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8월 2일부터 11일까지
바다를 떠다니다 돌아왔다.
배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니 집이 낯설게 다가왔다.
몸이 배의 움직임을 기억하는지 가만히 누워있는데도 파도의 출렁임이 느껴진다.
눈은 아직도 푸른 바다의 잔상이 남아 창밖의 풍경이 수평선으로 보이곤 한다.
이제부터 그곳의 그리움을 그려봐야겠다.
2015.8.2
나의 객실은 6148호실이다.
6층 후방에 있다.
객실의 종류는 스위트 룸, 스탠다드 룸,디럭스룸, 그리고 이코노미 룸으로 가격별로 구별되는데 내가 머문
객실은 디럭스 룸이다.
디럭스 룸은 2인실이고 창문으로 언제든지 바다를 볼 수 있다.
커튼이 있었지만 한 번도 닫혀진 적이 없었다. 이 창문으로 기항지 풍경도 보고, 지나가는 배도 보고, 갈매기도 보고, 하늘도 보고, 바다도 매일 봤다. 아마 창문이 없었다면 여행의 즐거움이 반으로 줄었을 것이다.
내 침대는 창문을 바라보고 왼쪽에 박경화 씨는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박경화씨는 환경 관련 책을 쓰는 동화작가인데 호기심 많고, 명랑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나는 처음에 박경아 씨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박경하 씨로 알고 있었는데 여행 중반에 본명이 박경화 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밥을 절대로 남기지 않고, 커피는 마시지 않는다. 박경화 씨가 제일 혐오하는 것 중 하나는 이를 닦으면서 욕실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했다.
2015.8.3
새벽 4시 10분경에 국경을 넘었나 보다.
핸드폰 메시지로 로밍 안내 문자가 와서 잠에서 깼다.
배는 파도가 느껴질정도로 작은 흔들림이 느껴지지만 어제보다는 익숙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비행기를 타고 있는 기분이 든다.
창밖에는 어두운 바다가 보인다.
옆 침대에서 박경화 씨가 낮게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다.
어제는 만사가 귀찮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오늘은
잘 적응하고 그림도 그려봐야겠다.
박경화 씨는 활기차고 밥도 잘 먹는다.
러시아를 향해가고 있다.
오늘부터 다양한 선내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고 괜찮은 선상 강좌가 많았지만 나는 대부분 참여하지 않았다.
서울에 돌아와서 돌이켜보니 아쉬움이 남았지만 오랫동안 바다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후회하지는 않는다.
반면 박경화 씨는 많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객실로 돌아와 그날의 강의를 품평하며
나에게 조곤조곤 얘기해 주곤 했다.
사회, 환경 관련 강좌를 특히 선호했고 소설가들의 강좌는 들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박경화 씨에게 소설을 즐겨 읽느냐고 물었더니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박경화 씨가 가져온 책은 기항지에 대한 정보책이라던가 여행기였고,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를 가져와서 여행 틈틈이 읽었다. 나는 소설도 좋아한다.
태어나서 이번 여행 기간처럼 바다와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없었다.
특히 파도의 물결이 흥미로웠는데 가는 곳마다 바다의 표정이 달랐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지금까지 여러 작가의 작품을 통해 봤던 바다가 모두 진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2015.8.4
오늘은 오전 8시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원래 새벽에 일찍 일어나기도 했지만 배에서는 밤에 특별히 할 일이 없으므로 일찍 잠에 들어서인지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
새벽 5시쯤 잠을 깼는데 창밖으로 반짝이는 것이 배와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 날치가 아닐까 의심하며 주섬주섬 스케치북과 아이디 카드를 챙겨서 갑판으로 올라갔다.
갈매기였다.
수많은 갈매기가 배를 쫓아오며 날고 있었다.
어떤 갈매기는 방향을 틀다가 다른 갈매기와 부딪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갈매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러시아와 한국은 한 시간의 시차가 있다고 한다.
비가 약하게 내리고 있다.
드디어 첫 번째 기항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러시아 문자를 모르지만, 블라디보스토크라고 쓰여있는 것이 분명하다.
배가 매우 많은 항구다. 특히 짙은 회색의 군함이 인상적이었다.
