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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규 Apr 25. 2024

좋은 여행이란?

"여행"이 여행이 되는 순간

대학교 2학년 때, 친구들이랑 농담으로 갑자기 수중에 50억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할 건지, 학교는 때려치울 건지, 돈으로는 무엇을 할 건지 서로에게 질문했던 적이 있다. 한 친구는 카이스트를 자퇴하고 공부하고 싶었던 경제학을 공부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공부보다는 돈이 되는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답이지 않을까 싶다. 50억은 평생 아무것도 안 하고 살기에는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어떤 친구는 최소 100억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친구는 200억 정도는 있어야 한국에서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의문을 던질 수 있겠지만, 난 이 질문이 우리 삶의 목표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만약 나한테 50억이 생긴다면, 나는 당장 휴학계를 제출하고 세계 여행을 떠날 것이다. 겨울에는 따뜻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여름에는 시원한 나라로 떠날 것이다. 세계일주를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경험을 통해 ‘나’를 알아가고 싶다. 


나는 어릴 때부터 중국에 살면서 중국이 자랑하는 멋진 자연 풍경들을 구경했다. 백두산 천지를 운 좋게 볼 수 있었고,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북경에서 시작해 5,000km를 달려 서쪽까지 갔다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 21세기 손오공이 되어보기도 했다. 차에서 졸고 있다가 만년설이 보이자, 아버지가 갓길에 차를 세우셔서 가족 다 같이 만년설을 본 기억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생생하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차를 타면서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고, 중국 음식이 기름져 컵라면이 주식이었지만, 아직까지 내 인생 최고의 여행은 단연코 이 여행이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나는 평생 여행을 하는 사람이 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여행할 때는 내가 P (즉흥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다. 굳이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우연히 만난 새로운 사람, 뜻하지 않게 먹게 된 음식, 길을 잃었다가 발견한 예쁜 거리. 지금까지 나의 여행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이런 우연들이었다. 또 여행을 하면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멀어진다. 비슷한 맥락으로 여행을 할 때는 현재에 살게 된다.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지도 않고, 과거에 했던 일들에 대한 책임을 고려할 필요도 없다. 여행에서는 지금 누구와 함께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먹고 있는지가 제일 중요해진다. 좋은 여행을 가면 매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익숙하지 않고 일상과는 충분한 거리가 있는 여행지를 선택해야 한다. 좋은 여행지에서는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어야 한다. 사색에 잠기게 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사색이 스트레스를 주는 고민이 돼서는 안 된다. 여행지만의 매력이 있어야 한다. 바르셀로나처럼 좋은 건축물이 많거나, 몽골처럼 웅장한 자연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집 앞 카페는 결코 좋은 여행지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좋은 여행을 가기 위해선 좋은 여행지로 가야 한다. 


여행하는 선생님들에 들어와 첫 교육여행을 가면서, 내 첫 번째 알(세계)은 부서졌다.


나는 여행하는 선생님들이라는 단체를 대학생 커뮤니티 앱 '에브리타임'에서 처음 접했다. 칙칙한 공대생이 바라보는 여행하는 선생님들은 정말 낭만이 가득해 보였다. 항상 공대생 위주의 삶을 살고 있었는데, 공대생이 아닌 사람들과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게 설렜다. 여행하는 선생님들 홍보물을 보면서 함께 캠핑에 가 ‘불멍’도 하고 별을 보며 깊은 대화를 하는 상상을 했다. 방학에는 같이 해외여행을 가서 좋은 추억을 쌓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상상만 해도 과제와 수업으로 인해 사라졌던 낭만이 충전됐다. 그렇게 나는 ‘여행하는 선생님들’에 지원했고, 교육팀의 일원이 되었다. 

막상 들어오고 나서 체감한 여행하는 선생님들은 생각보다 낭만 있지 않았다. 한 달에 한번 볼까 말까 한 사람들, 생각보다 많은 공대생들, 무엇보다 교육여행뿐인 여행은 내가 생각한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 학기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여행이었고, 여행지도 하나 같이 재미가 없는 곳이었다. 내가 상상한 별과 불멍은 활동을 이어오던 사람들한테도 상상 속에만 있었다. 나는 여행의 낭만을 보고 동아리에 들어왔지만, 여행보다는 선생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실망감을 가득 안은채, 그래도 교육여행 한 번은 가야지라는 생각으로 활동을 이어왔다. 1년 정도 활동을 하고 나주고등학교로 첫 교육여행을 가게 되었다.


