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북부에서 날씨가 슬슬 차가워지는 건 10월 막바지, 딱 이쯤이다. 낮에는 여전히 괌 날씨만큼 덥지만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서 얇은 자켓을 챙겨 다니기 시작한다. 커피나 도넛을 사러 단골집에 들르면 어느새 시즌 한정으로 펌킨 메뉴가 추가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달라지는 것은 집집마다 마당에 꾸며놓은 할로윈 장식들이다. 지나다니는 길목마다 해골, 호박, 산타, 마녀, 좀비 등 할로윈/크리스마스 불빛이 즐비해지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입구에서부터 독특한 호박이 진열되어 있다.
10월 할로윈, 11월 추수감사절, 12월 크리스마스에서 1월 초 새해맞이까지 큼지막한 공휴일이 연이어 예정되어 있다 보니 회사에서도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해 다들 산만해진다. 좀 유명한 식당이나 카페, 술집에서는 이런 공휴일들을 핑계 삼아 매주 이벤트를 연다. 동네에서도 1년에 한 번뿐인 푸드트럭 축제라던지 지역박람회, 호박농장 등 짧게는 3일에서 길게는 1달 반 정도 가을 행사가 끊임없이 있다. 덕분에 주말에 어디를 갈지 정하는 것도 평일 내내 핫한 주제이다.
지난주에는 처음으로 호박 농장 (pumpkin patch)에 다녀왔다. 1인당 $17 (24,000원 정도)를 내면 입장권 + 호박 1개를 구매할 수 있는데 600 에이커 (600 acres를 한국 평수로 변환하는 게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아서 생략한다. 대략 엄청 넓은 땅)에 달하는 농장에는 농장 직원들이 미리 따서 운반해 둔 호박이 잔뜩 놓인 호박밭이 있다. 농장을 나가기 전에 이 밭에서 가장 실하고 동글동글 예쁜 놈으로 골라 집으로 데려가면 된다. 집에 데려간 호박은 눈과 입을 파서 호박 귀신처럼 조각하기도 하고, 물감을 칠해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만들기도 한다. 우리 집은 힘들게 이고 지고 온 호박 두 개를 귀찮아서 그냥 대문 양옆에 앉혀 뒀다.
호박 농장에는 호박밭뿐만 아니라 해바라기밭, 옥수수밭에 지어진 미로 (corn maze), 짚라인 (ziplines), 미끄럼틀, 기차, 건초/볏짚 마차 (hayrides), 호박 포토존 등이 마련되어 있어 가족들이 다 같이 반나절을 보내기 좋아 보였다. 나는 한국에서 유치원 때 배추 수확 체험, 대학교 때 오이 수확 체험을 다녀본지라 호박농장에서도 호박을 직접 재배하게 될 줄 알았는데 미국 대표 가을 행사인 호박농장은 한국에서 하던 농촌체험과는 결이 많이 다른 활동이란 걸 이번에 다녀온 후에야 알게 됐다. 그냥 집어가라고 잔뜩 흩뿌려둔 호박들이라니.
어쨌든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그다지 반려동물들을 배려하는 분위기의 동네는 아니라서 내가 끔찍이도 아끼는 우리 집 멍뭉이를 바다에도 못 데려가고 어디 콧구멍에 바람 쐬어 줄 곳이 마땅치 않아 답답하던 참에 이런 야외 행사가 있으면 나로서는 참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매년 가고 싶을 정도로 대단히 재밌지는 않았지만 이런 귀여운 주말 활동이 또 영 싱겁지만은 않더라. 입자가 고운 모래가 휘몰아치는 통에 주차해 둔 흰 차에 흙먼지가 수북이 쌓여 집에 오는 길에 호박농장 입장료보다도 비싼 $20을 내고 세차를 해야 했지만.. 우리 가족 올 가을 첫 주말 나들이는 그래도 좋았던 걸로 마무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