객실 창을 통해 그림을 그리다가 혹시나 하며 손을 흔들어 보았다.
답을 하듯 한 러시아인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러시아인들이 우리를 보고 우리도 그들을 보고 있다.
2015.8.6
두 번째 기항지였던 영화 러브레터의 도시 홋카이도를 떠나고 있다.
오전에 항구에 들어설 때 인상적이었던 빨간색의 등대가 멀어져 간다.
이곳의 갈매기들은 좀 극성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오타루의 운하에서 봤던 먹이를 덥석덥석 받아먹던 넉살 좋은 갈매기부터 항구의 갈매기까지 이번 여행에서 만난 어떤 갈매기들보다 인간에 대해 친화적이다.
갈매기들도 항구마다 성격이 좀 다른 것 같았다.
2015.8.7
항해 6일째다.
홋카이도에서 나가사키까지의 거리가 꽤 멀기 때문에 이틀을 더 가야 도착할 수 있다.
사실은 더 빨리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크루즈는 정말 천천히 그렇지만 매번 정확한 시간에 기항지에 도착한다.
새벽 6시에 모닝 커피를 마시고, 아침, 점심, 저녁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다.
일본 음식이 주메뉴이고 여전히 짠맛에 놀라곤 하지만 점점 입맛이 익숙해지고 있다.
오늘은 화장실을 그려보기로 했다.
정말 작지만 있어야 할 것은 모두 있는 놀라운 곳이다. 특히 성능 좋은 드라이기가 매우 맘에 들었다.
2015.8.8
여행이 중반을 넘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동안 주로 방이라던가 사람들을 주로 관찰했는데 오늘은 크루즈의 공간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이 배의 가장 높은 층인 11층의 전방으로 가서 후방 쪽을 바라봤다.
배에 처음 탑승했을 때는 야외 수영장에 누가 들어갈까 하고 생각했지만, 여행 내내 사람들이 항상 가득 찼다.
전방 11층에 있는 작은 수영장은 주로 중년의 남성들의 공간이었고, 전방 9층의 수영장은 젊은 사람들이 후방 8층과 7층의 수영장은 주로 아이들이 이용했다. 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9층 수영장 앞의 무대에서 일본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아리랑, 임진강, 우리의 소원과 같은 흘러간 노래들을 무한 반복했다.
역시 뭐든 반복은 좋지 않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듣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
11층 전방은 대략 이러한 풍경이다.
배에 대해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정확한 용어를 알지 못하지만 배가 항로를 잃지 않고
움직이기 위한 장치들 같았다.
아무튼, 이곳은 일광욕하는 사람들 또는 조용한 장소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아지트 같다.
나는 이번 여행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었다.
여행 전날 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때문에 매우 분주하게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박 경화 씨는 나보다 꼼꼼하게 준비해 왔다. 기항지에 대한 여행 정보책들과 망원경(멀리 있는 배를 관찰하기 좋다), 나침판(시계만큼 중요하다), 시계(배에서는 전화를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약속을 하거나 식사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일본인들과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는 회화책도 준비해 왔다. 크루즈에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대략 500여 명씩 그리고 승무원들까지 합하면 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많은 인원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에서의 생활 패턴에 익숙해졌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모닝커피를 마시고,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오후 티타임에 차를 마시고 저녁을 먹었다. 객실 청소는 매일 오전에 하우스 키퍼가 우렁각시 마냥 정신없던 방을 배를 처음 탔던 날처럼 정리해 놓았다. 나는 기항지에 도착한 날을 제외하고는 갑판에 나가 바다를 보고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곤 했다. 그렇지만 아무도 빨래는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박 경화 씨는 임시로 빨랫줄을 만들어서 커튼 레일에 걸어두고 옷을 말렸다. 우리는 여행 내내 창문이 있는 객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되새기곤 했다.
배의 기계 소리와 파도의 출렁임그리고 창문 밖의 바다가 하나처럼 느껴졌다.
나가사키로 가는 중에 객실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창문 밖 수평선 근처에서 밝은 빛의 무리를 보았다.
바다에서는 멀리 배 한 척만 보여도 반가운 마음이 들기 때문에 박경화 씨와 나는 흥분하며 8층 갑판 위로 올라갔다.이미 많은 승객이 나와 구경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오징어잡이 어선이었다.
