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훈의 약속을 중심으로
민병훈의 영화 <약속>(2023)은 영화라는 매체의 고유한 기능성에 충실한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이미지와 시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기록한다. 그 과정 속에 <약속>은 영화라는 매체만이 가지는 고유성, 즉 이미지의 편집을 통한 시공간의 자율성을 즉각적으로 활용한다. 영화는 감독 민병훈의 아내이자, 아들 민시우의 엄마였던 안은미 작가를 여의고 살아가는 그 둘의 부자지간을 다루고 있다. 제주도가 배경이지만 지역성이 따로 돋보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단 한 번 한라산이 언급되기는 하나,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단지 일 년 내내 바뀌는 자연의 계절성과 그 안에 속해 살아가는 인물들 자체를 집중한다. 영화는 아내이자 엄마였던 그녀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감독 민병훈의 ‘이미지’와 아들 민시우의 ‘시’로 구축되며 앞으로 나아간다.
영화를 이루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본다면, 이미지와 시일 것이다. 먼저 영화 속 이미지는 광활한 자연과 계절성을 지닌다. <약속>에서는 다큐멘터리적인 면모가 지극히 들어난다(물론 계절성만을 다루는 극영화도 있다) 본고에서 말하는 다큐멘터리적인 면모는, 단지 오랜 촬영의 기록성에 의거한다. 변화하는 계절과 감독과 아들이라는 두 피사체를 두고 오랜 기간에 기록하며 결국 영화의 끝을 향해 구축되는 과정을 얘기한다. 그 과정 속에 아들 민시우의 키는 서서히 커가고 창작된 시는 늘어난다. 그러면서 그 시들은 변화하는 계절의 이미지들과 병행된다. 그렇게 아빠와 아들은 같이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아들 민시우는 어느 날,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비가 운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슬픈 비라는 시를 적어본다. 그렇게 영화 속 민시우는 단지 아들이 아닌 시인으로서 발돋움한다. 엄마의 기일에 아들에게 숨겨왔던 엄마의 무덤에 가보자는 말, 그런 그날에 엄마에게 시를 선물해 주자는 아빠의 말에 민시우는 시를 적어 나간다. 엄마라는 단 하나의 관객을 두고 민시우의 시는 아빠 민병훈이 만들어가는 이미지와 융합한다. 시에 눈이 내리면 이미지엔 눈이 오고 있다. 화면과 내레이션은 다소 직관적이지만, 시가 있어 그렇지만은 않다. 관객은 광활한 자연의 이미지들을 보면서도 시를 통해 머릿속에 각기 다른 이미지들의 떠올림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건 분명 각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먼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를 살펴보자. 어떤 여성과, 어떤 어린아이가 나온다. 카메라는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롱샷으로 잡힌 두 인물, 그리고 그 옆을 아우르는 장대한 나무들의 이미지는 한 폭의 그림을 보듯 인간과 자연의 공존성을 지닌다. 또 이 단편적인 이미지의 색들은 다큐멘터리가 아닌, 조금 더 의도된 극 영화적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그만큼 깔끔하고 정제된 화면이다. 많은 영화 작가들은 이미지를 구축하는 과정에 자신만의 약속을 지닌다. 그건 창작자만의 서사의 배열의 방식과 편집 과정을 통한 이미지의 나열 간의 약속이다. 그럼 영화 <약속>에서 민병훈 감독이 약속한 첫 오프닝 시퀀스는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을까. 다큐멘터리 속 연출된 듯 깔끔히 정제된 화면 속에 놓인 두 인물은 누구였을까.
