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겼는데 왜 허무할까.

승리의 비용 명세서

by 학연서

논리적으로는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상대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고, 대화는 제가 정리한 결론으로 매듭지어졌습니다. 모임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누군가는 시선을 피했습니다. 분명히 이긴 논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통쾌함은 문을 나서는 순간 흩어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묘한 공허함이 그림자처럼 따라왔습니다. 내면 어딘가에서 자꾸만 되묻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


분명 이겼는데, 무엇도 앞으로 나아간 느낌이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논쟁의 목적은 상대를 이해시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었고, 존중받고 싶었으며,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상대가 정말 이해했는지, 아니면 그저 침묵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우리는 중요한 이야기를 더 이상 깊게 나누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일을 계기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과의 논쟁에서 승패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잃게 되는 까닭을요.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관계의 대가


말로는 이겼지만 상대는 멀어진 느낌.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또렷하게 감각될 때 공허함을 느낍니다. 이 공허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관계의 ‘손실’을 알리는 경고 신호입니다.


사람을 이기려 할수록 시야가 좁아집니다. 관계는 경직되고 말은 계산적으로 변하며, 다음 대화는 시작하기도 전부터 부담스러워집니다. 겉으로는 강해진 것 같지만, 속으로는 침묵과 거리감이라는 비싼 비용이 청구됩니다. 허무함은 바로 그 비용 명세서를 받아 든 순간의 감정이었습니다. 그 감정은 이렇게 속삭이는 듯 했습니다.


"네가 진짜 원했던 건 상대를 꺾는 승리가 아니라, 이해받는 느낌, 존중받는 관계, 그리고 함께 더 나아지는 삶이 아니었니?"



문제를 다루는가, 사람을 심판하는가


그 당시 느꼈던 공허함은 이긴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관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대를 이기려 했던 그 찰나, 저는 무의식적으로 ‘이 사람이 나를 존중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불안을 해소하려다, 오히려 상대를 존중할 기회를 스스로 발로 차버리고 말았습니다.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사실은 ‘사람’을 문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직장에서 “저 사람은 고집이 세다”며 인격을 규정하거나, 연인에게 “너는 항상 그래”라며 낙인을 찍거나, 가족을 향해 “너는 절대 안 변해”라며 벽을 세우는 순간 대화가 막힙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이기려 들면 상대도 즉시 ‘방어 모드’가 도기 때문입니다. 이때 양쪽 모두 틀리면 자기 가치가 훼손될 것 같고, 밀리면 무시당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결국 논쟁은 문제 해결의 과정이 아니라 각자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몸부림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서로에게 배웠다, 우리 관계가 나아졌다”는 감각이 설 자리가 사라집니다.



문제와 사람을 분리한 자리에 켜지는 ‘학습 모드’


그 경험 이후, 사람과 문제를 분리해서 바라보니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문제에는 자존심이 없고, 나를 평가하는 눈도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나를 증명하거나 방어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은 자리에는 ‘학습 모드’가 켜졌습니다. 상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유용한 정보들이 들려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이를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덕분에 같은 문제로 반복되던 갈등의 고리가 끊어지고, 문제 앞에서 나를 증명하려는 대신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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