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평]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

우리는 적이 아니다

by 바랜

드라마 보고 읽으면 좋은 감상평


40부작(20화)으로 끝을 맺었지만, 한 주는 더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아쉬움이 남는다. 재밌게 봐서 아쉬운 것도 있지만 급하게 엔딩을 내다보니 갈등의 해결이 허무하게 느껴졌고, 한 화에 너무 많은 걸 담으려다 개연성을 잃었다. 결국 시청자 입장에선 더 들어야 할 이야기를 차마 듣지 못하고 끝이 났다.


마지막 15, 16화 (37,38,39,40화)에서 세자의 태도는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라서 의아했다. 당연히 자신이 왕이 될 거라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적장자의 등장이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보여줬던 세자의 성품이나 동생 이림과의 관계를 봤을 때 세자가 취한 태도나 행동들이 이해가 안 갔다. 그걸 차치하고 보더라도 내적으로 갈등하는 장면도 없이 분노했다가 일을 바로 잡아야겠단 계기나 결심 없었다. 그렇기에 갑자기 무릎을 꿇고 이림의 편에 선 게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강력했던 좌상이 엔딩을 내야 할 시점이 되자 갑자기 허술해진 게 아쉬웠고, 서래원에 대한 것 등 풀리지 않은 흔히 말하는 떡밥 회수가 안된 인물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앞서 언급한 여러 아쉬운 점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난 이 드라마가 좋았다.


드라마 방영을 확정 짓기까지도 어려웠으리라 짐작한다. 각색하셨던 드라마를 제외하면 작가님의 오리지널 첫 작품이고, 피피엘이 없는 사극에, 여사라는 소재까지.


아마 '여사 구해령과 대군 이림의 로맨스'라는 소개 문구가 아닌 '여사 구해령의 성장과 사관들의 이야기'가 내세워졌다면 방영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겉으론 로맨스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목에 다 나와있다고 생각한다. 사관 구해령. 이 드라마는 사관과 해령이의 이야기다. 매 번 말로만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온갖 서사와 분량은 다 남주가 가져가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와서 이 드라마도 그 루트를 탈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걸 깨부수고 해령이의 이야기를 하고, 사관들의 입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적이 아니다.


좌상의 사람이었던 사희에게도 해령은 동료였다. 은임과 아란과 함께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왜 사관이 됐는지 나눌 수 있는 동무이자 또 서로의 도움이 되기도 하는 그런 동료.

세자의 처소에 밤새 있었던 사희를 세자빈은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좌상에게 해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 민우원에게 부탁했다.

주상과 좌상에 맞서 손주를 지킨 것은 대비였고, 역사를 바로잡으려 대비와 함께 거사를 도모한 것은 모화였다.


뻔한 그저 그런 드라마였다면, 사희는 좌상에게 휘둘려 여사들을 등지고 해령을 해치려고까지 했을 수도 있다. 사희와 세자의 일을 알게 된 세자빈은 이미 사희를 궐밖으로 내치거나 해하려 했을 것이다. 대비는 좌상에 의해 진작 죽음을 당했을 거고 거사를 도모하는 건 모화가 아닌 구재경이 됐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적이 아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 드라마는 편견이 만들어낸 허상을 부쉈을 뿐이다.


정말 이 드라마가 해령이와 이림의 로맨스가 주였다면, 해령은 결국 이림과 결혼을 했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부부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림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삶을 버리고 부부인으로 살고 싶지 않다며 돌아선 것도. 결국 끝까지 제도에 얽매인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자신으로서 사관이란 꿈을 지켜간 것도. 오롯이 해령이의 의지였다.


만약에, 만약에라는 것들을 자꾸 덧붙이게 되는 이유가 여전히 구시대적 드라마가 많은데도 이 드라마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말하고자 한 바에 충실했다는 점이 대단하게 느껴져서다.



전하. 저를 베셔도 사필은 멈추지 않습니다. 제가 죽은 이 자리에 다른 사관이 와서 앉을 것이고, 그 사관을 죽이시면 또 다른 사관이 와서 앉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 땅에 모든 사관들을 죽이시고 모든 종이와 붓을 빼앗아 가신다고 해도 결코 막으실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노인에게서 아이에게로, 그렇게 전해질 것입니다. 그게 진실의 힘입니다.

신입사관 구해령, 최종화 중



사초를 찾아낸 것도, 칼에 베일지언정 사필은 멈추지 않겠단 의지로 사관들과 함께 역사를 바로 세운 것도 해령이었다.


해령을 포함한 여사들은 품계를 받아 정1품이 되어 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에 올랐다. 은임과 아란은 선진이 되었고, 사희는 선생이 되었다.


이젠 일상처럼 사책을 품에 안고 입궐하는 해령이의 모습을 엔딩으로 드라마는 끝난다.

3년을 매일 입궐했어도 병사들이 해령이를 무조건 막아서고 보는 것처럼

세상의 편견을 바꾸기란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 막아서는 것들을 넘어서 입궐한 해령이처럼 언젠가 나도

편견이란 벽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해령이의 이야기이자 여사들의 이야기였던 '신입사관 구해령'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하고, 여사라고 다른 사관들과 다를 바가 없으며, 깡이 있고, 자신의 꿈을 사랑하는 해령이의 모든 것이 나에게 응원이 되었고 길잡이가 되었다.


과거 여사가 있었더라면 더 나은 오늘날이 되지 않았을까 했던 작가의 말처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이라는 과거에 살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다.

해령이가 붓을 잡았던 것처럼.





덧붙이는 글.



해령이만 바라보며, 해령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포기하겠다며 난 네가 전부라고 한 대군 이림.

여사들을 서리라 낮춰 대하지 않고, 흔한 클리셰처럼 짝사랑남 1이 아닌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만을 생각하며 살고, 해령이에겐 좋은 선진이 되어 준 민우원.

비록 마음을 내주진 않아도 세자빈을 정중히 대하고, 해령을 여사라고 무시하지 않고 활을 건네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세자.

윽박지르고, 팔목을 잡아끌고, 권위를 내세우고 "난 나쁜 남자지만 널 사랑해" 하는 캐릭터가 아니어도 들꽃 하나도 함부로 꺾지 않고 연정소설 따위라고 불리는 소설을 쓰는 남자도 충분히 멋있고 매력 있는 인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아버지들. "네가 나보다 더 나은 왕이 될 거란 걸 안다."라는 세자에게 하는 대사로 아비로서의 마음을 드러내는 주상. (좌상에게 휘둘리며 자신의 자리 지키기에 전전긍긍하지만 해령의 진심이 담긴 한마디에 표정이 풀어진다) 권력의 줄에 서고 싶지만 딸인 사희의 안위나 건강이 우선인 사희의 아버지. 한 땐 좋은 아버지였고, 자식이란 이유로 자신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해도 항상 덮어주던 민익평.


이 드라마에선 악의 세력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고, 막 나가지 않는다. 그조차 안 되는 지금 현실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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