빛이 무척 밝았다.
박경화 씨가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나는 우리가 타고 있는 배 밑에도 오징어가 있지 않을까 찾아보았다.
항해하는 동안 쓰레기는 종종 보았지만, 물고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며칠 전에 만난 어떤 사람은 돌고래떼를 만났었다고 한다.
여행 내내 혹시 나도 마주치지 않을까 해서 몇 시간씩 바다를 감시하곤 했지만 아쉽게도 만날 수 없었다.
2015.8.9
배가 섬들 사이로 천천히 진입하고 있다.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섬들이 길게 펼쳐져 있는 풍경이 마치
어느 작가의 수묵화 속으로 들어간 듯하다.
부산을 떠났을 때는 분명 달이 둥글었는데
어느새 모양이 변해있었다.
집으로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나가사키의 해돋이를 보기 위해 많은 승객들이
갑판으로 올라왔다.
여행 내내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해가 뜨는 장면을 빠지지 않고 지켜봤는데
그중 나가사키에서 본 해돋이가 가장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매번 후방 쪽에서 아침을 맞았는데 오늘은 전방 쪽 갑판으로 가보았다.
크루주의 여유라는 것은 바로 이런 장면을 말하는 것 같다.
모두들 그냥 바다의 풍경을 느리게 감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젠 됐다. 충분하다라는 생각이 들 때 아쉬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번째 기항지인 나가사키에서 나는 하우스텐보스를 박 경화 씨는 군함섬으로 갔다.
일본 속의 네덜란드라는 소개글을 대충 읽고 선택했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과 아주 많이 다른 곳이었다.
나는 네덜란드풍의 마을을 한적하게 산책할 것이라고 상상했는데 내 생각과 다르게 하우스텐보스는 에버랜드 같은 테마파크였다.
점심으로 준 1500엔 밀쿠폰을 남김없이 쓰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기항지 코스에서 만난 적이 있는 부천에서 오신 60대 여자 분과 허리가 안 좋으신 부인과 함께 오신 남편되시는 70대 부부와 함께 하우스텐보스를 구경하기로 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것 같지만 부지런히 돌아다니면 몇 시간이면 전체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먹는 것보다 구경하는 게 더 좋다는 부천에서 오신 분과 허리가 안 좋으셔서 걷다 보면 뒤쳐져서 힘들어하시는 부인과 쇼핑에는 관심이 없으신 남편분과의 조합은 자유관람과는 멀어지는 길이었다.
나는 흰색관람차도 타고 싶었고, 맛있는 먹거리도 이것저것 사먹고 싶었고, 예쁜 선물 가게에서 구경하며 쇼핑도 하고 싶었지만 세 분은 사진 찍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들과 한 팀처럼 되어 버려서 발을 뺄 수도 없었다.
그래도 같이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밀쿠폰으로 나가사키 짬뽕도 먹고, 사진도 찍어드리고 손주들 사진들도 보고 자식분들 자랑도 들으면서 함께 한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많은 것들을 구경할 수 없었지만 포레스트 빌라의 고요한 숲에서 땀을 식히면서 도란도란 얘기했던 시간은 참 좋았다.
2015.8.10
마지막 기항지인 후쿠오카에서는
가라쓰 올레를 선택했다.
가라쓰는 제주도의 풍광과 매우 닮아있었다.
청소년 수련관 같은 곳에서 점심을 먹고 잠깐의 쉬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았다.
올레길임을 알려주는 표식이 여기저기 보인다.
가라쓰 올레는 산과 바다를 즐기는 여행이라고 소개 글에
쓰여 있던 대로 산과 바다를 함께하며 걸을 수 있다.
그렇지만 오늘은 정말 덥다.
하늘에서 독수리로 보이는 새가 날고 있다.
드디어 이 코스의 끝에 도착했다.
끝도 없이 산과 바다가 이어질 것 같았는데
언덕 하나를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지니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많은 사람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역시 사람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
나를 비롯한 함께 한 사람들은 매우 지쳤고
목욕을 하러 가기로 했다.
땀으로 옷이 흠뻑 젖어있었고, 머리는 뜨거운 태양열로
달궈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