영화 <약속>은 지나치게도 솔직하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낙천적으로도 보인다. 항시 영화는 인물이 가있을 위치에 미리 카메라가 놓여있다. (오랜 기록을 통해 인물이 움직이는 동선을 미리 알고 있음을 얘기하는 바가 아니다) 그리고 아빠와 아들이 놓여있는 프레임 속의 아빠는 연출된 듯 대사를 내뱉는다. “시우야, 아빠가 있잖아. 시우가 커 가면 나중에 엄마의 무덤을 보여주기로 했던 거 기억나?”그렇게 그 둘은 약속을 한다. 아빠와 엄마의 기일에 엄마의 무덤에 찾아가기로 했던 약속, 그리고 엄마가 죽기 전 아들 민시우에게 다시 만나자고 했던 약속을 말이다. 그렇게 다큐멘터리의 방법론에 의구심이 드는 순간, 다큐멘터리를 편집하고 있는 민병훈의 모습이 나온다. 영화 속에 감독이 영화를 편집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그걸 실제 영화에 다시 한번 기재한다. 그 과정 속에 의구심은 전복된다. 솔직한 것 그 이상의 솔직함으로 아들과 아내에게, 그리고 영화에게 좋은 아빠이자 창작자로서의 좋은 영화 쓰기가 관통되는 순간이다.
영화는 다른 매체의 예술보다 다소 시대적 보편성을 지닌다. 쉽게 말하면 만만해 보이는 지점이 있다. 그렇게 산업화를 이뤄냈다. 쉽게 접근되며, 기술에 유동적이다. 하지만 많은 영화 작가들과 비평가들이 시도했던 영화가 가진 고유한 기능성들은 달리 봐야 된다. 소련의 영화감독 에이젠슈테인(1898~1948)이 샷의 편집과 충돌을 통해 제3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려 했던 것처럼 민병훈의 영화 <약속>도 그렇다. 기록과 영화적 순간이라는 고유한 기능성에 충실하려 한다. 그렇게 영화는 시간이 흘러 계절 속엔 나무와 바다의 이미지는 변화하고 성장해가는 민시우가 달리 보인다. 영화는 그렇게 기록해 나간다.
그러다가 영화에 말미에 엄마의 기일이 다가올 때면 갑자기 어느 순간 지금까지 기록되었던 프레임이 역행하는 순간이 온다. 내리던 눈은 하늘로 올라가고 일렁이던 파도는 제자리로 헤엄한다. 그리고 이내 민시우는 뒤로 뛰기 시작한다. 맥락적 개연성이 보이지 않는 기이함이다. 기록되었던 이미지들은 과거로 역행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갖은 역행의 이미지를 거치면서 영화 속에 나오지 않았던 어린 시절 시우의 모습도 나온다. 유치원에서 발표하는 어린 시우가 기록된 이미지, 지금보다 훨씬 어린 아기였던 시우의 이미지가 나온다. 그렇게 영화는 다시 오프닝 시퀀스로 돌아온다.
이내 영화는 첫 장면과 같은 이미지로 종착한다. 어떤 여성과 어떤 아이가 있고 카메라는 끝내 얼굴을 비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전에 보여줬단 동일한 화면 속 한 쇼트가 다르다. 단 한 번 카메라는 앞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오프닝 시퀀스에서 보이지 않았던 그 두 인물의 얼굴이 보인다. 어린 시우와 엄마 안은미가 앉아 있다. 그렇게 영화는 영화적 고유한 기능을 통해 메시아적 구원을 일으킨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고유한 것으로서 아들 시우가 보고 싶었던, 감독 민병훈이 보고 싶었던 엄마이자 아내인 안은미는 이내 영화로서 부활하는 것이다. 현재는 작고한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작가 크리스 마커(1921~2012)는 영화에서의 촬영 행위, 즉 샷은 천사의 총이라고 얘기한다. 사냥에 사용되는 총의 샷은 실체를 죽이지만, 카메라의 샷은 그 상대를 영원히 기록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단순하면서 깊다. 민병훈은 과거의 그들을 기록해 냈고, 현재를 기록해 나갔으며 결국 영화 속에서 아내를 부활시킨다. 결국 다시 만나자는 시우와 엄마의 ‘약속’을 민병훈의 이미지로 이루어 낸다. 참으로 아름다운 헌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