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감정 지나친 공감
Empath (a person with paranormal ability to relate; 공감능력과 감정이입이 지나치게 발달해서 타인의 감정을 마치 내 것처럼 이입하여 느끼는 사람)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건, 5년 남짓 괌에 사는 동안 가까워진 특별한 친구로부터. 배경사진 속 부처는 바로 이 특별한 친구가 몇 개월간 직접 그려 내게 선물한 그림이다.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토론했다가, 때론 세상이 떠나가라 깔깔댔다가, 걱정과 관심을 거두지 않고, 위로를 건네고,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주고, 끊임없이 장난을 치면서도 절대적인 존중을 바탕으로 선을 넘지 않는 그런 우정을 나눴다.
어느 진지한 날들 중 그가 말했다, 우리는 둘 다 Empath가 아닐까 한다고.
막연하게 인지하고 있던 어떤 개념이 조금은 선명하게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오랜 기간 나를 괴롭히던 지독한 고민, 나는 예민하게 태어났다는 것.
나와 간접적으로 연관된 일에 소모되는 감정과 에너지의 양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산책을 하다가 다리를 저는 주인 없는 개를 만나면 뒤도는 순간 울음이 터졌고,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를 들으면 일하다가도 운전하다가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눈물이 차올랐다.
영화나 드라마에 이입되는 정도가 너무 심해서 몇 년간 유명하다는 한국 작품은 볼 생각조차 않거나 그게 아니면 일부러 몰입을 깨려 영어 더빙을 틀고 봤다. 미국 작품을 볼 때에는 스포일러를 다 확인한 후에 밝은 내용에 해피엔딩인 게 확인되면 그제서야 볼 수 있었고, 대부분의 경우엔 화면을 보지 않고 뒷배경에 틀어만 놓은 채로 감상을 했다. 그래야 빠져들지 않을 수 있어서.
슬픈 소설을 읽은 날에는 한 시간은 거뜬히 넘는 시간 동안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을 했다.
이렇듯 허구인 게 명백한 일들에도 감정이 주체가 안 되니 실제 이야기가 나오는 뉴스나 다큐라도 보고 나면 말 그대로 일상생활이 힘들 지경이었다. 끔찍한 사건이 글로 적힌 뉴스를 읽었다가 일주일 가까이 악몽을 꿨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북클럽을 진행했을 때는 동물을 잔혹하게 죽이는 장면이 담긴 다큐 영상을 봤다가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어느 넓고 어두운 곳에 가둬진 듯한 절망을 겪어야 했다. 잠깐이지만 육식을 하지 못하게 됐고, 관련 자료를 계속해서 찾았고, 전 세계에 퍼져있는 체계화된 도축 시스템과 동물권에 대하여, 환경에 대하여, 자본주의에 대하여 고민과 낙담을 반복했다.
이 지독한 잠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 끊임없이 되뇌기. 나와 관련 없는 일이다. 내가 마음을 쓰건 쓰지 않건 변하는 건 없다. 슬프고 무서운 일도 즐겁고 행복한 일처럼 그냥 일어나는 일이다. 세상에는 어차피 내가 보지 못하는 고통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알지 못해서 괜찮을 뿐이다. 그러니 알지 말자고, 모르던 상태로 돌아가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억지로 그렇게 기억을 지워버린다. 그래야 내가 괴롭지 않게 살 수 있으니.
이런 회피의 날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를 계속 따라오던 와중이었다. 별 일 없는 나의 하루가 왜 이렇게 힘겨운지에 대해 물음표만 가득하던 때였다. 나의 특별한 친구가 그 생전 처음 듣는 Empath라는 말로 우리를 묶어 나를 위로해 준 것은.