만 이제 쌓인 눈치코치로 옆 뒤 사람들을 보면서 잘 따라 해보았다. 요즘 유튜브 알고리즘에 금쪽이랑 티쳐스가 많이 떠서 보는데 금쪽이 영상 중에 오은영 박사님이 아이가 언어가 하나도 안 통하는 외국에 나가서 수업을 듣는데 앉아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듣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불안정하겠어요? 하셨다. 그게 저예요 박사님~ 의자를 사용한 자세를 마지막으로 수업을 마치고 누워서 마무리 시간을 가졌는데 비 소리를 들으며 아무 생각도 없이 누워있다가 선생님이 오셔서 요까지 덮어주셔서 너무 좋았다.
집에 가는 길에 장을 보려고 마트에 들렀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누구냐! 경계태세로 무시하다가 계속 어쩌고 저쩌고 말하길래 노!!! 노우!!! 했는데 듣고 보니 아니이.. 우리 방금 요가 수업 같이 들었잖아아..하는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심지어 마지막에 정리하면서 내가 실수로 친 분이었다. 가방에도 요가 매트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간단히 통밀빵만 사 오려고 했는데 양배추도 사고 옥수수도 사고 바나나도 사고하다 보니 가방이 또 가득 찼다. 집에 돌아와서는 기억이 없다. 파인애플을 먹고 설거지를 하려 했는데 눈을 떠보니 커튼도 안치고 불도 안 끄고 자고 있었다. 요가 때문이었을까 비데오꾸리꿀룸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