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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지 Jul 27. 2024

《주홍글씨》

우리는 대대로 몹쓸 짓을 할 거요




"저는 당신에게 몹쓸 짓을 했어요."
헤스터는 중얼거렸다.
"우리는 서로가 몹쓸 짓을 한 거요."
사나이는 대답했다.

p. 41



작품 해설은 《주홍글씨》가 상징에서 상징으로 끝맺는 ‘윤리소설’이라고 집약한다. 소설 속 ‘A’의 의미가(단어가) 변해감에 따라 청교도적 윤리관이 여실히 제시된다고.


개신교의 여러 갈래 중에서도 다분히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청교도 사회에서 화두가 된 ‘간통’ 죄악을 청교도의 관점으로 즉, 하나님이 선악과를 베어 무는 하와를 단호하게 처벌하듯이 취급한다. ‘A’가 어떤 단어의 머리글자일지 마지막 장까지 추측해야 했던 건 신의 개입과는 별개였지만.



‘A’는 Adultery(간음)에서 Able(유능함), 끝내 Angel(천사)로 승화된다. 해설이 흥미로운데, “이 글씨는 헤스터의 굴할 줄 모르는 참회의 의지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저주의 A자로부터” 승격된다고 한다. 참회가 저주를 이긴다. 선한 믿음이 죄악을 이긴다. 불굴의 의지를 본뜬 희생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알레고리다. 고전이라는 것은 뻔하다는 뜻이 아닐 텐데도 윤리라는 꼬리가 덧붙으면 실은 고전적이거나 뻔하다는 내실이 드러난다.


고전은 어렵기까지 하다. 졸음에서 깨어나 민망하게 눈을 비벼야 하는 순간도 듬성듬성 찾아온다. 1800년대인 17세기 문화를 지금에야 독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시차가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 책장을 덮지 않는 한, 활자로 예비된 구수한 이야기들의 출혈을 막을 도리는 없다. 그 시절의 문화는 21세기보다 보수적이다. 종교로, 언어로, 생활로 빚은 ‘고전’이라는 업적이 안타깝게도 주먹구구식으로 즉각적인 도파민거리를 좇는 현대인들을 답답하게 만들 따름이다.


그럼에도 고전이라는 저명성이 여태껏 유구한 까닭은 대학 같은 집단이 작품을 솎아내고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한다는 부제를 내거는 것과 상통한다. 무엇이든 긍정으로 분류하고 오래 답습하면 유의미해 보인다는 원리다. 그 이면에는 본질에 목마른 사람들의 일부 유망한 지적 허영심도 한몫한다. 《주홍글씨》의 고전성을 버릇없이 논하기보다 책이 일개 독자에게 전달하는 세 가지 상징을 톺아보자면,


첫째, 나도 상간녀의 딸 ‘펄’처럼 죄를 품고 태어난 아이다. 비단 기독교적 세계관이 아닐지라도, 나 또한 내면의 악마를 자주 훔친다. ‘죄를 품고 태어난’이라는 표현이 거슬린다면 “나도 상간녀의 딸 ‘펄’처럼 부모의 은밀한 죄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둘째, “아름다움에는 모든 게 용서가 된다. 저속함마저도.” 이는 뮈리엘 바르베리의 소설 《고슴고치의 우아함》 62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알다시피 지금은 아름다움을 급조해 내기 쉬운 사회다. 굳이 용서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그 흔한 아름다움이 사회를 이룩한 건실한 기반들을 수월하게 넘고도 남는다.


셋째, 소설은 공동체의 도덕률을 200년 전과 비슷한 양심으로 점검케 한다. 여성에게 유독 가혹한 성적인 잣대를 들이대던 사회에서도 비합리적인 절차에 죄책감을 품는 남성은 이윽고 내면의 해방을 얻어 소멸한다. 소멸이라는 결말이 시대가 선사하던 최선의 덕목인지라 내심 아쉬우면서도 소설은 그 소멸이 곧 승화로 여겨지리라는 통찰을 내던진다.