전혀 설레지 않았다. 여행지 자체도 매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애초에 여행을 목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고등학생들 대상으로 좋은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주에서 일어나는 어떤 우연도 기대되지 않았다. 오히려 변수가 생기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서, 아무런 변수 없이 무난하게 다녀오길 바랐다. 그냥 좋은 사람들과 함께 봉사를 떠나는 느낌이었고, 봉사를 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출발했다.


도착하고, 첫날에만 잠깐 “여행”이라는 걸 했다. 브런치를 먹고, 겨울 느낌이 물씬 나는 수목원에 갔다. 수목원에서는 딱히 볼 것도 할 것도 없었고 비까지 왔기 때문에, 딱히 좋은 여행으로 기억될 거 같진 않았다. 사실 말만 여행이지, 딱 카이스트에 있다가 배가 고파서 성심당 빵을 사러 갔다 오는 느낌이었다. 물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가는 그 여정을 여행이라고 한다면, 여행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기숙사에서 나와 성심당을 가는 걸 여행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선생님들의 숙소이자 나주고등학교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다음날부터 있을 수업 준비를 했다. 다들 내일 진행될 수업 걱정에 정신이 없었다. 내일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주고에서의 모든 순간이 여행으로 기억되긴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포기했다.

참 아이러니하게, 여행을 놓으니까, 여행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첫날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주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여행하는 선생님들을 소개하고, 나를 소개했다. 나, 관계, 세상을 주제로 수업을 진행했고, 우리의 수업 테마는 ‘항해’였다. 나는 2일 차 수업을 맡기로 해서, 첫날에는 학생들 옆에 앉아서, 다른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다. 선생이 아닌 학생의 신분으로 참여했다. 나도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학생들에게 했고, 각자의 고민 끝에 나온 고윳값(eigenvalue)은 아름다웠다. 학생들의 순수함에 나도 알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학생들이랑 함께 수다를 떠는 시간이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줬다.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이 뭔지 모를 이상한 감정을 잊은 채 첫날 저녁이 찾아왔다. 당일에 했던 수업 피드백과 함께 그다음 날 수업을 준비했다. 

이 나주고 “여행”은 수업 준비-수업-피드백-수업 준비의 반복이었다. 온갖 수다를 떨면서 새벽 2시까지 수업 준비를 했다. 모순적이게 온갖 걱정을 다하면서 과거와 미래에 빠져서 살았지만, 행복했다. 살아있다는 게 잘 느껴졌다. 체력적으로 힘든 내 모습이 마치 비행기를 8시간 타고 유럽에 도착해 멋진 여행을 시작할 여행자 같았다. 내 기준에 결코 여행지가 될 수 없던 이 장소에서, 여행을 준비하는 내 모습이 보이자, 내가 지금 많이 힘들어서 정신적으로 미쳐있구나 싶었다. 그냥 미쳐있다고 생각한 채, 나머지 일정들을 소화했다.

내 수업은 나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질문하고 싶었다.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학생들한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 같아서, 학생들과 함께 좋은 추억을 쌓고 싶었다. 계속 붙어 다니면서 학생들이랑 많이 친해졌다. 나주고등학교 학생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됐다. 저녁에는 계속 수업 준비를 하고 피드백을 진행했다. 사실 집중해서 수업 준비를 했으면, 새벽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선생님들과 함께 수다 떠는 시간이 너무 재밌었다. 유럽으로 갔으면 혼자 했을 사색을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나눴다.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도 와서, 우리 추억의 한 페이지가 돼 주었다.


나주고등학교에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대전으로 오는 기차를 탔다. 한 줌의 시간을 빌어 이 여정을 되새겨 보았다. “여행”을 하면서 즉흥적(P)으로 변하지도 않았고, 아름다운 우연도 없었으며,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멀어지지도 않았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에 그 어떤 것도 충족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인정하기 싫었지만, 정말 좋은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새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공대생이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을 해서 좋았다. 사색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냥 이 여행이 좋았다. 

내가 원래 갖고 있었던 여행의 기준이 무너졌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도 헷갈렸다. 이 여정이 여행이 아니라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걸 느꼈다. 그러면 나는 이걸 여행이라고 칭해도 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글을 쓰면서 문득 여행의 기준에 대해 관대한 게 나를 더 행복하게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나주고 “여행”을 여행으로 만든 건 사람이었다. 시간과 함께 사람이 쌓이면서 “여행”이 여행이 되었다. 하지만 혼자 떠난 여행도 좋은 여행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좋은 여행에 대한 기준을 서서히 넓혀가면, 어쩌면 나중에는 인생 자체가 여행이 되어, 삶의 매 순간이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기숙사에서 성심당까지 빵을 사러 가는 여정이 여행이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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