내 가슴은 여러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큰 집이었으나, 외롭고, 차갑고, 난로도 없었소. 나는 난로에 불을 피우고 싶었지요. 내가 늙고, 우울하고, 병신이기는 했지만 인간들이 주워 모으도록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나로서는 터무니없는 꿈은 아니었소.

p. 41



시대를 거듭하는 가치는 이토록 강력하다. 안타깝게도, 세상의 보폭과 비례하게 현대의 죄질 또한 추악함을 감추는 데 있어 더욱 치밀한 수법으로 타락하고 있다. 지구는 오랫동안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는데도 지구 속 먼지 같은 인간들이 유별나게 말썽이다. 아름다움은 어떠한가. 죄와 마찬가지로 종잡을 수 없이 여러 갈래로 뻗쳐 있다. 통용되는 미적 범주는 세분화되었을뿐더러 사람에서 동물로, 식물과 사물 등 유무형의 자원들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21세기가 선함을 찾아볼 수 없는 경쟁터라 할지라도, 악은 언제나 한 번쯤 선에 굴복하기 마련이다. 그 근거로서 우리는 여태껏 도덕과 양심을 받든다는 사실이 기저에 깔려 있다.



만약 우리가 온오프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독식하지 않고 고전의 양분을 섭취하며 훈련받아 온 세대라고 가정해 보면 어떨까. 아마도 고전이 삶의 척도가 되어 그 밖의 자료를 되려 뻔하디뻔하다고 여기는 오만함을 장착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고전의 막연함이 독서 습관에서 비롯됨을 인정한다면 고전을 처리하는 초보적인 해독력에 좌절하지 않을 깜냥을 얻을 수도 있겠다.


17세기의 대가인 너새니얼 호손은 불과 며칠 전까지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훤히 미움을 샀거나 알려지지 않은 불륜이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는 동시에 현실에서 끊을 수 없는 악의 꾐 같은 정욕, 인간 본능의 참혹성 따위와 다투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선지자나 마녀가 아니다. 여러 소문을 섞어 독창적으로 배합하던 평범한 이야기꾼이었을 테다. 지금의 간통죄가 그때처럼 처형이라는 종국의 제재를 맞지 않으며 따가운 수치 또한 어디까지나 피고의 선택사항으로 전락해 버린 이 시대의 헐거운 처벌 풍습을 그가 마주한다면 과연 어떠한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자극이 일상의 노이즈가 되어 버린 시대, 분명하게도 《주홍글씨》는 건조한 만큼 유익하다. 요즘은 더욱이 시간과 돈을 투자해 윤리라는 덕목을 기꺼이 함양하려 하지 않지 않는가? ‘나’라는 표면적 개체의 브랜딩이 너무나도 당연시되기에 도덕이 비집고 들어갈 곳은 그저 일각의 호감을 사려고 검은 양복에 반듯한 자세로 예의를 차려 어필해야 하는 평가의 자리 말고 제법 마땅한가. 우리의 도덕은 나르시시즘적인 실용성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취업 전선에 데어 두 발은 타 버리고 제때 그 선을 넘지 못해 눈알만 굴리기 바쁜 예비 사회인, 인정욕의 할당량을 어느 정도 성취해 도태기에 접어든 예비 참고인, 주관이 선악을 집어삼킨 예술가적 몽상 호소인의 입장이라면 윤리란 더욱이 성립하기 어렵지 아니하겠는가.



이제 이 운명을 결정하는 면회는 끝났다. 골짜기는 다시 우중충한 고목들만이 우거진 호젓한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나무들은 수없이 많은 혀를 가지고 거기서 일어났던 일을 두고두고 속삭일 것이었다. 어느 인간이 그들보다 더 현명했으랴! 그리고 우울한 시냇물은 이미 가슴에 사무친 신비한 사연에 또 하나의 사연을 더할 것이었다. 그래서 냇물은 아직도 조잘조잘 계속 흐르고, 여러 세대를 계속해도 그 조잘대는 말투가 결코 명랑해지지 못할 것이다.

p. 222



2024.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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